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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 승자와 패자 (80/121)

080. 승자와 패자2021.06.08.

“진짜 돈 다 어디다 쓰나 했지.”

클로이는 사방이 번쩍거리는 길롯 백작저를 질린 표정으로 걸었다. 분명 별채인데도 눈 닿는 곳마다 화려한 장식품이 가득가득하다. 별채가 이 정도면 본채는 어떻다는 거야 대체. 작게 중얼거린 클로이는 날렵하게 몸을 날려 어둠에 숨어들었다. 출발 전, 레이얼에게서 자료를 받은 덕에 다행히 헤매지는 않으나 절대 쉽진 않았다. 용병대를 불렀다더라, 기사를 늘렸다더라 하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본채로 가야 하는데 경비가 보통 삼엄한 게 아니었다. 잠깐사이 마주친 경계조만 네 번이었다. 경계가 너무 삼엄하니, 대충 별채서 마무리할까 하는 지극히 실리적인 충동이 든다.

“흠…….”

하지만, 역시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길롯 백작저에 누가 와 있는지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었다. 내쉬 황자. 레이디의 목표물을 눈앞에서 가로챈 어린 길롯. 모욕을 견디지 못한 레이디가 자리를 박차고 가버렸더라 하는 이야기는 수도에 파다했다. 사람들은 그녀의 긍지를 이해하는 한편, 내쉬 황자가 새로운 대항마로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와 마주치지 않고 아무거나 들고 나간다면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할까? 절대 그렇게 놔둘 순 없다. 오늘 그녀는 반드시 길롯의 본채에서, 내쉬 황자와 담판에서 승리해야 했다. 게다가 마지막이 길롯이라는 것 역시 보통 의미가 아니다. 그건 길롯도 마찬가지 일테니, 오늘 밤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할 테다. 다만, 이 순간 아주 조금 후회되는 게 있다면 딱 하나.

“하……. 길롯 백작저가 이렇게 으리으리한 줄 알았으면 큰 자루도 가져올 걸 그랬지.”

클로이가 사방에 번쩍이는 것들을 아쉽게 바라보았다. * * *

“사병을 꽤 늘렸다더니?”

창가에 선 내쉬가 물샐틈없이 경계를 서는 인원을 보며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항간에 오백이 넘는다는 소문이 돌지 않았던가. 용병단만 셋을 고용했고, 기사를 따로 백여 명을 모집했다는 소리를 그 역시 들은 바 있다. 그런데 길롯 백작저를 호위하는 이들은 아무리 잘 쳐줘 봐야 백여 명. 물론, 꽤 많은 인원이긴 하나 소문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랐다.

“아아……. 그이들은 콰이펄른에 있습니다.”

“콰이펄른?”

황후의 외유는 아직 멀지 않았나? 내내 창밖을 바라보던 내쉬의 시선이 비로소, 길롯에게 닿았다. 서열 정리가 끝난 후 다시 만난 길롯 백작은 이전의 불손한 태도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아주 공손했다.

“황실 분위기가 뒤숭숭하니, 별장에까지 여력이 닿지 않을 테지요. 그래서 고용한 이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고, 귀한 분을 호위할 이들이니까요.”

겨우 하루만에 다른 사람이 된 듯 대답이 거침없고 꽤 논리정연하다.

“어머니께서 시키셨나?”

길롯 백작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다. 내쉬는 조아린 길롯 백작을 보며 눈을 가늘게 늘였다. 무려 황제와의 나들이이니, 호위에 신경이 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많다. 허용된 사병의 수를 훌쩍 넘지 않았나.

“쯧.”

내쉬는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머저리들. 당장 황제에게 잘 보일 생각에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있다. 투병 중이라고는 하나, 황제는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말에 정면으로 반하는 짓을 해? 이 일을 빌미 삼아 레이얼의 진영에서 꼬투리를 잡으면 어떻게 대응할 생각이지? 가뜩이나 당위성도 부족한 판에 자칫 ‘반역’으로 몰릴 수 있는 짓을 하면 어쩌란…….

“설마…….”

