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아무도 몰랐던, 성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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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아무도 몰랐던, 성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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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아무도 몰랐던, 성녀
2023.04.12.
“무, 무슨 헛소리를……!”
황녀는 얼어붙은 몸을 움직이며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웅웅 울리던 소리 위로 황녀의 고함이 덧씌워졌다.
“당장 끌고 나가요! 저 여자가 더 헛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그러자 소프론 남작 부인은 다급하게 마리아 에텔의 입을 틀어막은 채 문가로 끌어갔다. 황급히 시종들이 문을 열며 부인을 도왔다.
읍, 읍……!
억눌린 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으며 황녀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수백 개의 눈들이 황녀인 자신을 의심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황녀는 애써 파들파들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황제를 향해 고개를 낮췄다.
“……송구합니다. 두 폐하께서 등장하실 때, 이런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다니.”
“크흠……!”
황제가 헛기침을 했다.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더 이상 말은 하지는 않았다.
날아갈 뻔한 마지막 기회를 간신히 잡은 채로 황녀는 뒤를 돌아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에텔 영애한테 힘든 일이 겹치다 보니, 심적으로 많이 불안정한 모양이에요.”
반신반의하는 얼굴들 사이로 묘하게 웃고 있는 대공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그 표정에도 황녀는 아무렇게나 말을 이었다.
“에텔 영애의 근거도 없는 헛소리를,”
“악-!”
그때 갑작스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황녀를 바라보던 모두의 시선이 문가로 쏠리는 순간이었다.
세상에……! 한 귀부인이 끔찍하다는 듯 제 입을 가리며 비명을 참았다.
“……거짓말! 황녀의 말은 모두 거짓이에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제가 연회 때 약혼식을 치르려 했겠……!”
흰 얼굴의 입가에 피가 묻은 채로 고함치는 마리아 에텔과 피가 흐르는 손으로 서둘러 다시 마리아 에텔의 입을 틀어막는 소프론 남작 부인.
열어 둔 문을 통해 소리가 복도까지 울려 퍼졌다.
인형 같은 마리아 에텔의 푸른 눈은 마주치기만 해도 오싹했다.
입이 틀어 막힌 채 읍읍, 소리를 내던 마리아 에텔이 흐느끼듯 웃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될 대로 되라는 듯 웃던 마리아 에텔이 질질 끌려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아스라이 사라졌을 때.
연회장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해졌다.
소름 끼치게 고요한 시선들이 황녀를 향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녀의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숨이 막혀 왔다.
“말도, 말도 안 돼요! 설마 저 허황된 말들을 전부 믿으시는 건 아니죠?”
황녀는 격렬하게 소리를 질렀다.
목청이 높아질수록 가슴을 조이던 압박감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억울함이 머리끝까지 뻗쳐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절단 분들이야 몰라도, 여기 계신 모든 귀족분들은 아시잖아요! 이 자리의 모든 분들이 다 내가 제국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는지 알고 있는데!”
어떻게, 어떻게 저들이 나를 저런 눈으로 볼 수 있단 말이지?
“그래, 작년! 작년 춘궁기!”
황녀는 동의를 구하듯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춘궁기, 그 단어 하나에 귀족들의 시선이 조금 달라졌다.
“작년 춘궁기 때 내가 어떻게 리테일 영지를 복구했는지 모두가 기억하죠?”
아사할 뻔한 수십만 명의 빈민을 구제했던 기적 같은 일. 동시에 저를 그저 제국의 꽃에서 성녀라는 고귀한 자리로 올려 준 완벽한 업적.
“그건, 그렇죠. 황녀 전하께서 수십만 명을 살리신 건 맞으니…….”
“하지만, 혹시나 그 일마저도 정말 마델레이네 공녀가…….”
“쉿. 아직 모를 일이잖아요.”
