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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 코르셋 속에 감춰진 질척한 것 (47/121)

047. 코르셋 속에 감춰진 질척한 것2021.02.12.

“어머나. 레이얼.”

난처한 표정으로 웃는 캐서린 황후의 얼굴이 기뻐하는 독사처럼 보인다. 쉬잇. 먹잇감을 덮치기 직전 꼬리를 흔들어 공격을 예고하는 뱀처럼 그녀가 부채를 살살 흔들었다.

“정말이지…….”

묘한데서 숨을 끊어 쉬는 건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한 고전적인 수법이다. 클로이는 승리감에 도취해 독니를 내보이듯 천천히 입을 떼는 황후를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아르네 공녀도 그렇게 생각했나요?”

“그럼요 폐하.”

레이얼의 손끝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으나 클로이는 그 손을 조금 더 꽉, 잡아주었다.

“누가 보면, 두 분 전하께서 옷을 맞추신 줄 알겠습니다.”

“그러게요. 누가 이렇게 고약한…….”

“감히.”

목청을 높여 황후의 말을 자른 클로이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캐서린을 향해 다시 나긋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누가, 감히 두 분 전하를 두고 그런 망측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만약 그런 이가 있다면 황족 모욕으로 엄히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폐하.”

황후가 꺼내려던 이야기를 ‘황족모독’이라는 말로 입을 막은 클로이는 그대로 크게 걸음을 떼었다. 치맛단이 출렁일 만큼 큰 보폭에, 입고 있던 푸른빛 드레스 치맛단이 반으로 갈라지며 속에 숨겨진 황금빛 안감이 화려하게 피어난다. 그 모습이, 레이얼이 입은 프록코트의 황금빛 장식과 하나인 듯 어울리며 한층 화사해진다.

“단지, 비슷해 보인 것을요.”

이젠 더 이상, 내쉬의 프록코트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르네 공녀와 레이얼 시오도르의 옷은 푸른색이 아닌 완벽한 황금색으로 맞춘 것이었다. 금빛 장미가 만개한 듯 퍼지는 드레스 자락이 걸음을 멈추자 다시 다소곳하게 내려앉으며 푸른 윗단 아래로 숨는다.

“와…….”

누구에서인지 모를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귀여운 발상을 덧댄 드레스였다. 여러갈래로 틔어놓은 묵직한 윗단으로 눌러두었다가, 큰 움직임에 벌어지는 사이로 ‘진짜’ 드레스가 부풀어 오른다. 자칫 유치할 수 있는 디자인인데, 아르네 공녀는 그것을 우아하게 소화해냈다. 분위기는 이미 그녀 쪽으로 기울었다. 이것을 황후가 뒤집을 수 있을 리 없다.

“아, 이런 아쉬워라.”

저번에 이어 이번에도 황후가 공녀에게 밀리는 모양새에, 귀족들이 마른침만 삼키며 눈치를 보는 새로 나긋한 목소리가 울렸다. 굳은 표정의 황후 옆으로 나선 건 내쉬 황자였다.

“빌미 삼아 춤 신청을 해보려고 했더니 멀리, 달아나시는군요.”

상당히 도발적이다. 버젓이 황태자의 피앙세인 자신을 향해 ‘달아난다’라는 단어를 가감 없이 내뱉는 내쉬를 보자 클로이는 머릿속이 차게 식었다. 그녀의 피앙세는, 그리고 그의 피앙세는 고작 황자따위에게 이런 소리를 면전에서 들을 만큼 하찮았다.

“아르네는 몰아본 적은 있어도, 달아나 본 적은 없답니다. 정 아쉬우시다면, 첫 춤 이후 청해주시겠습니까? 그때라면 레이얼 황태자께서도 허락해주시지 않을까 하는데.”

클로이는 말을 흐리며 레이얼을 바라보았다. 입꼬리를 말아 올려 빙긋, 미소짓고 있는 그는 턱없이 아름다워 아주 잠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클로이가 정신을 차린 건, 레이얼이 클로이를 당겨 거의 옆구리에 그녀를 붙여놓다시피 하고 나서였다.

“그럴 리가요. 저도 ‘시오도르’인 걸요. 폐하를 닮아 독점욕이 있는 편이랍니다.”

“아…….”

“내쉬도 시오도르라면 이해할 겁니다.”

