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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 ‘아르네’만이 할 수 있는 그 일 (32/121)

032. ‘아르네’만이 할 수 있는 그 일2020.12.22.

넝마가 되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아르네 공작과 엘리오 소공작은 크고 작은 상처가 십수 개가 넘어 꿰매는 것만도 한참이었다. 에반은 제 주인에게 남은 흉측한 상처를 꿰매는 내내 이를 북북 갈아댔다. 잔당이 있다면, 세상 끝까지 쫓아가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공작의 옆구리를 가로지르는 상처는 무려 오십 바늘이 넘게 꿰매야 할 만큼 커다란 것이었다.

‘아무리 기습이라지만 공작님께서 이렇게 다치시다니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에반의 질문에 가물거리는 눈을 해선 엘리오가 웃었다.

‘무슨 일이 있었겠어? 이대로 돌아가면 곤란해진 근위대가 눈이 돌아버렸지.’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귀를 씻어내야 할 만큼 저열하고 더러웠다. 암습이 통하지 않자 근위대는 공작 대신 민란군을 공격했다. 도발 당한 민란군이 공작을 공격하길 바라서였겠지만, 민란군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기사들과 맞서 싸웠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민란군은 일개 영지민이었기에 훈련된 기사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마음은 고마웠으나 민란군은 공작과 엘리오의 약점이 되었다. 민란군을 보호하며, 근위대를 상대해야 했던 공작과 엘리오는 한없이 불리해졌다. 기사들은 집요하게 민란군을 공격했고, 공작의 상처는 역시 그렇게 생긴 것이었다.

‘날아드는 칼을 민란군 대장을 대신해 맞았다고요? 어째서 그렇게까지…….’

에반의 말에 엘리오가 멋쩍게 웃었다.

‘그가 날 살린 적이 있거든.’

‘그렇다면야.’

‘계산이 철저한’ 북부 출신의 에반은 단박에 공작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러나 이해와 감당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아르네의 주인과 후계가 나란히 쓰러졌다. 아르네 공녀가 남아 있긴 하나 사방에서 게걸스럽게 달려들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나직이 한숨을 흘리던 에반의 눈에 마침 엘리오 소 공작의 마차에서 나오는 기사가 보였다.

“소 공작께서는?”

기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

공작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소 공작은 엉망인 몸으로 너무 많이 움직였다. 둘 다 망가졌으니, 오랜 시간 추슬러야 할 것이다. 알고는 있었으나 혹시나 하는 기대가 사그라지지 않는다. 에반은 애써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말도 쉬었을 테니, 이만 또 출발하지. 아가씨를 너무 기다리게 하면, 우리도 호송 마차에 누워야 할지도 몰라.”

“예!”

이건 절대 분위기를 살려보고자 하는 농담 따위가 아니다. 절대. 클로이 아가씨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출발, 출발!”

그 사실을 에반도 기사도 몹시 잘 알고 있었기에 출발을 알리는 기사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아직 수도는 멀고도 멀었다.

“간밤 공녀께서 쓰러지셨다지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어 찾아왔습니다.”

천연덕스럽게 ‘걱정’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내쉬를 향해 레이얼이 옅게 미소지었다.

“신경 써줘 고맙구나. 자, 식기 전에 마시렴.”

레이얼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내쉬에게도 권했다.

“차 취향은 여전하시네요.”

“응?”

“늘 이렇게 향이 없다시피 한 차만 드시잖습니까.”

내쉬의 말에 레이얼은 이렇다 할 대답 없이 차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대체 이게 무슨 의미일까. 그의 피앙세가 연이어 세상을 등졌을 때도 이런 적이 없었다. 그런데 겨우 쓰러진 정도로 찾아왔다고……? 웃고 있는 내쉬를 보자 뒷머리가 삐죽 당긴다.

“곧 비도 맞으실 텐데 ‘향’에 얼른 적응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다못해 그 ‘레이디’도 향이 나던걸요.”

“레이디가?”

“산뜻하고 청량한 향이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향은 ‘레이디’의 유희이니 당연한 것을.”

레이얼은 내쉬의 말을 농담으로 응수하며 옅게 웃었다.

“그나저나 찾아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아…….”

본론이 이쪽이었나. 하지만 ‘왜?’라는 의문은 여전했다.

“다정해졌구나.”

레이얼는 지극히 모호한 대답을 하며 버릇같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혹시 향이 버거우시다면, 제가 대신 다녀오겠습니다.”

