081. 레이디를 보았습니다2021.06.11.
내쉬의 발사 명령과 함께 밤하늘을 새파랗게 찢는 화살의 궤적이 수없이 늘어졌다. 그리고 레이디도 날았다. 지붕에서 지붕으로 넘나드는 그녀는 약올리듯 아슬아슬하게 화살을 피했다.
“아아……. 이런 거였군?”
내쉬는 너무도 가볍게 화살비를 피하는 레이디를 보며 이를 갈았다. 어떤 머저리가, 레이디에게 털리고서 울었다기에 한심하다 욕했는데 오늘 당해보니 알 것 같았다. 그건 그냥 터지는 눈물이 아니었다. 너무 분해서 눈알이 탈 것 같이 화가 나서, 절로 흐르는 것이었다. 죽어라 내빼면 덜 분했을까. 약 올리듯 아슬아슬하게. 손닿으면 잡힐 듯이 간당간당하게. 정말 팔짝 뛰고 분해 못 견딜 만큼 얄밉다. 으드득. 어금니가 사납게 짓씹히는 가운데, 손에 쥔 종이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진다. 길롯 백작이었다. 꺼멓게 죽은 얼굴을 해선, 그의 손에서 ‘증서’를 빼내려 애쓰고 있었다.
“화, 확인만…….”
“머저리 등신 같으니라고.”
이건 상징적인 의미다. 레이디가 광산 증서를 가져갔다 한들, 재발급받으면 되는 일이다. 어떤 멍청이가 토지거래소에 가서 감히 길롯 백작 앞으로 내려진 금광산의 명의를 옮겨가려 하겠나.
“분명히 잘 두었는데 어째서, 어젯밤에도 잘 품고 잤는데…….”
길롯은 기어이 그의 손에서 증서를 빼 가 펼쳐보았다. 착착 접힌 종이를 펼치자 그곳엔 비슷한 듯, 잘 꾸며진 위조문서가 있었다. 차마, 확인도 하지 않고 가지고 왔느냐는 타박은 나오지도 않았다. 어찌나 머저리 같은지. 덕분에 백여 명이 넘게 보는 앞에서 같이 한 묶음으로 바보가 되고 말았다. 재위에 오르면 반드시, 제일 먼저 내쫓아버릴 테다. 평생에 도움이 안 되는 버러지 같은 놈. 내쉬는 이를 아득바득 갈며 이제는 까만점이 된 레이디를 한껏 노려보았다. 하하하-. 메아리치듯 울리는 웃음소리에 울컥 속이 뒤집힌다.
“이건 가져가 봐야 쓸모없으니, 손이나 녹여야겠소!”
증서를 불태우며 피어나는 불꽃이 이내 그의 가슴에도 옮겨온 듯 속이 절절 끓는다. 반드시 잡아서 오늘 일을 후회하게 해주마. 발아래 깔아놓고 이 분이 풀릴 때까지 짓밟아주리라. 내쉬는 ‘레이디’가 증서를 태우는 모습을 보며 다짐에 다짐을 더했다. * * *
“전하!”
레이얼은 찬바람과 함께 들이닥친 클로이를 곧장 제 품에 쓸어 담았다. 얄팍한 셔츠를 타고 뼈가 시린 냉기가 무시무시하게 뿜어져 나온다.
“왜, 왜 이렇게 늦었어?”
“왜 이렇게 늦긴.”
입이 언 모양인지 발음이 어눌하다.
“길롯이 어찌나 꾸물거리는지 기다리다가 그런 거지.”
키들거리는 목소리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잘될 걸 알고 있었다. 실패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초조하고 불안했다. 내쉬, 그와 같은 피를 물려받은 또 다른 시오도르의 집착이 ‘레이디’의 이름 뒤에 숨은 그녀를 찾아내고 말 것 같아서. 둘이 마주한다는 생각만으로도 피가 바짝바짝 말라버리는 기분이었다.
“숨기는 게 있는 건 아니고?”
“아니, 전혀. 숨길 일이 뭐가 있어. 가지고 있던 증서만 보여주고 불태운 게 전부인 걸.”
클로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그걸 그냥 태우게 두고 보지 않았을 테니 하는 말이지.”
“아아…… 뭐. 화살도 좀 쏘고.”
화살 소리에 레이얼의 잘생긴 눈썹이 와그락, 험하게 일그러졌다. 미간에 새겨진 주름이 또렷했다. 클로이는 손을 들어 그의 주름을 꾹꾹 눌러 펴주며 노래하듯 흥얼거리듯 덧붙여주었다.