내내 말없이 곁을 지켜주던 남자가 내보인 첫 사교 발언이 생각보다 몹시 매끄럽고 날카롭다. 클로이는 그의 말에 작게 웃었다.

“이거, 미안하게 됐군요.”

‘시오도르’에게 사과를 건네는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몹시 유쾌하다.

  내쉬는 역시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화를 내는 대신 레이얼의 거절에 빙긋 미소를 짓더니, 황후에게 춤을 신청해 자리를 떴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레이얼의 거절에 그의 시선이 짙어졌다는 정도일까. 눅진하게 빛을 발하는 녹안이 수심을 가린 이끼처럼 꺼림칙하다.

“피곤하세요?”

잠깐 다른 생각에 빠진 것을 눈치챈 듯, 레이얼이 스텝이 꼬인 클로이를 가볍게 들어 올려주며 물었다. 시야가 조금 높아진다 싶더니 이내 빙 돌았다. 턴하는 동안 자세를 잡으라는 뜻이었다. 파트너를 리드하는 것이 제법 능수능란하다. 하지만, 클로이는 그가 허리를 잡아 올렸다는 것을 깨닫곤 퍽 곤란한 기분이 되었다. 상처가 터지진 않았을까. 괜히 걱정이 차올라서인지 갑자기 숨이 달리기 시작했다. 클로이는 그가 바닥에 자신을 내려주자 몸을 가볍게 겹치며 속삭였다.

“쉬고 싶어요.”

“그래요.”

갑작스러운 요구건만 레이얼의 표정은 흔들림도 없었다. 그의 춤도. 그는 스텝을 밟던 그대로 클로이를 연회장 가장자리로 이끌었다. 춤을 추는 이와 담소를 나누는 이들의 경계가 희미해진 그곳에 도착하자, 허리에 두른 팔이 떨어지며 자연스럽게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그와 함께 보조를 맞추던 클로이조차 놀라버릴 만큼 매끄러운 태도였다.

“굉장히 능숙하시네요.”

“그런가요.”

그는 태도만큼이나 매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였다. 할딱, 할딱. 꼭 전력 질주라도 한 듯 가쁜 숨소리가 바삐 터지기 시작했다. 아, 이런 거 좀 곤란한데. 꼭, 레이얼의 얼굴을 보고 흥분한 것처럼 보이잖아. 클로이는 필사적으로 숨을 고르려고 했으나, 레이얼이 클로이의 이상을 눈치채는 쪽이 빨랐다.

“테라스로 가시죠.”

그는 곧장 길을 터 그녀를 끌었다. 어찌나 서두르는지 제 발로 걷는 건지, 그가 끌고 가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들이 연회장을 빠져나와 테라스 커튼을 내리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십분 남짓이었다.

“걸음이 엄청, 빠-.”

“쉿.”

그는 의례적인 대화를 시도하는 클로이의 입을 막았다.

“호흡에 집중하세요. 레이디 아르네.”

“전 괜찮아요.”

“얼굴이 창백합니다. 의사를-.”

“아뇨아뇨. 이런 옷은 오랜만이라 그런가 봐요.”

심각하게 굳었던 레이얼의 표정이 잘록하게 죈 허리를 가리키는 클로이의 손짓에 다소나마 풀렸다. 쓰러졌다는 소문이 자자한 피앙세가 아니었던가. 혹시라도 몸이 좋지 않은 것인지 해서 단단히 걱정했던 차였다. 그런데 말을 듣고 보니 우습게도 안심된다. 레이얼도 ‘코르셋’ 정도는 알고 있었다. 비록 십 년쯤 사교계서 멀어졌다고는 하나, 복식이 깡그리 뒤집힐 만큼 오랜 시간은 아니었다. 매년, 매 계절 유행은 바뀌었다. 드레스 소매 폭이 좁았다가 부풀었다가, 겹겹이 레이스를 둘렀다가 어느 날엔 깃털을 꽂기도 했다. 하지만 가는 허리를 강조하는 형태만큼은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그의 첫 피앙세도 허리를 잔뜩 졸라매곤 종종 허덕이곤 했었다.

“헉…….”

잠깐, 상념에 빠진 사이 레이디 아르네의 얼굴은 한층 희게 질려 있었다. 조금 전까진 그래도 숨을 고르려고 노력을 하더니 이젠 대놓고 헐떡이며 버거워하기 시작했다.

“레이디 아르네?”

“금방, 괜, 괜찮아 질 거예요.”

