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이러시면, 오해하고 싶어져요2021.02.09.
“또, 아르네 가로 갔다고?”
내쉬는 황태자 궁으로 보냈던 시종장이 전하는 말에 미간을 험하게 구겼다.
“언제?”
“5시경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좀 느지막이 입장하겠다는 뜻이군?”
“보통 둘째 날부턴 다들 느긋하게들 오시니까요.”
“좋아.”
내내 인상을 구기고 있던 내쉬가 돌연 생긋 미소를 지었다. 찰나의 간극이 어마어마해 시종장이 움찔한 사이 내쉬가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출발이 늦을 테니 연회에 오기까진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겠어. 그렇지?”
“예? 예.”
“그럼, 가서 오늘 레이디 아르네가 무얼 입었는지 알아 와.”
“예?”
생각지도 못한 주문에 시종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번번이 말을 되묻는 이유가 뭐지? 귀가 제 쓸모를 다 하지 못해서인가, 아니면 내 말이 말 같지 않아서인가?”
목소리는 한없이 사근사근했으나, 시종장을 바라보는 녹안은 무섭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꿀꺽. 가엽게도 시종장은 마치 뱀 앞에 놓인 생쥐처럼 바들거릴 뿐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 그……그, 그것이.”
“한심하긴.”
한숨을 푹 쉰 내쉬가 들고 있던 펜으로 시종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이럴 땐,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뛰는 거야.”
“예예, 예.”
“얼른 다녀와. 네가 와야 나도 준비를 마칠 수 있을 테니까.”
“예?”
아르네 공녀와 옷을 맞추겠다는 내쉬의 말에 시종장의 얼굴은 한층 더 하얗게 질렸다. 이건 알아 와도 문제, 알아 오지 못해도 문제였다. 아르네 공녀는 레이얼 황태자의 피앙세가 아닌가. 그런데 내쉬 황자가 레이디 아르네와 옷을 맞춰 입다니! 연회장 분위기가 엉망이 되는 건 물론이거니와 자칫 평판까지 떨어지리라. 아무리 도발이라 한들 얻는 것보다 잃는게 많다. 그 꼴을 그냥 넘길 캐서린 황후가 아니다. 그럼 결국엔……. 시종장은 마른 침을 꿀떡 삼키곤 입을 열었다.
“내쉬 황자님.”
“오렌. 한 번 더 입을 떼면, 이젠 나도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
생긋 웃는 내쉬의 모습은 한숨이 나올 만큼 어여뻤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만은 음험하기 짝이 없었다.
“네가 어머니의 사람이란 건 알고 있지. 하지만, 이건 알아두는 게 좋겠어 오렌. 네가 어머니께 뭔가를 전하기도 전에 숨이 끊어지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응?”
제 어미와 똑같은 눈매, 제 어미같이 달콤하기 짝이 없는 미소. 그러나 제 어미 보다 수 배로 더 악랄하다. 시종장은 궁지에 몰린 기분이 되어 초조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직, 안 갔어?”
마지막이 분명할 내쉬의 재촉과 함께 시종장의 허리가 깊게 숙여졌다.
“늦지 않게 다녀오겠습니다.”
어차피, 캐서린 황후에게 달려간들 보호받을 수 없다. 오히려 내쉬 황제에게 들킨 것을 약점 삼아 그를 모질게 대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쉬 황자쪽에 연을 대는 게 낫지 않을까? 시종장은 재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그의 머릿속엔 발 빠르고 몸놀림이 좋았던 이들이 몇 명 떠올라 있었다. 시종장이 자리를 비우는 것과 동시에 내쉬는 입꼬리에 매달아둔 미소를 싹 지웠다. 고작 입매를 굳힌 것뿐인데 달콤하던 인상이 순식간에 매섭고 날카롭게 변했다.
