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묘한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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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묘한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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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묘한 감정
2023.03.06.
“로즈벨리아 선배님?”
그때 나한테 고백했던…….
이름이 뭐였더라.
“시몬?”
“제 이름을 기억해주셨던 겁니까?”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시몬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당연히 기억……하지.”
“감사합니다, 선배님. 제게는 큰 영광입니다.”
시몬이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이름을 바로 떠올리지 못한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영광일 것까지야.”
“하지만 빈말이 아닌걸요.”
나는 싱글거리는 시몬을 빤히 쳐다보았다. 바짝 긴장한 모습만 뇌리에 남아 있었는데 웃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살짝 케이든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대뜸 고백에 대한 대답을 들으러 왔다고 내 앞에 나타났을 때보다 한결 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여기서 다 보네, 클라인.”
“그러게.”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이안과 시몬을 번갈아 쳐다보던 나는 이내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맞다, 둘 다 이번에 같이 들어온 신입이었지.
“근데 시몬 넌 광장에 무슨 일로 나온 거야?”
내 물음에 시몬이 아차 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에드윈 선배님이…….”
에드윈?
“에드윈 지금 기사단에 있어?”
“네.”
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체 기사단에는 언제 돌아간 거야?
넝쿨째 굴러들어온 복을 제 발로 차도 유분수지.
운명의 상대라고 여겼던 데이지와 지독하게 엮일 절호의 기회였는데, 바보 같으니라고!
“에드윈이 뭘 시켰는데?”
“로즈벨리아 선배님이 아직 광장에 있는 거 같으니 찾아오라고요.”
시몬의 말을 곰곰이 되새기던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너한테 시켰단 말이야? 에드윈은 뭘 하고?”
“에드윈 선배님께는 일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우연히 에드윈 선배님과 루카스 선배님이 나누는 얘기를 듣고, 광장에 나갔다 오겠다고 자원한 거고요.”
일이 있는 것 같았다고? 설마 에드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래, 아무튼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이제 다 같이 돌아가면 되겠네.”
내가 걸음을 떼자, 이안과 시몬이 보폭을 맞추며 나를 따르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응?”
“클라인과는 무슨 일로 같이 계셨던 건가요?”
“아아, 에드윈과 나왔다가 우연히 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이안이라고 말할 뻔했네.
“네?”
“이 넓은 광장을 떠돌아다니던 신입을 만났어. 단장님 심부름을 처리하러 나왔다기에 도와준 거고.”
“그랬군요.”
어쩌다 보니 한가운데에 있다는 걸 깨달은 나는 이안과 시몬을 번갈아 보았다.
묵묵히 앞만 보고 걷는 이안과는 달리 나와 눈이 마주친 시몬은 화들짝 놀라며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한쪽은 내게 고백을 했다고 오해한 사람이고, 한쪽은 진짜로 나에게 고백을 한 사람이잖아?
따지고 보면 내가 아니라 로즈벨리아에게 한 거지만.
어찌 됐건 썩 유쾌한 조합은 아니었다.
“자, 시몬 네가 가운데에 서는 게 좋겠어.”
“예? 왜요?”
나는 대답 대신 시몬의 손에 사탕을 쥐여 주었다. 이거나 먹으면서 조용히 가잔 뜻이었다.
“이게 뭐예요, 선배님?”
“단 거.”
“신기하게 생겼네요.”
사탕을 이리저리 살피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시몬은 이번에 들어온 신입 중에서도 유난히 앳된 인상이었다.
그래서인지 더 남동생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시몬 옆에 우뚝 솟은 이안과는 확연히 다른 그림체였다.
적어도 두 사람 나이가 같지 않다는 건 알겠네.
백색기사단은 지원에 나이 제한이 없기에, 그 해에 같이 들어 온 신입이어도 나이는 들쑥날쑥했다.
백색기사단은 기강 때문에 나이가 아닌 기수를 따졌고, 한 번 동기는 영원한 동기이며 기수에 따라 선후배 구분 또한 명확했다.
“얼른 먹어 봐, 시몬.”