“발도 좀 구르고, 씩씩거리고.”
말끝이 길게 늘어지는 것이 뒷말이 분명 있는 것이리라. 레이얼은 콧소리를 내는 클로이의 눈이 완연한 곡선을 그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즐거운 기색이 가득한 표정. 새파란 눈동자가 더 없이 예쁘게 반짝인다. 대체, 저 눈에 무얼 담아왔을까.
“그리고?”
보채주길 바라는 것을 알아, 채근하듯 묻자 클로이가 짧게 웃었다.
“울먹이기도 했지.”
“울었어?”
“아니, 분해서 눈이 벌게졌었지. 아아……정말 장관이었는데, 우리 전하가 이 좋은 구경을 놓치다니! 하고 탄식했다니까.”
“내쉬가?”
“그럼, 그분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라 번들거렸다고. 맹세해. 그건 눈물이야.”
“맙소사.”
이제야 날아갈 것 같이 기분 좋아 보이던 클로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쉬에게 거하게 한 방 먹였으니, 신날 수밖에.
“흘렸으면 더 좋았을 텐데, 기어이 참더라고.”
“그래도 이미 충분할 테지?”
“충분하지만, 난 원래 욕심꾸러기잖아. 언젠가 꼭 우는 모습이 보고 싶어졌어.”
“엉엉 울어주면 좋겠어?”
“응. 분해서 펑펑 우는 모습을 보고 싶어.”
“분해서?”
그 말에 레이얼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전혀 상상되지 않는 모습이나, 볼 수 있다면야 절대 잊고 싶지 않을 장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문득 꼭 보고 싶다는 열망이 든다.
“나쁘지 않은 생각인데?”
“나쁘지 않긴. 끝내주겠지.”
“그런가.”
고개를 떨군 레이얼이 뒷말은 거의 입안으로 중얼거리며 클로이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찬바람에 얼었던 금발이 품에 안고 있는 사이 녹아 그리 차갑지 않았다. 따끈한 실내에서 맛볼 수 있는 기분 좋은 청량함. 딱, 그 정도였다. 쪽. 쪽. 짧게 이어지는 입맞춤이 쉬지 않고 클로이의 정수리에 떨어져 내렸다. 가볍고 포근한, 마치 첫눈을 닮은 것이 쉬지 않고.
“가. 이제 쉬어.”
“가?”
“가.”
“벌써?”
어리광부리듯 애교있게 늘인 클로이의 목소리에 레이얼이 목 졸린 표정이 되었다. 온갖 인내심을 끌어내 점잖게 보내주려는데, 이러는 건 반칙 아닌가. 그라고 해서 클로이를 놓고 싶을 리가 있나. 보고있어도 보고 싶고, 안고 있어도 부족했다. 레이디의 활동이 끝났으니 이젠 이렇게 와주지도 않을 테고, 문을 닫아걸고 있기에 만나러 갈 수도 없다. 보고 싶으면 슬그머니 공작저의 담을 넘어 짧게 볼 수밖에 없는데, 자칫 들키면 클로이의 명예에 흠이 날 테다. 말하자면 이젠 만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를 이만 돌려보내라고 하고 있었다. 아쉬움을 옅은 한숨에 실어 보낸 레이얼이 두 팔에 힘을 줘 으스러지도록 클로이를 힘껏 안았다.
“어서 가. 늦었어.”
클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들어 그의 허리를 레이얼이 했듯 힘껏 마주 앉아주었을 뿐이었다. 마주 닿은 두 심장이 내는 소리가 공명하듯 한 소리로 울었다. 두근 두근. 달콤하고도 귀여운 소리였다.
길롯, 길롯, 길롯! 저 무능한 버러지! 내쉬는 제 뒤로 따라붙는 길롯 백작을 매섭게 쳐내고 말을 집어 타고 달렸다. 많은 것을 바란 것도 아니고 고작, 레이디가 오기 전까지 지키고만 있는 게 그렇게 어렵나? 담판도 그 자신이 지을 것이라 말해주었다. 그런데도! 얼어버린 돌바닥을 두드리는 편자 소리가 병장기가 맞부딪히듯 사납게 터졌다. 다각거리다 못해 딱딱거리며 돌망치를 때리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내쉬가 문득 말고삐를 힘껏 죄어 방향을 들었다. 말머리가 향하는 곳에 있는 건, 하나였다.
