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비참하고, 한심하고, 참담한2020.12.18.
연회는 끝났다. 처연하고 아름다운 비극에 눈을 반짝이던 사람들은 아르네 가에서 양해를 구하기도 전 앞다퉈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꽉 들어찬 연회홀이 텅 비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한 시간. 정말 번개 같은 속도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가여운 우리 공녀님.”
흑흑흑 소리를 내며 연신 손수건으로 눈을 찍어대던 로지는 공작가의 정문이 닫히는 묵중한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섰다.
“아가씨. 일어나셔도 됩니다.”
“나, 어땠어?”
“어땠긴요. 정말 멋졌지요.”
로지는 파리한 안색의 클로이에게 미리 준비해둔 고기스튜와 초콜릿을 듬뿍 넣어 만든 케이크를 내밀었다.
“이, 괴상한 조합은 뭐지?”
“힘이 쑥쑥 나는 것들이죠.”
말은 장난스러웠으나, 클로이를 바라보는 로지의 눈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쓰러지던 클로이를 받아낸 로지는 자신의 아가씨가 몹시 말라버린 것을 알아차렸다. 연기 따위가 아니었다. 원래도 늘씬한 체형이긴 했는데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한 손에 들어오는 가는 팔뚝이라니. 필히 마음고생을 해서이리라. 더불어 대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겠는 밤 나들이도 한몫했을 테고. ……아니다. 이건 전부, 미쳐버린 시오도르 때문이다. 잠깐 로지의 주먹이 꽉 쥐여졌다 풀렸다.
“얼른얼른 드세요. 곧 또 나가보셔야 하잖아요.”
“아참.”
속마음과 달리 클로이를 다그치는 로지의 표정은 덤덤하기만 했다. 안쓰러워하는 마음은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말 도움이 되고 싶으면 문제를 해결해 주는 편이 훨씬 낫다. 마음 같아서야 아르네를 뒤흔드는 못돼먹은 시오도르를 제가 처리해버리면 참 좋겠지만, 크고 작은 주인들이 허락하지 않으니 그녀가 할 일은 그저 지켜봐 주는 것뿐.
“나 근데 아까 좀 어색하진 않았고?”
괴상하다고 눈살을 찌푸리던 것도 잠시, 클로이는 진득한 스튜와 달콤한 케이크를 떠넣으며 연신 우물거렸다.
“괜찮았어요. 그리고 이상했어도 다들 충격받아서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잘됐다.”
“잘될 거예요. 다들 양해를 구하기도 전, 눈을 번쩍이며 나가버린 것을요. 아마 내일이면 온 사방으로 티타임 초대장이 돌 거예요.”
“아아, 하고 싶으신 이야기들이 많으시겠군?”
“그럼요. 가련한 아르네 공녀와 공녀를 그렇게 만든 시오도르. 그리고 어쩌면 저주받은 황태자 이야기까지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저주받은 황태자?”
클로이는 로지의 말에 맛있게 먹던 케이크가 목구멍에 턱, 걸려버렸다. 진득하고 끈적한 것이 혀뿌리에 달라붙어서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호사가들이 말하기 딱 좋은 소재잖아요. 약혼을 강요하고, 출정을 명령하고. 얼마나 딱해 보여요?”
“나, 안 죽었어. 저주받은 황태자라니.”
“어머? 지금 감싸는 거예요? 싫어하시는 줄 알았는데. 피앙세가 되시더니 좀 달라지신 건가?”
짓궂게 놀리던 것도 잠시, 로지는 물잔을 건네며 재촉했다.
“달 떠요.”
간밤 한숨도 자지 못하고 연회에 시달리다 온 사람은 바로 난데. 다 죽어가는 표정의 레이얼을 본 클로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하?”
“아, 응?”
레이얼은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 종종 정신을 놓았다. 가까스로 시선이 맞닿았나 싶으면 다시 뿌옇게 넘어간다. 클로이가 아는 레이얼 시오도르는 꽤 자기 관리에 능한 남자였다. 그런데 자신 앞에서 이렇게 넋을 놓고 있다고?
“전하, 무슨 일 있어?”
웬만하면 시오도르와는 깊게 엮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정신을 놓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일?”
이것 봐 이상하잖아. 레이얼은 속이 텅 빈 사람처럼 이상한 눈을 하고 있었다.
“오늘 누가 죽기라도 했대? 왜 이래?”
