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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제가 불편하십니까 (9/54)


9화. 제가 불편하십니까
2023.03.02.


당황한 내가 눈을 깜빡이자, 툭 불거진 이안의 목울대가 화답하듯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니까 지금 내 이마에 맞닿은 온기의 정체가 이안의…….

이, 입술?

이런 일이 진짜로 일어날 수 있는 거였어?


“저기, 신입? 이제 떨어져도 될 거 같은데.”

“네.”

짧은 대답과 동시에 이마를 간질이던 숨결이 멀어졌다.


“그……. 네 뒤로 마차가 바짝 붙어서 가길래 위험할까 봐 급하게 잡아당긴 건데, 내 힘이 좀 과했나 봐. 네가 그렇게까지…….”

힘없이 딸려올 줄은 몰랐다는 뒷말은 간신히 삼켰다.


“아무튼 미안해.”

다소 멍한 얼굴이었던 이안의 표정이 굳어진 건 그때였다.


“왜 제게 사과를 하시는 겁니까?”

“어?”

“저를 구해주신 거잖습니까.”

“아, 그렇지. 내가 구해준 거지.”

그러다가 이런 불상사가 생긴 거고.

나는 곁눈으로 이안의 표정을 재차 살폈다. 다행히 이안은 제 입술과 내 이마의 접촉사고에 대해 별 의미를 두지 않는 듯했다.


“그나저나 광장에는 무슨 일로 나온 거야?”

나는 괜스레 간질거리는 듯한 이마를 매만지며 물었다.


“단장님 심부름으로 나왔습니다.”

“단장님이 너한테 심부름을 시켰다고?”

부관 자리가 공석인 탓에 가브리엘은 종종 로즈벨리아에게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사실 심부름은 핑계에 불과하고, 차기 단장감으로 눈여겨보는 로즈벨리아에게 단장 업무를 파악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로즈벨리아가 없을 때면 다른 기사들에게도 심부름을 맡기긴 했지만…….

왜 하필 신입인 이안에게 시키신 거지?

게다가 단장님이라면 이안이 황자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예.”

“단장님이 왜?”

“그 이유를 저한테 물으시는 겁니까?”

이안은 시키니까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이라는 표정으로 눈썹을 가볍게 들어 올려 보였다.


“아, 그렇지. 별다른 말은 없으셨고?”

“없었습니다.”

원작처럼 데이지를 구해주진 않았지만, 이안은 결국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차하면 데이지와 마주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눈앞이 아찔했다.

이안이 광장까지 나왔다면 왜 원작대로 흘러가지 않았지?


“광장에는 언제 나온 거야?”

“방금 온 겁니다. 단장님이 알려주신 지름길로 왔는데, 나오자마자 선배님이 보이셔서 저도 조금 놀랐습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키었다.

가브리엘이 일러준 지름길이라면 나도 잘 아는 곳이었다.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기사단에서 광장까지 오는 시간이 훨씬 단축된다.

게다가 그 지름길은 아까 데이지와 마주쳤던 장소와는 정 반대편이었다.


“단장님이 뭘 시키셨는데? 내가 처리할 테니 이리 주고 들어가.”

원작은 이미 바뀌었다. 하지만 이안이 늦게라도 광장에 나타난 것처럼, 데이지가 일찍 집으로 가지 않는다면?

이안이 어슬렁거리다 데이지를 만났을 때 혹 어떤 변수가 생기거나…….


“아뇨, 단장님이 제게 맡기신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사고의 흐름이 뚝 끊겼다.

이안이 데이지와 마주치지 않게 해야 하고, 황자 신분이라 심부름과는 거리가 멀 테니 겸사겸사 도와주려고 했더니만.


“그래. 그 말도 일리가 있네.”

“제 말뜻은…….”

“그럼 맡은 임무 충실히 이행해, 신입.”

내가 손을 흔들며 유유히 돌아서자, 이안이 빠르게 내 앞을 막아섰다.