“네가?”

“형님께선 아무래도 조심스러우실 테니까요. 이번 일로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떠드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듣기엔 다정하나, 그들은 그런 사이가 아니다. 그리고, 곱씹으면 가시가 있는 말. 레이얼은 내쉬가 어째서 제게 이러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걸어온 싸움을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건 영락없이 황후 폐하를 닮았구나.”

달달한 낯짝으로 음험한 짓을 꾸미는 꼴이 정말 딱이야. 자간 사이사이 심은 가시에도 내쉬는 웃는 얼굴을 풀지 않았다.

“과한 말씀이세요.”

“과하다니, 진심이야.”

“내키지 않으시다면, 못 들은 것으로 하세요. 어차피 곧 공녀께서도 황실로 걸음 하셔야 할테니, 그때 안부 전하셔도 될 테니까요.”

“공녀께서?”

“오늘 아침, 아르네의 비극에 슬퍼하는 어머니를 달래려 폐하께서 아르네를 위한 연회를 열어주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런.”

위로라니 그럴 리가 있나. 저건 무너진 아르네를 ‘전시’하려는 것이다. 시오도르 손에 무너진 아르네. 병색 완연한 공녀는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한 전리품이었으며, 레이얼 진영에게 보내는 강력한 경고가 되리라. 저열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처사에, 레이얼은 욕이 치밀어 답이 아주 조금 늦었다.

“신경을 아주 많이 써주시는구나.”

“다정하시잖아요.”

내쉬는 말 끝에 제 어미와 똑 닮은 얼굴로 레이얼이 가장 싫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녹아버릴 것같이 다디단 미소. 들이켜는 숨 끝이 짜증 나게 달다. 레이얼은 미적지근해진 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씁쓸한 차로 헹구고 나자 조금 살 것 같았다.

“차, 더 마실 거니?”

“아뇨. 충분합니다.”

내쉬는 빈 그의 찻잔을 보곤 선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뵐게요.”

“조심히 가렴.”

오늘, 내쉬가 찾아온 이유가 그의 속을 뒤집기 위함이라면 성공적이었다. 문이 닫히고, 집무실에 홀로 남겨진 레이얼의 얼굴이 볼만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 * * 그 시각 아파 쓰러진 것으로 되어 있는 아르네 공녀님께서는 쏟아지는 서류에 진짜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거, 다 뭐야?”

새파란 눈동자가 겁에 질려 파르르 떨린다.

“로지? 부집사님? 이거 다 뭐냐니까? 나 매일매일 성실하게 서류 보고 있었잖아. 그런데 어떻게 밤사이 한 달은 놀아버린 것처럼 쏟아지지?”

공녀는 비통했으나, 가신들은 비장했다.

“이전엔 곧 공작님이 오시리라 생각해서 당장 급한 것만 부탁드렸어요. 하지만 이제 한동안 공작님께서 일을 보시긴 힘드실 테니까요…….”

에반의 자리를 대신해, 임시로 집사장의 위치를 떠안은 길리언이 연신 시선을 굴렸다.

“그래서?”

“그래서…….”

클로이가 어려운 듯 자꾸 머뭇거리는 길리언이 답답했던지 로지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래서는요. 본격적으로 일을 하셔야 한다는 뜻이지요.”

“여태 전력으로 일했어.”

“아뇨. 그건 에반 님도 할 수 있는 일인걸요. ‘아르네’만 할 수 있는 일을 하셔야 한다는 뜻이에요.”

“대체 그게…….”

“당장 올 겨울 토벌 계획도 전면 수정해야 한다고요.”

툴툴거리던 클로이의 입이 꽉 다물렸다. 매년 겨울.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아르네에선 공작이 기사단을 끌고 산맥으로 향했다. 이른 바 겨울 토벌, 동면에 들어간 괴수들을 정리하는 북부의 가장 큰 사업이었다. 토벌 규모에 따라 이듬해 영지민의 삶이 달라지므로, 매년 토벌은 신중하고도 과감했으며 또한 몹시 공격적이었다. 아르네는 지난 이백 년 내내 단 한 번도 토벌을 쉬어본 적이 없었다. 아르네 공작부인이 세상을 등졌던 그해에도. 비록 예년에 비해 정리한 괴수의 양이 절반 수준에 그치긴 했으나 공작은 아르네의 소임을 해내고야 말았다.

“……겨울 토벌.”