‘아르네 공작저’
문을 닫아건 건 안다. 한 번이라면 모를까 두 번은 밀고 들어갈 수 없을 테다. 하지만, 그래도. 눈이 뒤집히는 것 같은 이 순간 갑자기 아르네 공녀가 떠올랐다. 시뻘겋게 잘잘 끓어대는 이 속이, 그녀의 청명한 시선 한 번이면 누그러들까 하는 턱없은 생각이 들었다. 만나주지 않을 테지. 절대. 그녀는 항상 그랬다. 자의로 타의로. 늘 그를 밀어냈다. 자극하기 위해서였다면 대단했고, 우연이라고 하기엔 사람을 돌아버리게 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아르네 공작저만이라도, 멀리서 불 켜진 공녀의 방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저 멀리 아르네 공작저의 푸른 지붕이 가물거리며 시야에 잡혔다. 밤하늘과 땅의 경계를 흐리는 듯한 짙은 감색의 지붕은 어둠과 지독히 잘 어울리면서도, 또한 또렷하다. 마치, 아르네가 그러하듯. 우습게도 지붕마저 주인을 닮아 똑같이 생겼었다. 분명, 고요하게 존재하나 아르네는 언제나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그저 실재하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이 튀어나온 송곳처럼 또렷해 시선을 앗아가는 것이다.
“헉…….”
마구 달렸던 탓에 숨이 흐트러져 하얗게 엉겨 붙은 채로 퍼져나간다. 내쉬는 말 위에 앉은 그대로, 한참이나 숨을 고른 후에야 다시 말을 몰았다. 다각, 다각, 다각. 얼어버린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일정하고도 느릿하다. 한참을 달려온 말은 근육이 잔뜩 달아올라 밤인데도 불구하고 전신에서 하얗게 피어오르는 훈김이 여실했다. 말을 공작저에 바짝 몰아간 것은 어떤 의도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가까이. 별 생각없이 마음이 시켜서 한 일이었다. 잠들어 있을 그녀가, 설령 깨어 있어도 그는 만나주지 않을 것임을 알아도 이 순간 너무도 절실해서. 하지만, 굳게 닫힌 철장문 사이로 비친 것을 본 내쉬는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레이디?”
그의 눈이 고장난 게 아니라면 소리 죽여 공작저 화원을 걷는 것은 ‘레이디’가 분명했다. 길게 늘어뜨린 금발, 늘씬한 장신의 몸이며 특유의 가벼운 발걸음까지.
“레이디!”
내쉬는 제 앞을 가로막아선 철문을 사정없이 흔들며 목청을 높였다. 그 소리에 느긋하던 레이디가 움찔, 하는 것과 동시에 마치 어둠 속에 녹아 버린 듯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눈 깜짝할 새의 일이었다. 내쉬 역시, 제 눈을 의심할 만큼. 그의 고함에 처소를 지키던 이들이 몰려나오며 공작저의 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누구냐!”
하지만 그는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등불을 들고 다가와 쳐든 기사는 그를 단번에 알아본 듯 입을 오므라뜨리며 한껏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레이디가 이쪽으로 들어왔다.”
“내쉬 황자님?”
“문을 열어 당장! 레이디가 들어왔다! 잡아야 해!”
그의 말이 핑계라고 생각한 듯 다들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도 그의 말에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러다 레이디를 놓치면 네가 책임질 건가!”
답답한 마음에 언성을 높였으나 정말 아무도 꿈쩍하지 않는다. 너무도 태연한 모습에 정말 자신이 착각한 걸까? 싶던 것도 잠깐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고집부리듯 버텨 서 있는 아르네 기사의 모습에 레이디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감히, 제국 황자의 말을 일개 기사가 무시하다니! 당장에 황족모독죄로 목을…….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난폭하게 뻗어나가던 내쉬의 생각이, 맑은 목소리에 뚝 잘렸다.
“……레이디 아르네?”
바닥을 두드리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홈드레스에 숄을 두른 공녀가 나타났다. 그녀 역시 소란을 듣고 급히 달려 나온 듯, 다소 헝클어진 기색이 역력한 머리칼이며 굳은 얼굴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레이디를 보았습니다. 당장 수색하세요!”
그의 말에 미묘하게 표정을 굳히던 것도 잠시, 아르네 공녀는 곧장 명령을 내렸다.
“들었나? 2개 조를 따로 투입해 공작저를 수색하게.”
그의 말에 이렇게 선선히 따라준 건 처음이었다.
“…….”
그런데도 내쉬는 만족스럽기는커녕,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건, 클로이가 그를 밀어내기 위해서라는 걸 알아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쉬는 가로막힌 것을 알면서도 한 발을 내딛고 말았다. 철컹. 구두코에 부딪힌 철창문이 새된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