“아아…….”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레이얼이 문득 손을 들어 얼굴을 덮어버렸다. 찰나에 보이던 표정이 너무 침통해 클로이는 가슴이 철렁했다. 왜, 누가 잘못됐기에 이래? 황제나, 황후의 일로 이럴 것 같지는 않고 측근이라 할만한 사람도 거의 없을 텐데?
“왜, 왜, 왜 그래? 응?”
이렇게 자꾸 사적으로 얽히면, 꼬리를 밟히기 마련인데. 그의 말처럼 거짓말에 서툴러 꼬릴 밟히면 아니라고 능숙하게 잡아떼지도 못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머릿속에서는 숱하게 레이얼에게 다가가서는 안 되는 이유가 떠올랐으나, 클로이의 손은 어느새 레이어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었다. 툭툭.
“말하기 싫으면…….”
“아르네 공작이 민란군의 습격을 받아 위중하다고 한다.”
“…….”
이것 봐. 이렇게 다가가면 안 된다고 했잖아. 클로이는 곧장 후회했다. 봉인하듯 꾹꾹 눌러놓은 감정이, 레이얼의 한마디에 거칠게 헤집어져 여간 아픈게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은 ‘로이’, 절대 티를 내선 안 됐다.
“그…….”
목이 멨으나, 클로이는 가까스로 태연한 목소리를 내는 데 성공했다.
“아르네 공작님은 금방 좋아지실 거야.”
“당연하지. 그가 이런 일에 무너질 리 있나.”
“그런데 왜 그래?”
“왜 이러냐고?”
얼굴을 덮은 손이 스르륵, 미끄러지듯 떨어지며 그 사이로 시리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개소리를 듣고도, 반박할 수 없는 게 비참해서.”
“……!”
“뻔히, 흉수가 누구인지 아는데 방패막이가 되어버린 이를 비호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해서.”
“전하.”
“그리고 이 비보를 전해 들은 가여운 내 피앙세가 쓰러졌다는 소식에도 가볼 수 없는 처지가 참담해서.”
새파랗게 굳어 버린 눈을 하고선 레이얼은 웃었다.
“정말, 내가 불운을 몰고 다니는 건 아닌지 의심이-.”
“쉿.”
클로이는 대뜸 손으로 레이얼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르네’의 억울함을, 분노를 알아주는 그의 말은 고마웠으나, 거기에 자책을 더하는 건 안 될 소리였다. 그의 말처럼 개소리를 한 흉수는 따로 있지 않나. ‘시오도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레이얼 시오도르가 떠안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린 한편이야 잊었어?”
“뭐?”
아차. 클로이는 흥분 끝에 로이와 공녀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을 깜빡했다.
“아르네 공작은 시오도르와 레이얼 시오도르가 다른 것을 알테니까, 내 앞에서까지 자책하지 말라는 거야.”
“자책이라고?”
“자책 몰라?”
말실수를 덮어보려는 듯, 클로이는 호들갑스럽게 놀란 시늉을 했다. 하지만, 그것을 레이얼은 제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한참을 바라보던 끝에 느슨하게 웃어주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 로이.”
“내, 내, 내가 뭘.”
“그래 맞아. 아르네는 다 알고 있지. 그래서 더 미안했던 거다. 더 화가 나고 억울했고. 그가 다쳤다는 말에…….”
레이얼은 늘어뜨린 몸을 곧게 세우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나도 아니고, 모든 아르네가 그렇게 되었다는 소리에 잠깐 정신이 나갔었다.”
“그런데 신기하네 전하. 공녀가 쓰러진 건 또 어떻게 알았어?”
“황실에 소문이 파다하다. 오늘 공녀께서 연회를 열다 비보를 접하고 그대로 쓰러지셨다는 이야기 말이다.”
“연회를 열다 쓰러졌는데, 그 이야기가 벌써?”
“벌써라니. 한두 시간이면 온 사교계로 이야기가 도는 것을.”
레이얼은 말 끝에 고개를 저었다.
“사교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보니 정말, 예법은 어깨너머에서 배운 모양이군.”
“…….”
불난 것도 아닌데 무슨 소문이 그렇게 빨라. 클로이는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수도의 사교계는 연회와 티파티, 낭독회만이 아니야. 아마 가장 활발한 건 살롱이 아닐까.”
“살롱?”
“귀부인들이 모이는 고상한 장소가 있지. 자정까지 운영되고, ‘살롱’을 빌리면 수준급의 차와 티푸드가 제공되지.”