“같이 처리하면 되잖습니까.”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두 사람이 하는 건 시간 낭비잖아.”

“시간 낭비가 아니라, 선배가 후배에게 업무에 대해 알려준다고 생각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한마디도 안 지네.


“나는 혼자 하는 게 편해.”

“혹시 제가 불편하십니까.”

내가? 너를? 불편해한다고?


“아니? 전혀 불편하지 않은데.”

이안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조각 같은 얼굴에 웃음기가 하나 스며들었을 뿐인데, 찰나 눈을 뗄 수 없었다.

원작 남주라서 그런지 잘생기긴 더럽게 잘생겼네.

사실 굳이 따지자면 불편한 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이안과 로즈벨리아는 미래에 서로 죽고 죽이는 상대고…….


“다행입니다. 행여나 제가 대련해달라고 요청한 일을 선배님께서 제가 고백했다고 오해하신 일 때문에 저를 불편해하시는 건 줄 알고…….”

“전혀 아닌데?”

정곡에 콕 찔린 탓에 애써 끌어올린 입매가 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래, 미래 타령은 내가 생각해도 염치가 없었지.

원작 결말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눈앞의 이안은 두렵진 않았다.

원작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이안과 내가 직접 마주한 이안은 확연히 달랐으니까.


“그럼 도와주시죠. 선배님께서는 제가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 하시니까요.”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신입이 혼자서 일 처리를 능숙하게 할 리도 없고, 도움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다른 누구보다 그걸 제일 잘 아시는 분이 단장님인데, 왜 굳이 신입을 시키신 거지?

설마 이안을 눈여겨 보고 계신 건가?


“선배님?”

“좋아.”

이안과 친분을 쌓아서 나쁠 건 없으니까.

나는 이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이안이 태연한 얼굴로 제 손을 내 손바닥 위로 올렸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손을 올리란 뜻 아니었습니까?”

한숨을 작게 내쉰 나는 이안의 손에 완전히 뒤덮인 내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일단 이건 치우고, 단장님께서 너한테 심부름 내용 적어주셨을 거 아냐.”

이안이 그제야 아차 한 얼굴로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여기 있습니다.”

“어디 보자.”

잠깐? 이건…….

이안이 건넨 종이에 쓰인 건 기사단 관련 업무가 아니라 가브리엘의 잡다한 심부름이었다.

이 녀석, 단장님께 밉보이기라도 한 건가?


“왜 그렇게 보십니까?”

나는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저 이안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나마 서점이 가까우니까 여기부터 가자.”

 

*

한창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다시 레스토랑 앞이었다.

지금쯤 식사를 끝마쳤으려나? 아니면 벌써 갔으려나?

내게 흡수된 로즈벨리아의 기억 탓인지 무시하려 해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잠시 멈춰 선 나는 레스토랑을 올려다보았다. 덩달아 제자리에 선 이안이 불쑥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야, 아무것도.”

“배가 고프신 거면 제가 사드리겠습니다.”

“네가? 왜?”

“저와 대련을 해주시지 않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웃음을 터뜨리자, 이안이 나를 응시했다.

집요할 정도로 내 얼굴을 살피는 시선을 감지한 나는 뒤늦게 큼큼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됐어. 배고픈 거 아니…….”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레스토랑 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케이든이었다.

나는 재빠르게 이안의 망토를 붙잡아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왜 숨는 겁니까.”

“잠깐이면 돼.”

“누굽니까?”

“내가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해?”

마치 한숨처럼 흘러나온 말에, 이안이 수긍한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제가 굳이 알 필요는 없죠.”

“이제 됐어. 얼른 가자.”

올리비아까지 올라탄 마차가 멀어지자 나는 이안의 망토를 놓아주었다.

그들을 태운 마차는 분명 떠났는데 어디선가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 소리는 마치 메아리처럼 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기사단으로 복귀하면 되는 겁니까?”

“그래.”