내쉬는 머리를 스치는 좋지 못한 생각에 얼굴을 굳혔다. 머리를 조아린 길롯 백작에게 그의 의심을 따져 묻고 싶었지만, 이곳엔 그들만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지금 급한 건 따로 있지 않나. 내쉬는 끓는 속을 가만가만 다스렸다. 일단은 레이디부터다. 레이얼의 기사가 ‘레이디’에게 검상을 입혔다는 소식은 온 제국에 다 퍼졌다. 만약에라도 레이얼이 레이디를 잡게 되면 정말 곤란해진다. 그러니 그는 오늘 밤 반드시 레이디를 잡아야 했다. 바로, 길롯. 그의 본거지라 불리는 이곳에서 말이다. 길롯 백작저이기에 레이얼이 기사를 보낼 수 없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사병은 차후 해결하기로 하고, 내쉬는 다시 온 신경을 쏟아 경계조를 살폈다.

“물건은?”

“금고에 넣어놨습니다.”

“꺼내 와.”

“예에?”

원래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 것임을 아는데도 번번이 제 주제도 모르고 반문하는 길롯은 짜증난다.

“가져와.”

“하지만, 내쉬 황자님. 금고에서 꺼내면 위험합니다.”

“금고에 넣어놨다가 빼앗긴 귀족들을 읊어야 하나? 아니면 그보다 안전했던 내 손을 모르는 건가.”

오랑그리 후작의 일화를 들먹이는 말엔 더는 버틸 수 없었던 듯 길롯 백작이 금고에서 보석함을 꺼내왔다. 호화로운 보석함 안에 든 것은 종이. 바로 황실에서 내린 금 광산 소유 증서였다. 황가, 직계에만 내리는 금 광산을 길롯에게 내렸으니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그 어떤 보석보다도 충분했다. 레이디가 ‘내쉬’ 황자를 납치하진 않을 테니 가져가는 건 아마 이것이 되지 않을까? 내쉬는 호화로운 상자 안에 든 얄팍한 종이를 착착 접어 쥐곤 부채처럼 가볍게 흔들었다. 살랑거리는 손놀림을 따라 시린 바람이 분다.

“반지가 아니라서 아쉽군?”

“……잘 부탁드립니다. 황자 전하.”

간절한 길롯 백작의 당부에 내쉬는 살짝 웃어 보였다. 달이 정수리께까지 돋았다. 곧, 레이디가 예고한 시간이었다. * * * 깊은 밤, 잠 못 이루는 건 격전을 치르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 밤 초조함에 애를 태우는 건 레이얼 쪽이 더 했다. 용병단에 기사까지, 길롯이 불러들인 인원을 뻔히 아는 레이얼은 초조함에 머리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얌전히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내쉬가 ‘길롯’가를 도우러 나서겠다고 말한 것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그의 기사였다. 레이디가 가져다준 자금으로 아낌없이 기사를 가르치고 무장시킨 덕에 그의 기사는 날로 실력이 늘었다. 덕분에 저번에 클로이가 궁지에 몰리지 않았나. 기사만 놓고 따진다면야, 차라리 내쉬가 나서준 게 다행이었다.

“적당히 하고 오라니까.”

훌쩍 기운 달을 보자, 기껏 다독여둔 속이 바글바글 끓어버린다. 무사귀환이 가장 큰 승리라고 보내기 전 수없이 다짐받았건만 늦도록 돌아와 주지 않는 클로이가 야속하기만 하다.

“하아…….”

이 밤 숱하게 토해낸 한숨이 또 한 번 길게 늘어진다.  

“예고한 날이 되어 찾아왔소, 길롯 백작!”

내쉬는 기다리던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었다. 맞은편 지붕 위에 선 ‘레이디’는 달빛을 두르고 홀로 고고히 빛나고 있었다. 가진 건 어둑한 옷 한 벌 뿐인데, 잔뜩 치장한 길롯 백작보다 그 자태가 몹시 위풍당당해 헛웃음이 터진다.

“늦었군?”

“오랜만이오. 내쉬 황자.”

“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이를 싫어해. 레이디 왜 평소보다 늦었지?”

“내 약속은 그대를 만나는 게 아니었을 텐데?”

“길롯이 내 휘하에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나?”

“어린 조카 밑에 있다고? 이런 이런. 그런 걸 이렇게 밝혀도 괜찮은 건가? 동의한 일이오. 백작?”

