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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 등골을 훑는 짜릿함 (75/121)

075. 등골을 훑는 짜릿함2021.05.21.

황궁으로 은밀히 넘어든 그림자를 보았다는 소식이 빠르게 돌았다. 경계를 서던 기사가 건네는 주의에 캐서린 황후의 전담 시녀가 바르르 떨었다.

“어머나, 무서워라. 혹시 레이디가 온 건 아닐까요?”

“곧, 수색조가 확인할 예정이니 너무 걱정 마세요.”

“네, 기사님 잘 부탁드려요. 황후궁은 특별히 더 신경 써주세요. 가뜩이나 두 분 폐하께서 계시니 여러모로 염려되네요.”

“물론입니다. 시녀님.”

절도 있는 인사와 함께 기사가 물러나고, 시녀는 다시 황후의 침실 앞에 놓인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한참 전부터 방 안은 조용했다. 아마 오늘 밤은 황후도 피곤에 지쳐 잠이 든 모양이었다. 잘됐지. 시녀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는 캐서린 황후를 떠올리곤, 혹시라도 잠든 그녀를 깨우기라도 할 새라 조심히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밤은 길고 기다림은 지루해 밤 시중에 당첨된 기간엔 다들 이렇게 책을 끼고 사는 편이었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눈이 쓰라렸으나, 시녀는 애써 머리를 털어내며 글자에 정신을 집중했다. 이내, 책에 푹 빠진 그녀는 경계를 서는 기사들이 앞을 지나다녀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 * *

“……이런, 몰골이 말이 아니군요.”

황후의 말에 부복한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 초라한 꼴을 감추려는 듯 슬쩍 고개를 더 숙였을 뿐이었다. 옅은 불빛이긴 하나 검게 멍이 든 눈두덩이며 찢어진 귓불, 어긋나 비틀린 어깨는 고스란히 시야에 잡힌다. 남자가 바닥에 고개를 떨군 사이, 캐서린은 꼼꼼하게 그를 훑었다. 아르네에 잠입해 간신히 탈출했다는 말은 거짓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중 세작이라고 하기에 그의 꼴은 너무 참혹했다.

“오른손잡이였던가요?”

“……아직 왼팔은 무사합니다.”

“무리하지 말아요.”

“폐하! 저는, 저는 아직-.”

내내 고개를 떨구고 있던 남자가 몹시 격앙된 목소리로 낮게 부르짖었다. 무릎 걸음으로 캐서린의 발치에 다가와 그녀의 발치에 이마를 가져다 붙인 그는 숨을 헐떡였다.

“제발, 제발 기회를 주십시오. 형의 복수를, 헤논가의 의지를 다시 한번 보여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경. 난 무능력한 자를 싫어해요.”

“폐하, 제발.”

“하지만…….”

캐서린은 제가 말을 멈추자 남자도 숨을 멈춘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짙은 만족감이 밴 미소를 지은 그녀가 조금 전보다 나긋하고, 한층 더 엄혹해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경에겐 한 번쯤 더 기회를 주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 팔 언제 수습되나요?”

“지금, 지금입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남자는 그대로 제 어깨를 비틀어 사정없이 바닥에 찍었다. 뻑,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탈골되었던 어깨가 우악스러운 방법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극악한 고통에 온몸이 소나기라도 맞은 듯 푹 젖어서도 남자는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캐서린은 다리를 들어 반듯하게 펴진 남자의 어깨를 뾰족한 슬리퍼 끝으로 툭 찼다.

“좋아요. 경. 그대의 의지는 잘 보았어요.”

입을 한번 달싹일 적마다, 캐서린은 남자의 어깨를 건드렸다. 하지만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식은땀이 눈물처럼 뚝뚝, 떨어질 뿐이었다.

“황궁 근위대 소속이었던가요?”

“예, 폐하.”

“일단, 복귀해서 회복하세요. 우리 내쉬에게는 경처럼 우직한 기사도 한둘 있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폐하,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나가요.”