“오……. 그러니까 임대 응접실 같은 건가?”
“비슷하다.”
어쩐지, 그래서 다들 그렇게 눈을 반짝이며 뛰어나갔구나. 살롱에 모여서 수다 떨려고! 다음날 모여 앉아 소근거릴 티파티를 떠올리다니, 이 얼마나 천진한 생각인지. 잠시 이곳이, 밤이면 괴수가 활보하는 북부가 아니라는 것을 깜빡했다. 멋쩍게 고개를 주억거리던 클로이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런데 황실에 어떻게 소문이 퍼진 거야? 황후가 이 시간에 사사롭게 그 살롱에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몰랐나?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살롱은 바로 황후궁 안에 있다.”
“뭐? 그렇게 아무나 들이면 황실 보안은?”
“걱정 말아라. 입장료가 꽤 된단다.”
“아아…….”
진짜 미인, 다이아몬드 갈아 마시나. 클로이의 잇새로 경악이 흘렀다. * * *
“개로 부족해, 새도 들이셨군.”
내쉬는 쉬지 않고 깔깔거리는 귀부인들의 목소리에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황후궁 바로 옆으로 황자궁을 배정받았기에, 황후의 살롱에서 새 나오는 낭랑한 목소리는 그의 궁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밤바람을 타고 울리는 웃음소리와 결코 좋은 내용이 아닐 은근한 속삭임은 상당히 거슬리는 것들이다.
“하…….”
결국 내쉬는 보던 책을 짜증스럽게 덮어버렸다.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책을 보는 건 그의 유일한 취미였는데 도통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르네 공녀 얼굴이 얼마나 딱하던지요.”
조금만 귀를 세우면 이렇게나 말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데, 집중이 될 리가 있나.
“정말 안됐지 뭐예요. 공녀라고는 하지만, 수도의 사교계에 도통 끼어들지도 못하고 밖으로 돌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연회를 열었는데 하필……!”
걱정같은 조롱에 다시 한번 까르르 웃음소리가 터진다.
“끼어들지 못하다니요. 말씀은 똑바로 하셔야지요. 어찌나 성격이 드세고, 콧대가 높은지 그 누구하고도 말을 섞지 않았잖아요.”
“고귀한 ‘공녀’님이다 이거였나요? 어머나, 도통 몰라뵈었네요.”
“고귀하긴요. 남은 건 아르네라는 이름뿐 아니었던가요? 아직도 옛 영광에 콧대나 세우며 뻣뻣하게 구니, 폐하께서도 싫……. 흠흠. 아무튼.”
내쉬는 일어나 창을 닫았다. 귀가 따가워 머리까지 울린다. 커튼까지 꼼꼼하게 치고나니 한결 조용하다. 침대로 돌아와 자리를 잡던 내쉬는 문득,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공녀께서 쓰러지셨다고.”
칼을 맞아도 신음도 내지 않을 것 같이 독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아……. 투구게 같은 거였나?”
외피만 벗기면 한없이 말랑말랑해서 금방 허물어지고 마는? 어느새 내쉬는 ‘아르네’ 공녀에 한껏 골몰해버렸다. 그 언젠가 봤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여름 하늘을 닮은 강렬한 모습이. 마지막으로 봤던 것이 성년식 바로 전이었으니 아마도 4년 전이었던 것 같다. 황실 연회장에서 그 누구보다 고고하게 빛이 나면서도 그 누구보다 지루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여자였다. 옅게 미소짓는 입매며 우아한 몸놀림에 모두 깜빡 속았겠지만, 그는 봐버렸었다. 순간 순간, 화려하게 차려입은 바보들을 바라보던 시선에 서리던 옅은 경멸을 말이다. 첫 시선을 그렇게 앗아간 공녀는 그날 내내 그의 시선을 독점했었다. 황실 후원에서 남작 영애를 희롱하려던 백작 영식 하나를 늘씬하게 두들겨 눕혀버리고선, 태연한 얼굴로 몸이 좋지 않아 이만 돌아가 보겠다고 인사를 했었다. 힘껏 날린 주먹이 잘못되었는지 티 없이 주무르면서도 표정만은 단단했었지. 그런데 그 강철같은 여자가 쓰러졌다고?
“사람들 보는 앞에서…….”
턱끝을 살살 쓸며 중얼거리는 내쉬의 두 눈이 반짝, 위험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