“하나같이 쓸모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난 내쉬는 시종장에게 말했던 것관 달리 곧장 연회장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머리 손질을 끝으로 사람들을 전부 물린 내쉬는 마지막으로 걸칠 프록코트를 신중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어제 일로 놀란 캐서린이 수십 벌의 옷을 보내와 고르는 것도 일이었다. 하지만 내쉬는 입을 옷을 이미 정해두었기에 옷을 고르는 그의 손길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그의 손이 향한 곳은 레이얼이 입고 나갔다는 것과 똑같은 짙은 감색 프록코트 쪽이었다. 그뿐인가, 오늘 그는 레이얼과 달리 레이디 아르네와도 페어를 맞출 작정이었다. 어제 그는 당황하고 분노하지 않았나. 레이얼도 똑같은 값을 치러야 공평하다. 문득, 내쉬의 손 끝에 코트 하나 걸렸다. 밤하늘을 닮은 어두운 청색에 소매 끝단을 크게 접어 모양을 낸 것이 시종에게 들었던 모양과 그린 듯 똑같다. 이건, 뭘까. 내쉬는 색뿐만이 아니라 레이얼의 것과 똑같이 생긴 코트를 집어 들고 창밖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황후궁의 뾰족한 지붕이 있었다.
“어머니 이러시면…….”
내가 뭘 하려는 지 알고 계시는 것 같잖아요. 그게 꼭, 지지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 오해하고 싶어져요.”
그의 녹안이 부드럽게 접혔다.
시린 눈빛이 집요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클로이는 레이얼이 대답을 기다리는 것을 알지만 입을 뗄 수 없었다. 지금은 ‘괜찮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뭔가 실수했나. 들켰나. 찔리는 구석이 있는 클로이는 레이얼의 질문에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옷자락마다 층층이 향수를 겹쳐 올렸기에 상처에서 배어난 피비린내가 새나갈 리도 없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로지를 속이는 건 여간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그런 로지조차 모르고 있는데 레이얼 시오도르가 알아챘다고? 그럴 리가. 차분하게 하나하나 따져보자, 그에게 뭔가를 들켰을 리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마음이 편안해지며 뒤늦게 여유가 돌아왔다.
“제가 괜찮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그러나 클로이는 마지막까지 철저했다. 그의 말에 ‘괜찮다’는 말로 거짓을 읊는 대신,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을 돌리며 교묘히 빠져나갔다.
“괜찮은 이유가 있으십니까?”
하지만 레이얼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는 클로이가 한 그대로 다시 질문으로 답을 돌렸다. 그새 배우다니 정말이지, 짜증 나게 영리한 남자다.
“무얼 생각하셨건 간에, 그게 제가 괜찮지 않을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턱을 살짝 치켜들며 하는 소리는 지독히 오만했다.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
“괜찮은 사람에겐, 괜찮느냐 묻지 않는 법이라고요.”
“전하의 보좌관의 심정을 이제 좀 알겠습니다.”
“그게 무슨 마음입니까?”
“신뢰받지 못한다는 생각.”
“걱정해서라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클로이는 불현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화가 묘하게 익숙했다. 그리고 그건 레이얼도 마찬가지였는지 매끄럽기만 하던 얼굴 위로 파란이 스쳤다.
“……레이디 아르네. 혹시…….”
굉장히 조심스러운 어조인데, 왜일까. 어쩐지 위협이라도 당하는 양, 등골이 오싹하고 입안이 바싹 말라버렸다. 똑똑.
“아가씨.”
연푸른 시선에 붙들려 숨도 쉬지 못하고 있던 그녀를 구원한 건 로지였다.
“들어오렴.”
그녀의 허락에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로지를 보자 너무 반가워 눈물이 찔끔 난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레이얼을 향해 짧게 인사를 건넨 로지가 이내 클로이를 향해 마차가 준비되었다는 말과 함께 뭔가를 작게 속삭였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잠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창밖이 어둑해져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할 때였다. 클로이가 레이얼을 향해 입을 열기도 전,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손을 내밀었다. 굳이 그의 친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클로이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커다란 손이 그녀를 안정감 있게 쥐고 끌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시선이 훅 가까워졌다. 필요 이상으로 너무 가까운 것 같아 뒤로 한 발짝 물러서려던 때. 등 뒤로 들어온 레이얼이 손이 턱, 하니 허리를 붙들어 그녀의 퇴로를 막았다.
