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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 공작이 깨어났다 (74/121)

074. 공작이 깨어났다2021.05.18.

어려도 아르네라는 건가. 팽팽하던 기 싸움은 그저, 딱 한 번의 아주 작은 흔들림으로 승패가 갈렸다. 움찔. 공녀의 일갈에 제때 입을 떼지 못한 그들은 회의가 끝나도록 입을 다물어야 했다. 모든 것은 공녀가 계획한 대로 흘러갔다. 애초에 공녀의 계획엔 그들의 결정은 아무 필요가 없었다. 가신들은 공녀가 나누어준 서류를 받아들고 쫓겨나듯 회의장을 벗어났다. 여태의 방식과는 달리, 공녀가 제안한 것은 딱히 사람이 전면으로 나서지 않는 것이었다. 대신 밑 작업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간다.

“덫이라니, 잘 될까요?”

“하지만 아르네 공작님도 계시지 않는 지금 그나마 제일 나아 보이는 방법이 아닌가. 아니면 자네가 선봉에 설 텐가?”

니칸 백작이 제 뒤를 따르며 불만 어린 목소리를 내는 부관을 엄하게 꾸짖었다.

“돌격대건, 유인조이건 간에 반쯤의 몰살은 각오한 바가 아니었나. 유인만 잘된다면, 올해도 무사히 잘 넘길 수 있을 거다. 잘하면 앞으로도.”

공작님과 소공작님의 비보에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오늘 만난 공녀는 다소 마르긴 했으나 사람들 앞에서 픽 픽 쓰러질 만큼 연약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야물게 빛나는 푸른 눈이 강단 있어 보였지.

“예예, 말처럼만 된다면야 정말 획기적인 방법이 되겠지요.”

“그렇게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일이니, 자네 빨리 짐을 챙기게.”

괜히 툴툴거렸다가 본전도 못찾은 부관이 부어터진 표정을 해선, 묵례를 올리곤 뛰었다. 공녀가 지시한 것은 거대한 덫으로, 총 3단계의 저지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괴수를 유인해 떨어뜨려 가두는 것이 1차. 바닥에 독을 바른 창을 박아 중독시키는 것이 2차. 그리고 민가로 향하는 길목마다 덫을 설치해 괴수가 ‘회피’하도록 하는 것이 3차였다. 짐승은 제 안위에 놀랍도록 민감했다. 몇 번쯤 떨어져 죽고, 호된 맛을 보게 되면 민가로 내려가는 것을 꺼리게 될 테다. ‘잘’된다면. 집채만 한 괴수를 빠뜨릴 덫이니 땅이 얼기 전에 파야 하고, 바닥에 창을 박아야 하니 나무를 베어야 한다. 그뿐인가 창에 바를 독을 구하러 겨울잠에 들어간 뱀이며 전갈 따위를 죄 찾아내야 하니 그것도 만만찮다. 이 모든 것이 눈이 오기 전에 모두 끝나야 한다. 덫이 통하지 않으면 ‘아르네’ 공작 없이 이전처럼 괴수와 맞대면하는 수밖에 없다. 아르네 공녀는 ‘후계자의 보호’를 받는터라 결국 죽어나가는 것은 자신들. 니칸은 문득 걸음을 멈추곤 뒤돌아 2층 창문에 비치는 공녀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귀족영애처럼 치장을 하지도 않고, 드레스를 입지도 않았다. 아르네 공작을 쏙 빼닮은 미인은 그저 머리를 늘어뜨린 정도만으로도 사람의 시선을 훌쩍 앗는다. 그러나 저 예쁘장한 얼굴에 정신을 놓으면 곤란하다. 언성 한번 높이지 않고, 생긋 웃는 얼굴로 오늘 아르네에서 잔뼈 굵은 가신들을 죄다 털어버리지 않았나. 니칸은 아르네 공녀와 눈이 마주치자 허리를 굽혀 인사를 보내주었다. 고개만 까딱하여 인사를 받는 공녀의 모습은 지극히 도도하고도 자연스러웠다. 머리가 허옇게 센 자신의 인사를 당연히 받는 저 태도, 저 당당함 마음에 든다. 북부로 돌아가는 니칸은 웃는 얼굴이었다.   * * *

“어우 노려보는 거 봐라.”

“아, 니칸 백작님.”

“기백이 장난 아니지?”

“아르네 공작님과 선봉에 서는 분이세요.”