손사래를 치려 한 모양인데, 허공을 휘젓는 손목이 마냥 위태롭게 흔들렸다.

“차가운 차라도 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좋, 은 생각이세요.”

말이 뚝뚝 끊어진다. 새하얗다 못해 푸르게 질린 얼굴을 보고 있자니, 뻔히 이유를 아는데도 의사를 불러오고 싶을 만큼 초조해진다. 레이얼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의사는 절대 안 될 소리였다. 의사를 불렀다간 반드시 꼬투리를 잡히고 만다. 이미 아르네 공녀는 아프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지 않나. 매정해 보일진 모르겠지만 아르네가 흔들리는 지금, 공녀가 힘을 내주어야 했다.

“잠시만 버티세요. 금방 오겠습니다.”

눈이 풀린 것 같은 공녀에게 당부를 건네긴 했으나, 그녀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는 알 방도가 없었다. 빨리…….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던 레이얼은 뒤에서 울리는 공녀의 말에 멈칫하고 말았다.

“차, 차…… 향이 나는 건 안 돼요.”

“……네?”

별것 아니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소린데, 이상하게 머리가 쭈뼛했다. 녹슨 고철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린 레이얼이 소파에 반쯤 기댄 공녀에게 다시 물었다.

“향이 나는 차는, 안 된다고요?”

“안 돼요. 향이 나면 안 돼.”

“어째서요?”

“그냥 물, 물 주세요.”

할딱할딱. 잇새로 터지는 숨이 몹시 가쁘고 얕다. 크게 벌어지는 동공을 보자 레이얼은 나가려던 생각을 접고 클로이의 옆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레이디 아르네.”

“물.”

목소리가 사그라드는 별빛보다 아스라했다.

“레이디 아르네?”

“…….”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녀의 눈이 감기더니 꼿꼿하던 허리가 허물어지듯 기울었다. 레이얼은 쓰러지는 공녀를 가볍게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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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을 가지러 갈 새도 없이 공녀는 기절해버렸다. 고개를 꺾은채 늘어진 공녀는 깜짝 놀랄 만큼 가벼웠다. 그러고 보니 드러난 목덜미며, 팔뚝이 한 줌도 안 될 만큼 가늘었다. 쯧. 레이얼은 바싹 마른 모습에 혀를 찼다. 매번 괜찮다고 우기던 그의 피앙세는 가까이서 보니 그 모습이 엉망이었다. 내리깔린 긴 속눈썹 아래 눈 밑은 푸르게 죽어있었고, 야무지고 단호해 보이던 눈매도 이제 보니 우묵하니 그늘이 짙게 깔려 있었다. 원래 모습을 모른다지만, 이건 누가 봐도 비정상적으로 마른 모습이었다.

“괜찮기는.”

허세 부리듯 매번 고집스럽게 하는 대답이 얼마나 위태로워 보이는지 본인만 모르지. 나직이 한숨을 내쉰 레이얼은 한 손으로 프록코트를 벗어 클로이를 감싸듯 덮었다. 기절한 피앙세를 깨우려면 아무래도 코르셋을 풀어주어야 할 모양이었다. 전속시녀를 불러올까도 생각했지만, 이곳은 황실이었다. 아르네의 몰락을 목 빼고 기다리는 적진의 한복판. 정신이 없는 그녀를 혼자 두었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용서하세요.”

눈을 질끈 감은 레이얼이 클로이의 등 뒤로 손을 뻗었다. 더듬거리며 촘촘한 단추를 풀자 가녀린 몸을 힘껏 죄고 있는 코르셋이 만져졌다. 어찌나 단단한지, 마치 갑각류의 외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상은 잠깐이었다. 레이디의 옷을 벗기는 게 이번이 처음인 레이얼은 코르셋을 어떻게 푸는지 알지 못했다. 진땀이 주르륵 흐르고 당혹감에 얼굴이 훅 달아올라 버렸다. 조급한 손끝에 매듭이 잡힌 건 그때였다. 레이얼은 그대로 매듭을 뜯듯이 풀어버렸다. 그러나 안심도 잠깐 코르셋 안에, 또 몸을 졸라맨 게 있었다.

“또……?”

설마, 두 겹인가? 당황한 레이얼이 마구 더듬었다. 드레스 옷감처럼 부드럽진 않으나 단단하고, 질척한……. 질척해? 손끝을 눅진히 적시는 감각에 놀라 빼든 손끝이 벌겋게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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