내 말에 이안이 주저 없이 큰길가로 돌아서는 찰나였다. 요란하게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나는 다시 이안의 망토를 잡아챘다.

간발의 차로 이안의 앞에 마차가 지나갔다.


“신입, 여긴 광장 한복판이라 항상 주위를 살피고 조심해야 해. 아까와 같은 불상사가 또 생길 수…….”

너는 또 왜 그러고 있니?

이안은 마치 내 두 팔에 안긴 모양새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체격이 커서 꽤 버겁긴 하지만, 내 팔 안에 몸을 구겨 넣은 모습이 새삼 하찮아 보여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기 이제 괜찮은 거 같은데.”

“저도 동감하는 바입니다.”

동감만 하지 말고, 몸을 바로 세워야 하지 않을까?


“신입, 나 팔 빠질 거 같거든?”

“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까진 없고, 광장은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각별히 주의하도록 해.”

“감사합니다, 선배님. 저를 또 구해주셨네요.”

어느새 몸을 바로 세운 이안이 입매를 살짝 올려 보였다.

왜지? 이안이 마치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슬슬 가자.”

“저 들르고 싶은 곳이 있는데 잠깐 들러도 됩니까?”

“어딘데?”

이안이 눈짓으로 가리킨 곳은 아까 들렀던 잡화점이었다. 가까운 곳이라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잡화점으로 향한 이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가시죠.”

“그래, 이제 기사단으로 복귀하자.”

“잠시만요.”

“왜? 더 들를 곳 있어?”

“아뇨, 이거.”

앞서 걷던 내가 돌아보자 이안이 손바닥에 한 움큼 쥔 무언가를 내밀었다.

낱개로 얇은 종이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었는데, 동그란 모양을 보니 사탕 같기도 했다.


“이거 어디서 난 거야?”

“잡화점에서 사 온 겁니다.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로 단 간식이라고 쓰여 있길래 궁금했거든요.”

내가 한 개를 집어 들자 이안의 손바닥이 내 쪽으로 더 가까워졌다.


“다 선배님 겁니다.”

“네 몫은 따로 있어?”

내 물음에 이안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저는 단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근데 이걸 왜 샀어?”

“……그걸 정말로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이안이 터무니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한쪽 눈썹을 찌푸린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 나한테 주려고 산 거구나.


“혹시 내가 단 거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어?”

로즈벨리아와 나의 공통점 중 하나였다. 단 걸 무지하게 좋아하는 거.


“선배님과 대련을 하고 싶어서 선배님에 대한 정보를 모았었거든요.”

“그럼 단 걸로 회유라도 하지 그랬어.”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이안이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그런 식으로 대련에 응해주실 분이 아니라는 정보도 입수해서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련에 진심이었구나, 너.”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런 감각은 생전 처음이었다고요. 선배님과의 대련이 지금 제 인생의 유일한 기쁨입니다.”

이안이 건넨 사탕을 양손으로 집어, 주머니에 마구잡이로 넣으려던 내가 멈칫했다.

인생의 유일한 기쁨이라니. 그 정도였어?


“어쨌든 고마워, 잘 먹을게.”

“그럼 다음 대련도 잘 부탁드립니다.”

“언제였지?”

“이틀 뒤입니다.”

물어보길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되돌아온 대답에 설핏 웃음이 흘러나왔다.


“뇌물 아닌 줄 알았더니.”

“뇌물은 아닙니다. 이건, 오늘 저를 두 번이나 구해주신 보답이라고 해두죠.”

나는 웃음을 삼킨 채, 사탕 하나를 입안에 쏙 넣었다. 정말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라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찰나 모든 사념을 잊을 정도로 달았다.


“너는 진짜 안 먹을 거야?”

“네. 저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단 건…….”

돌연 말을 멈춘 이안이 미간을 좁힌 채로 건너편을 응시했다.


“왜 그래?”

그의 시선 끝이 닿은 곳을 보니, 한 남자가 나와 이안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잠깐? 저 얼굴은…….

내게도 분명 낯익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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