“알겠습니다.”
시몬은 망설임 없이 사탕을 입안에 쏙 넣었다.
“맛이 어때?”
“엄청 답니다.”
솔직한 평가에 비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 없긴 하지.
“저도 주십시오.”
대뜸 이안이 말했다.
“어? 뭘?”
그가 눈짓으로 가리킨 건 내 손바닥에 남아 있던 사탕 하나였다.
“신입, 너는 안 먹는다고…….”
내가 입을 떼자마자 이안이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아니, 어둡다기보단 뭐랄까. 기분이 나빠 보이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뇌물용으로 준 사탕을 아무한테나 줘서 그런가? 설마 여기선 사탕이 비싼 건가?
“자, 여기.”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매를 움찔거리던 이안은 내게서 건네받은 사탕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곤 시몬에게 흘긋 시선을 두었다가 거두더니 이내 휘적휘적 앞서 걷기 시작했다.
“……뭐야, 먼저 가는 거야?”
“혹시 화장실이 급한 거 아닐까요?”
그건 아닌 거 같다고 단호히 말하려던 나는 사뭇 진지한 시몬의 표정을 보곤 뺨을 긁적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 우린 천천히 가자.”
*
나와 시몬이 기사단에 복귀했을 때, 에드윈은 이미 기사단을 떠난 뒤였다. 루카스 말로는 집안에 일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에드윈 홀튼.
에드윈은 홀튼 후작가의 장남이자 차기 가주였다. 집안일이라면 홀튼 가문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원작 내용을 열심히 떠올려보아도 달리 생각나는 건 없었다. 원작에서는 아직 에드윈이 등장하기 전이니까.
“원작을 그렇게 많이 읽었는데도 아는 게 없네.”
지면을 투박하게 울리던 에밀리의 말발굽 소리가 일순간 부드러워졌다. 시선을 들어보니 어느새 마구간 앞이었다.
로이에게 에밀리를 맡긴 나는 정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드넓은 화단을 지나 분수에 다다랐을 때였다.
“누님?”
케이든의 목소리였다. 내가 멈춰 서자, 케이든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케이든.”
“지금 오시는 겁니까?”
날이 제법 어둑해서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마주한 케이든은 땀범벅이었다.
“연무장에서 오는 길이야?”
“네.”
설마 이 시간까지 수련하고 있었던 건가?
“어머니가 좋아하시지 않잖아. 집안일에 조금 더 관심을 두는 게 어때?”
“저는 누님처럼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백색기사단 기사요.”
케이든의 입가에 천진난만한 미소가 번졌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케이든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동자에 떠오른 순수한 열망은 어둑한 밤하늘의 별빛만큼이나 반짝이고 있었다.
“기사도 좋지만, 너는 가문을 이을 생각을 해야지.”
“기사여도 가문을 이을 순 있잖아요.”
“그렇기야 하지만……. 꼭 기사가 되고 싶다면 수호기사단은 어때?”
백색기사단은 황실의 호위를 최우선으로 하는 수호기사단과 달리 정예기사단이었다.
전쟁이 나면 백색기사단은 모두가 전쟁터에 나서야 했고, 일 년에 한두 번은 마수 토벌을 떠나야 했다.
근 10년간은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지만, 언제든 터질 수 있는 게 전쟁이고 마수 토벌 또한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백색기사단이 왜 명예로운가 생각하면 답은 뻔했다. 위험한 일들을 맡아서 하니까.
어찌 보면 목숨을 담보로 얻는 명예인 셈이다.
“저는 백색기사단이 좋습니다.”
“네가 꼭 기사가 되겠다면 나는 수호기사단을 추천하고 싶은데, 천천히 잘 생각해 봐.”
제법 다부진 얼굴을 한 케이든을 힐긋 살핀 나는 구태여 말을 보태지 않고, 본관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뗐다.
“저기, 누님…….”
“응?”
“혹시 저와 대련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와 대련하고 싶은 이유가 뭔데?”
케이든은 일말의 지체도 없이 대답했다.