캐서린의 축객령에 남자는 머리를 깊게 숙여 감사를 표하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훌쩍 사라졌다. 이내 침실은 고요해졌다. 아르네 가에서 도망쳐나왔다는 건 거짓말이 아는 듯 성치 않은 몸을 해서도 꽤 몸놀림이 날렵했다. 기사는 소중한 인재다. 심지어 아르네에 악심을 품고 있으니 두고두고 훌륭한 쓰임이 될 거라는 계산에, 캐서린의 얼굴이 오래간만에 활짝 피어났다. 남자를 맞이하느라 잠깐 소파에 앉았던 캐서린이 침대로 갈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또각. 굽 낮은 슬리퍼 소리에 캐서린은 신고 있던 슬리퍼를 그대로 차버렸다. 어쩐지 찝찝하다 했더니, 슬리퍼로 남자를 건드렸던 걸 깜빡했다. 맨발로 사뿐사뿐 걸어 침대 맡으로 간, 캐서린이 잠든 황제의 뺨을 쓸었다.

“폐하, 힘드세요?”

캐서린은 기분 좋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날 밤, 에반은 작은 새를 손님으로 맞았다. 새가 물어온 소식을 받는 그의 표정이 너무 환했기에, 로지는 전에 없이 궁금해졌다.

“무슨 소식인데요?”

“아아. 집에 잘 돌아갔다는군요.”

알쏭달쏭한 에반의 말에 로지는 얼마전 ‘도망친’ 헤논가의 둘째를 떠올렸다.

“세작은 안 심는다면서요.”

“아르네의 세작이 아니지요.”

“그럼요?”

“황후의 배신자이지요.”

교묘한 말장난이었으나, 로지는 그를 지적하지 않았다. 오늘은 좋은 날이었으니 한껏 너그럽게 굴 작정이었다.

“뭐…… 어쨌거나 검사의 오른팔을 박살 내놓았으니, 아르네를 배신한다 한들 큰 손해는 아니네요.”

어깨를 으쓱이는 로지의 말에 다 읽은 종이를 그대로 벽난로에 던져 넣은 에반이 웃었다.

“로지양.”

“네?”

“모르셨습니까? 그는 양손잡이입니다.”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빛을 받은 그의 모노클이 순간 번뜩였던 것도 같았다. * * *

“아아아……. 녹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야.”

“한 잔 더?”

진정하라는 의미로 레이얼은 급히 냉차를 우려내 주었다. 제대로 된 냉차를 만들려면 몇 시간쯤 우려내야 하지만, 급하니 찻잎을 왕창 넣어 뜨거운 물에 짧게 우린 후 찬물로 희석시킨 난폭한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당연히 풍미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클로이는 그가 건넨 냉차가 다시 없을 명차라도 된 듯 한 모금 한 모금을 아주 달게 마셨다. 벌써 한 주전자를 너끈히 들이켰건만, 찬물로 배를 꽉 채우고도 클로이의 발그레한 뺨은 도통 식지를 않았다.

“이 기쁨을 전하가 알까.”

“다는 모르겠지만, 그대 표정을 보니 알 것도 같고.”

“제발 알아주면 좋을 텐데 아쉽게.”

“앞으로 차차 알아가게 되겠지.”

“그런가?”

“기쁨을 잘 아는 그대가 내게 알려주면 되지 않겠어?”

“그럴까?”

클로이는 그의 말에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 그럼 안아줘.”

너무 당당하고 갑작스러웠으나, 클로이는 오늘 그 어떤 일도 사랑스러워 보였기에 레이얼의 품에 곧장 안겨주었다.

“안아줘.”

“오늘 내가 안아주면 전하를 으스러뜨릴지도 몰라. 이걸로 참지 그래?”

레이얼은 그의 품 안에서 종알거리는 클로이의 목소리에 웃음을 터트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버지’가 눈을 뜬 게 이렇게나 기쁠까. 알 것도 같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하나도 모르겠다. 레이얼은 키릭슨의 성황에 황제에게 실베르카 꿀까지 떠먹였으나, 그건 클로이가 아르네 공작에게 가지는 애정과는 결이 달랐다. 그는 이제 제대로 된 지지세력을 얻어가고 있다. 평생을 숨죽이고, 궁지에 몰려있던 그가 제대로 된 우군을 얻어 황제가 싫어하는 ‘위협적인’모습의 황태자가 될 거란 말이다. 그런데, 그걸 못 볼 수도 있다고? 레이얼은 황제를 만나온 첫날 느꼈던 기묘했던 기분을 기어이 알아냈다. 자신을 내내 옭아매고 목줄 맨 짐승처럼 취급하던 이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서 허탈해서가 아니었다. 이제야말로 제대로 굴복시킬 수 있었는데 그 기회가 날아갈까 봐 느끼는 허탈함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맥없이 스러질 수가 있나? 원망에 원망이 더해지며 눌러둔 분노가 치밀었다. 세간에서 생각하는 대로 그가 미련할 만큼 좋은 사람이라 ‘부친’에 대한 걱정에 예민해진 건 절대 아니었다. 소문은 키릭슨이 내주었고, 자신은 그저 고요히 분노할 뿐인 이때. 클로이의 이 웃음은 정말이지 낯설면서도 지독히 어여뻐 맹렬한 호기심이 든다.