등 뒤에 선 로지가 재빠르게 니칸 백작의 정보를 읊어주었기에, 클로이는 저를 쏘아보는 형형한 안광에도 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선봉대라더니, 과연 보통이 아니었다. 그저 쏘아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누가 질 줄 알고! 아빠가 그리워도, 지금 아르네 공작 대리는 나다! 클로이는 오늘 회의장에서 있었던 일을 잊지 않았다. 본래도 후계자 자리는 관심 없었기에 그녀는 가신들과 이렇다 할 접점도 세력도 없었다. 덕분에 오늘 혹독하게 신고식을 치른 것이다.

“생각하니 괘씸해. 아빠에겐 절대 그러지 못할 것들이.”

“아무에게나 복종하면 그건 제대로 된 충성이 아니죠. 가신들은 아르네 공작님께 충성맹세를 한 것을요. 아가씨는 아니에요.”

“……로지, 가끔 얄미운 거 알지.”

“그리고 대체로 믿음직스럽지요?”

로지는 정말로, 언제나 단 한마디도 져주는 법이 없었다. 정말 일관되게. 그래서 그녀의 말처럼 정말 믿음직스럽다. 클로이는 니칸 백작이 인사와 함께 시야에서 벗어나자 내내 힘주고 있던 어깨를 늘어뜨렸다.

“잘될까?”

“잘 안 되면 남은 건 몰살밖에 없어서요. 뭐 그렇게 딱히 걱정할 건 없어요.”

“…….”

“공작님이 안 계시면 다 똑같다는 뜻이에요. 아시죠?”

위로가 너무 강렬해서 버거웠다. 클로이는 처음으로 아르네 공작을 흔들어 깨워 볼까 하는 충동을 느꼈다.  

  충동이 충동으로 끝나면 클로이가 아니었다. 생각난 김에 클로이는 공작의 침실을 찾았다. 회의를 주관하느라 분주해 오늘 아침엔 인사도 못 했다. 뭐, 말하자면 겸사겸사라는 뜻이다.

“아빠.”

클로이가 이불속에 손을 넣어 아르네 공작의 손을 맞잡았다. 길고 마디가 분명한 손은 보기엔 좋은데 굳은살이 두껍게 박여 여간 거친 게 아니다. 클로이는 제 손아귀에 든 손을 괜히 주물럭거리며 입을 뗐다.

“아빠, 오늘 토벌전 이야기를 좀 했어요. 다들 걱정은 좀 했지만, 잘될 거 같아요. 아니 근데 우리 아빠 손이 왜 이렇게 부었어?”

“계속 누워만 계시니까 부종이 생기는 것 같더라고요.”

그새 차를 준비해온 듯 향긋한 향과 함께 에반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 그렇구나.”

에반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클로이는 얼른 손에서 팔뚝으로 손을 옮겨 힘껏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손끝에 닿는 아르네 공작의 팔뚝이 기억보다 말랑해진 것도 같았다. 실상 지금도 다른 사람보다야 단단한 편이긴 했으나, 워낙에 몸을 단련하던 그였기에 부은 정도로도 그 차이가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 마세요. 오전에 이미 한차례 주물러 드렸거든요.”

“아아. 그래그래.”

너무 과해도 독이 되리라. 클로이는 에반의 말에 냉큼 손을 무르곤 아까처럼 공작의 손을 잡았다.

“회의가 잘 되셨다고요?”

“응 뭐. 그냥 내 마음대로 했지 뭐.”

“잘하셨습니다. 공작님을 아주 쏙 빼닮으셨네요.”

뭐? 흘려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당황해하는 기색을 뻔히 읽었을 텐데, 에반은 빙긋 웃는 그대로 다시 한번 상냥하게 알려주었다.

“공작님은 늘 그러세요. 안건이 나오면 그래서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지? 라고 묻고는 결국 전부 마음대로 결정해버리시거든요.”

그거, 좋은 이야기 같지 않은데? 그러나 클로이는 지적하는 대신 에반을 따라 애매하게 웃었다. 종종 저 선량한 얼굴과 상냥한 말투에 착각하게 된다. 에반은 원래 정상이 아니었고, 그의 세상은 ‘아르네 공작’을 위주로 돌아간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도…….

“너무 그렇게 대견해하는 눈빛은 부담돼.”