그런데, 올해는 그 자리에 비게 되었다. 클로이는 문득 코끝이 시큰하게 아려왔다. 어머니를 보내고도 공작의 자리를 지키던 아버지가, 제 뜻과는 무관하게 놓아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가 차올랐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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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 배치도 다시 봐야 합니다. 어차피 에반 님이 오신 다음에 의논할 부분이긴 한데, 공녀님께서 미리 알고 계셔야 이야기가 될 테니까요.”

로지의 지원사격에 힘을 얻은 듯, 길리언이 조금 전보다는 제법 또렷한 목소리를 냈다.

“요컨대, 대장 자리가 비었으니 조직 재편을 해야 한다 이거겠지?”

“예.”

“알았어. 그리고 또? 길리언 낯가림은 이따 혼자서 하고 집중해봐. ”

잠깐사이 사람이 바뀐 듯, 일이 많다고 징징거리던 공녀는 갑자기 가신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절절매는 건 길리언 하나뿐, 로지는 능숙하게 서류를 착착 꺼내 들었다.

“혹설 대비가 아직입니다. 공작님께서 이번 사냥제가 끝난 뒤에 영지로 돌아간 후 진행한다고 미뤄두셨거든요.”

“좋아, 그럼 이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아, 그건 브래넌이 잘 알아요. 제가 불러오겠습니다.”

늘 혼자 있는 것이 당연하던 집무실로 수시로 사람들이 불려오며 복작거리기 시작했다. 오전부터 밤이 이슥해지도록 쉬지 않고 일했으나 클로이가 최종 처리한 건 하나도 없었다. 워낙, 큰일이었기에 당연했다.

“자, 길리언 이만 돌아가 봐. 로지도.”

“고생하셨어요. 으으…….”

“길리언! 오늘 하루 하고선 앓는 소리 하지 말아요!”

“하지만 로지님, 전 원래 일개 시종인걸요. 이런 건 에반 님의 일이었다고요.”

“흥, 길리언 이거 왜 이래. 난 원래 ‘아르네 공녀’가 아니라 이 집안 귀염둥이였다고.”

길리언의 칭얼거림은 공녀님의 뻔뻔한 자기주장에 콱 들이 막혀버렸다. 하지만 그건 정말 사실이기도 했기에 아무도 반박하진 못했다.

“자자 나가요. 귀염둥이님께서도 쉬셔야 하니까. 아가씨, 곧 식사 올려드릴게요.”

“간단하게.”

캄캄해진 하늘을 힐끔, 쳐다보며 하는 말에 길리언을 몰아내던 로지가 한층 더 분주해졌다.

“빨리 나갑시다. 우리 아가씨 배곯아요.”

“밀지 마세요. 나가고 있다고요. 아가씨 내일 뵐게요.”

탁. 문이 닫힘과 동시에 클로이는 털썩 소리가 나게 의자에 주저앉았다. 더는 서 있을 힘이 없었다. 내내 괜찮은 척했지만, 매일 죽기 살기로 노력해도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그 책임이 막중해진다. 압박감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클로이는 위중하다는 아버지가 걱정되고, 많이 다쳤다는 오빠가 궁금했다. 온종일 에반이 전서구를 보내주진 않으려나 신경이 매여 있다. 황실을 떠올릴 때면 울컥울컥 살심이 돋고, 어쩌다 제 처지가 이렇게 된 건지 기가 찬다. 멍하고 화나고 슬프고 괴롭고 온갖 감정이 매 순간 빗발치듯 쏟아져 내리는데, 클로이는 ‘아르네’라는 이름에 그 모든 것을 덤덤한 표정으로 가려야 했다. 가끔 목이 졸리는 기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데도 꾸역꾸역 버티는 것은.

“아빠 힘들었겠네.”

이 자리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아르네의 이름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아버지와 오빠가 모르고 살 수 있게 해주었기에. 그들이 그렇게 지켜낸 ‘아르네’임을 알아 클로이 역시 최선을 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곯아떨어질 것 같이 피곤하다. 레이얼에게 새를 보내 하루 쉬고 싶다고 전하면 쉬라고 해줄 테다. 하지만, 클로이는 몸을 일으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자신은 그래도 곁에서 도와주는 이들이 있는데, 레이얼은 자신뿐이니까. 클로이는 황궁으로 가고 싶은 제 마음을 그렇게 정리했다. 아마 안쓰러워서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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