“누님은 최고로 강한 분이시니까요. 제국에 다시 소드마스터가 나타난다면 그건 분명 누님일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왜 네가 더 뿌듯해 보이는 거니?
“넌 아직 어려, 케이든. 그리고 우리 기사단 내에서도 나와 대련하는 사람은…….”
무심코 없다고 말하려던 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없는 건 아니지. 최근에 꽤 괜찮은 대련 상대가 생겼으니까.
“누님?”
“손에 꼽을 정도야. 네가 지금 그 실력이 된다고 생각하니?”
케이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대답이 돌아올 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의연한 얼굴이었다.
“지금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제가 더 실력을 키운 이후에라도…….”
“지금 널 가르치는 기사가 누구지?”
“아놀드입니다.”
아놀드라면 최근에 올리비아가 데려온 기사였다. 올리비아의 친정인 라일리 가문 출신의 상급 기사였던가.
“슐츠가 아니라?”
“네.”
슐츠는 오랜 시간 동안 윈터스 가문의 호위를 책임졌던 상급 기사였다.
로즈벨리아의 검술 스승이기도 했고, 케이든에게 처음 검술을 가르친 것도 분명 슐츠였을 텐데?
“네가 나랑 대련할 수 있는 실력인지 아닌지 그나마 슐츠가 알 텐데. 지금 너를 가르쳐주는 상대가 아놀드라면…….”
“누님 말씀 이해했습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좋아, 슐츠가 네 실력을 인정한다면 그땐 너와 대련해줄게.”
“알겠습니다, 누님.”
목소리에 기합이 바짝 들어가 있는 게 귀여워 슬쩍 웃음이 났다.
이전 삶에서도 동생을 갖고 싶었는데, 친동생이 있었다면 이런 기분일까.
헝클어진 케이든의 머리를 내려다보던 나는 무심결에 손을 뻗었다가 손끝이 머리칼에 닿기 직전, 슬며시 팔을 내렸다.
“누님?”
내가 제자리에 멈춰서자 케이든이 의아한 기색으로 올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태연한 척 입매를 끌어올려 보이곤 다시 걸음을 뗐다.
“가자.”
*
“황자님, 어디 불편하신 겁니까?”
“내가?”
그럼 여기 황자님 말고 다른 황자님이 계시답니까?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지 못한 네이슨이 이안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요 며칠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같더니만 오늘은 한눈에 봐도 저기압이었다.
“안색이 영 좋지 않으신데요.”
이안은 무어라 대답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생각에 잠긴 듯한 이안의 낯빛을 살피던 네이슨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이 돌연 백색 기사단에 입단한다고 했을 때 네이슨은 이안이 길어야 몇 달, 짧으면 한 달도 채 버티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설마 벌써 그만두시려는 건 아니겠지?’
네이슨이 이안의 보좌관이 된 지도 어언 3년이었다. 그동안 옆에서 지켜봐 온 이안은 뭐랄까, 다소 신기한 사람이었다.
타고 나길 귀한 황자로 태어나서 그런지 무언가를 욕심낸 꼴을 본 적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알아서 좋은 것들을 챙겨 준다지만, 사람이라면 자기가 손에 쥔 것에 집착하기 마련인데 이안은 그러지 않았다.
물건에도, 사람에게도 애착을 보이지 않았다. 매사에 무덤덤하고 별다른 의욕도 없어 시키면 어쩔 수 없이 하는 타입이지만, 또 뭐든 곧잘 해냈다.
그런 이안이 오랫동안 손에서 놓지 않은 건 검이 유일했다.
“네이슨, 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저한테요?”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어느새 책상 위에 턱을 괸 이안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려 보였다.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는 이안과 그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네이슨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아뇨. 저한테 묻고 싶으신 게 뭔데요?”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네, 말씀하세요.”
네이슨이 퀭해진 눈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내가…….”
‘왜 황자님 얼굴 위로 초조한 기색이 보이는 거 같지? 요새 일을 많이 해서 헛것이 보이는 건가?’
부쩍 침침해진 눈을 비벼보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존재감이 없는 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