“그렇습니까? 전 그만, 아가씨가 너무 자랑스러워서.”

그만해 미친놈 같아.

“아무튼 아빠가 일어나주시면 제일 좋은데……. 그럴 수 없으니까 최대한 기사들을 아끼, 응?”

말을 하다 말고 클로이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경악한 듯 크게 벌어진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공작의 손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이었다.

“아가씨?”

“방금, 방금 아빠 손이 움직인 것 같았는데?”

“저도 가끔 공작님 손을 닦아드릴 때면 그런 기분이 들곤 한답니다. 보통 팔뚝 이 지점을 압박하면-.”

“지금!”

팔뚝 가운데 한 부분을 가리키는 에반을 향해 클로이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지금 또!”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클로이는 공작의 손을 봐달라며 에반을 잡아끌었다.

“빨리 잡아봐! 빨리!”

“예.예. 그럴게요.”

‘착각’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으나 상냥한 집사는 제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선선히 무릎을 꿇고 공작의 손을 조심스럽게 살펴주었다.

“아가씨, 아무래도…… 공작님?”

에반의 말이 뚝 끊겼다.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움찔거리는 공작의 손가락에 에반은 눈을 크게 뜨고 굳어버렸다.

“그치? 맞지? 아빠!”

움직임을 확인한 클로이는 횡설수설하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아빠!! 아빠, 정신 드세요? 아빠? 아빠! 클로이 좀 봐주세요. 아빠!”

“공작님!”

잠깐사이 울음이 잔뜩 물린 목소리로 공작을 부르는 클로이의 뒤에서 에반이 나직이 공작을 불렀다.

“주인님!”

“아빠. 아빠! 정신 들어요? 응? 힘내서 눈도 떠주세요. 응?”

클로이는 공작의 손을 붙들어 제 뺨에 대고 비비며 애원했다.

“아빠, 클로이 좀 봐주세요. 보고 싶어요.”

공작의 손은 이내 흠뻑 젖었으나, 아무도 그건 신경 쓰지 못했다. 황금빛 기다란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더니 실금처럼 공작의 눈꺼풀이 들렸던 것이다!

“아빠!!”

자지러지는 클로이의 목소리가 공작저를 아름답게 울렸다.

“아빠!!”

이내 부르짖음은 울음이 되었고.

“아가.”

숨소리보다 희미하고 지독히 낮은 목소리에 클로이는 더는 소리 내 부르지도 못했다. 그저 신음을 삼키며 오열했을 뿐이었다. 계절이 바뀐 후에야 다시 만나게 된 부녀의 해후는 생각보다 훨씬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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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은 이내 다시 기진해 깊게 잠들었다. 그러나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공작이 깨어났다! 소식은 빠르고 은밀하게 아르네 타운하우스로 번져나갔다. 클로이는 펑펑 울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로지의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세상에, 이건 어느 나라 양심일까요? 공작님이 깨어나실 땐 에반님하고 두 분에서만 즐기시고, 시중은 저한테 받으시다뇨?”

“로지, 아빠가 일어났어.”

“아니 그럼 어디 평생 누워계실 줄 아셨어요? 상처도 이제 거의 다 나았는데 눈뜰 때도 되었죠. 우리 공작님 너무 오래 누워계셔서 허리 안 아프시려나 몰라.”

로지는 툴툴거리면서도 내내 웃고 있었다.

“로지, 아빠가 일어났어.”

“예예, 아주 감격스러우시겠습니다.”

“아빠가 일어났어.”

“그렇다고 해서, 당장 내뺄 생각은 마세요. 공작님은 외상도 외상이지만 장기 손상도 꽤 심각해서 당장 거동 하시는 건 독이에요.”

“당연하지, 나도 그 정돈 알아. 아 참! 해졌어?”

“……해진지가 언젠데요.”

“나 가봐야 해.”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클로이는 대번에 로지에게 어깨가 붙잡혔다.

“공작님 깨어나셨어요. 잊으셨어요?”

“알아. 그러니 이 기쁜 소식을 나눠야 하지 않겠어?”

어차피, 곧 수도도 떠나야 하는데. 뒷말은 꿀떡 삼켰다. 어렵지 않게 로지를 떨궈낸 클로이는 날다시피 황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레이얼을 보자마자 입을 틀어막고 외쳤다.

“아빠가 일어났어! 눈떴다고!”

기쁨의 표시로 다리를 마구 동동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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