레이디는 내쉬에게 대답하는 대신 그의 뒤에 선 길롯 백작을 불렀다.

“이게 눈치로 아는 것과 말로 공표하는 건 다른 문제인데. 괜찮소. 백작?”

“그게 무슨……!”

내쉬는 한쪽 손을 들어 길롯 백작의 말을 막았다.

“조용히 하라. 백작.”

머저리, 머저리. 저것을 데리고 산 모후가 정말이지 대단하다. 뻔한 도발이었다. 연장자인 길롯의 속을 긁어 ‘애송이 밑에서 부림 당하는 게 좋으냐?’라는 다소 원색적이고 1차원적인 도발. 지금 길롯 백작은 그 뻔한 노림수에 넘어갈 뻔한 것이다.

“하아…….”

짜증 나. 입안으로 욕설을 굴려 삼킨 내쉬가 한발 앞으로 나서 창틀을 짚었다. 지붕 위에 선 레이디를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도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은 채도 높은 새파란 눈동자가 무척 인상적……. 불현듯 익숙한 감각에 내쉬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모후와 똑같이 채도 높고 선명한 벽안 때문일까, 방금 굉장히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투항하는 건 어떤가?”

“거절하지.”

“네 목표물은 내가 쥐고 있고, 여긴…….”

말끝을 흐리며 내쉬가 들고 있던 광산 증서를 까딱, 흔들자 그의 뒤에서 수십 개의 살벌한 빛무리가 일었다. 찌이이익. 힘껏 당겨진 활시위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같이 위태로운 소리를 낸다. 내쉬는 턱을 까딱이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할 거지, 레이디?”

달아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는 상황. 내쉬가 자신할 만했다.

“오늘도 달아나면 연이은 패배로 기억되겠군?”

“무례한 짓에 흥이 식어 돌아간 적이 있지.”

낭랑한 목소리가 밤바람과 함께 그에게 날아왔다. 거리가 꽤 있어 목청을 꽤 돋웠음에도 레이디의 목소리는 발음이 분명하고 발성이 깨끗해 새되지 않았다. 울림이 좋은 편이라 오히려 귀를 기울이게 한다.

“하지만, 두 번은 핑계가 되고 말겠지.”

“글쎄? 왜 내가 또 네게 빼앗겼을 거라 생각하는 거지?”

“…….”

약 올리듯 부채질하던 내쉬의 손이 딱 멎었다. 과거형의 질문이 귀에 거슬린다. 팔랑팔랑, 조금 전보다 손목에 힘이 들어가 부채질할 적마다 종이가 꺾이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백작. 그럼 귀공의 선물을 받아 가도 되겠소?”

그의 불쾌함에 쐐기를 박는듯한 질문. 광산 증서는 지금, 내가, 바로 이 손에 쥐고 있는데. 어째서, 이 증서를 펴보고 싶은 걸까. 함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레이디의 말이 거슬려 참을 수가 없다.

“와라.”

재주를 높이 사, 장단을 맞춰주는 건 여기까지다. 내쉬는 레이디가 제 속을 헤집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래라면 생포해서 전리품처럼 끌고 가고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굳이 사지가 멀쩡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내쉬는 손을 흔들며 꿈쩍 않고 서 있는 레이디를 홀리듯 달게 웃었다.

“이리 와서 가져가야지.”

뺨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에, 자꾸 표정이 굳어간다. 그리고 얼굴이 딱딱하게 얼어버렸다고 인정하던 순간, 레이디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가 서 있는 이곳에서도 하얀 이가 보일 만큼 크게.

“백작.”

하지 마.

“그리고 전하.”

하지 마. 증서를 쥔 손에 핏대가 새파랗게 돋았다.

“선물은 고맙게 받아 가오.”

내내 가만히 서 있던 레이디의 손에서 종이가 한 장 펴졌다. 멀리서도 확실히 구분되는 황금빛 인장이 달빛 아래 선명하다.

“어떻게?”

얼빠진 길롯 백작의 목소리와 승리를 거머쥔 레이디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내쉬의 인내심을 북, 긁어버렸다. 그 순간 내쉬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

“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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