“그렇게 기뻐?”

“응.”

단 1초의 머뭇거림도 없는 즉답.

“그게 어떤 느낌일까.”

“가슴에 깃털이 가득 차서 마구마구 부풀어 오르는 것 같은 기분?”

“저런……?”

“간질간질하고 웃음나고 또, 또.”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자꾸 생각나?”

“맞아! 그거지!”

“이거.”

고개를 젖힌 클로이가 반갑게 속삭였다. 레이얼은 그대로 고개를 떨구어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예상치 못한 달큼한 접촉에 몸을 굳히던 것도 잠시였다.

“맞아?”

지척에서 빛나는 레이얼의 눈빛을 본 클로이는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았다.

“맞아.”

목덜미에 감긴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더니 그대로, 그를 끌어내렸다. 가볍게 시작된 입맞춤이 웃음소리와 함께 길고 길게 이어졌다.

“이거야.”

내내 맞붙어있던 입술이 떨어지며 터진 소리에 이어 쪽, 하는 소리가 울렸다. 기쁨이 번지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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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지 않아 공작저 타운하우스로 돌아온 클로이는 씻고 옷을 갈아입고 공작의 침실로 향했다. 실컷 자랑까지 하고 온 참인데, 문득 자려고 누웠더니 갑자기 불안했다. 혹시 꿈은 아닌지 뭔가 착각한 건 아닌지 확인해야 했다. 발끝을 세워 소리 없이 복도를 가로질러 공작실의 침실을 찾은 클로이를 반긴 건 날이 바짝 선 검이었다. 날아드는 검을 허리를 확 젖혀 피한 클로이는 놀란 기색이라곤 없었다.

“아가씨?”

“오, 미안. 생각 못 했어.”

“무슨 일이세요?”

“응. 그냥 잠깐 뵙고 갈까 해서.”

“안 믿겨서?”

이유를 알법하다는 듯 에반이 검을 회수하며 빙긋 웃었다.

“아버진?”

“그 뒤로 계속 주무세요. 오늘까진 지켜보고 내일 아침엔 깨워서 식사를 권해볼까 하고요.”

“주……무시는 거지?”

“그럼요.”

에반은 한쪽으로 비켜나며 클로이가 들어올 수 있게 길을 틔워주었다. 숄만 걸친 허술한 차림새에 잠깐 미간을 찌푸리긴 했으나, 정말 찰나였다. 이 시간에 갑자기 들이닥친 마음을 알기에 에반은 잔소리는 묻어두기로 했다.

“이왕 오신 거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아, 그럴까?”

“오랜만에 블랙잉그리드?”

“……그럴까?”

잠깐 망설이긴 했지만, 클로이는 예고한 날이 꽤 남았음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툼한 카펫을 딛는 클로이에게선 그 어떤 소음도 나지 않았다. 숄을 추스르거나, 걷는 동작을 따라 잠옷끼리 비벼지며 나는 희미한 소음이 일법도 한데 클로이는 모든 소리를 완벽하게 지우고 있었다. 찻잔을 꺼내고 찻잎을 덜던 에반이 입을 뗀 건 그때였다.

“작년보다 훨씬 기량이 느셨네요.”

“응?”

“기척을 지우는 게 능숙해지셨어요.”

“아아, 그래?

에반은 짧게 웃으며 찻주전자에 데운 물을 가득 채웠다.

“저도 아가씨의 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거든요. 로지랑 한동안 대련하신 덕분인가요?”

“에이, 뭐 그렇게까지. 아빠 주무신다니 그저 발끝을 세운 정도에.”

“매일 밤 찾아오는 녀석들보다 나은걸요.”

로지와의 대련으로 이런 게 늘었을 리가 있나. 하루가 멀다고 남의 집을 털어대고 황궁 담을 넘나들다 보니 도둑다워진 거다. 어쩐지 계면쩍어 소리 없이 웃는 클로이의 등 뒤로,

“하지만 곧, 영지로 돌아가야 하는 건 알고 계시죠?”

다분한 경고조의 소리에 사뿐거리던 클로이의 걸음이 딱,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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