“레이디, 아르네. 정말 운이 좋으십니다.”
“…….”
클로이는 어설프게 변명하지 않았다. 이미 상대는 그녀가 망설이던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넌 거짓말에 서툴러, 조심해라. 분명 별것 아닌 데서 꼬리가 밟혀 곤란해지는 순간이 올 테니까.’
이 순간 어째서 그의 충고가 떠오른 건진 모르겠지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자각만큼은 있었다.
“그 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보고 싶어집니다.”
“조급해하실 필요가 있으세요? 어차피, 평생을 두고 보게 될 텐데.”
클로이는 제게 바짝 다가와 속삭인 레이얼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도발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외려 한 걸음 더 다가서기까지 했다. 고개를 숙인 남자와의 거리가 좁혀지자 콧날이 스칠 듯했다. 그러나 레이얼도 클로이도 물러서지 않았다.
“평생.”
“평생.”
그의 말에, 클로이가 생긋 웃어주었다. 순간 어째서인지 그가 웃었는데, 그 모습이 여태와 달리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좋네요. 평생. 그럼, 일단은 가실까요?”
“그전에 잠깐.”
내민 그의 손을 가볍게 물린 클로이가 짧게 웃었다.
“어제야, 다들 놀라서 넘어갔지만, 오늘까진 이럴 순 없죠.”
“무슨…….”
“잠시 기다리세요. 전하. 아무래도 제가 맞추어야 할 것 같습니다.”
클로이는 제가 입은 드레스를 가리키며 웃었다. 오늘 레이얼이 입은 건, 짙은 감색의 프록코트였다. * * * 십 년 만의 칩거를 깬 어제도 아닌데, 사람들이 아르네 공녀와 황태자를 보고 놀랄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놀란다고? 클로이는 거의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짓는 귀부인들의 반응을 예민하게 살폈다.
“왜 이러는 걸까요?”
“글쎄요. 언제나 호들갑스러워서.”
점잖게 욕을 하는 레이얼의 말에 웃음이 튀어 나갈뻔했지만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클로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제 차림이 문제인 걸까요?”
“그럴 리가요.”
레이얼은 예쁘게 부푼 치맛자락을 움켜쥐는 클로이의 손을 가볍게 떼어냈다.
“너무 아름다워서 그럴 겁니다.”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말씀이네요.”
“그럼 내가 잘생긴 거로 하죠.”
“그건 기분 나빠요.”
“어째서죠?”
“사실이니까.”
“…….”
평소같이 능글거릴 거란 생각과 달리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어째서지’라고 생각한 클로이가 고개를 들자, 미간을 희미하게 찌푸린 그가 보였다.
“아…….”
귀끝이 빨갛다. 부끄러워하는 건가! 그런데, 부끄러움은 전염되는 걸까. 그 모습에 괜히 클로이도 속이 울렁이더니 무섭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쿵쿵쿵. 어쩐지 숨이 좀 차는 것도 같다. 가슴에 손을 올리고 호흡을 고르는 중,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오, 아르네 공녀.”
“황후 폐하를 뵈옵니다.”
오늘도 눈이 아릴 만큼 아름답다. 캐서린 황후는 클로이에게 몹시 다정한 표정으로 웃어주었다.
“와주었군요. 아르네 공녀. 그대를 위해 열긴 했지만, 무리하진 말아줘요. 나는……. 어머!”
연극조의 말투로 말을 이어가던 황후가 문득 입을 틀어막으며 작게 신음했다.
“왜 그러시……!”
휘청이는 황후를 부축하려 손을 내밀던 클로이는 황후의 뒤에 나타난 내쉬를 보고 황후가 그랬듯 나직이 앓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런.”
내쉬의 옷차림이 레이얼과 똑같았다. 마치, 옷을 일부러 맞춰 입기라도 한 듯. 그제야 클로이는 연회장에 들어설 때 사람들이 경악한 이유를 깨달았다.
‘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