춘궁기의 이야기에 귀족들 역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등 뒤가 식은땀으로 범벅 되었지만, 황녀는 간절함을 숨기며 당당한 척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제 모든 업적을 올리비아 마델레이네가 했다고 사람들이 알게 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저는 신의를 아는 자입니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 저에게 맹세를 했다.
신의를 안다고 나불대었으니 장부는 처분했겠지. 그러니 이 일이 제 업적이 아니라고 주장할 이는 아무도…….
“그럴 리가.”
귓전을 오싹하게 할 만큼 근사한 목소리가 연회장 위로 내려앉았다.
목소리만으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남자, 비칸데르 대공이 느리게 모두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허공에서 황녀와 그의 시선이 얽히는 동시에 붉은 눈이 위협적으로 웃었다.
“작년 춘궁기 때 황녀 전하께서는 지하 경매장에 계셨을 텐데.”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저 남자가 어떻게……!
비칸데르 대공은 뒤늦게서야 생각났다는 듯 친절하게 덧붙였다.
“르칼르의 목걸이를 구하기 위해, 제법 돈을 쓰셨더라고요.”
“……무슨, 무슨 그런 모함을! 대공, 아무리 전쟁 영웅이라고 해도 나를 이리 모욕할 수는 없습니다.”
황녀는 침착하게 말했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하 경매의 모든 것은 비밀에 부쳐졌다. 아무리 황제 폐하라 할지라도 지하 경매의 민낯을 파헤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저 자신만만한 모습이, 빙그레 웃고 있는 붉은 입술이, 요요하게 번뜩이는 눈빛이 황녀의 숨통을 옭아매었다.
“설마 내가 증거도 없이 말을 꺼냈을까.”
“무슨 증……!”
순간 황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창백하다 못해 숨을 쉬지 못하는 황녀가 비명처럼 소리를 지른 건 그때였다.
“설마 올리비아 그 천박한 년이 장부를, 윽……!”
대공은 비수처럼 날카로운 시선만으로 황녀의 숨통을 졸랐다. 황녀는 체면도 잃은 채 제 목 주위를 더듬거렸다.
“대공! 이게 무슨 짓이야!”
황제의 노성이 멀게 느껴졌다. 어떻게 해도 붉은 눈에 서린 살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송구합니다. 폐하. 화가 나서 말이죠.”
건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이후로 소름 끼치는 살의가 걷혔다. 황녀는 눈물로 번진 시야 너머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눈앞이 선명해질수록 대공의 얼굴이 점점 또렷해졌다. 표정 하나 없는 남자는 공포스럽도록 덤덤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 돼. 제발……! 황녀의 본능이 대공을 향해 구걸했다. 하지만 붉은 입술이 떨어지는 것은 막지 못했다.
“저는 지금에서야 장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거든요. 그것도 황녀 전하가 ‘직접’ 언급한 덕분에.”
잔뜩 팽창했던 정적이 순식간에 터져 버렸다.
“그러면, 정말 이제까지 황녀 전하의 업적은 전부 다 마델레이네 공녀가 했다는……!”
“늘 모든 여름 연회를 그렇게 신경을 쓰셨는데, 왜 하필 마델레이네 공녀가 없는 이번에만 마리아 에텔이 끼어들었는지 의문이 이제야 풀리네요!”
“비칸데르령으로 가지 않으셨다던 카탕타 자작의 말은 어떻고요.”
조롱과 비웃음, 그리고 비난.
황녀는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야, 아니야, 이건 악몽일 거야.”
뇌까리는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흠뻑 젖은 등 뒤가 서늘해졌다. 여유를 잃은 황녀가 황급히 주변의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치는 귀족들은 시선을 피했고, 놀이 친구들은 어느덧 저 멀리로 가 버렸다. 저를 볼 때마다 꼿꼿한 연심을 표하던 기사들마저 굳은 얼굴을 했다.
저를 받쳐 주던 모든 발판이 무너지고 있었다. 죽을 것만 같은 상황 속에서 황녀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제 남은 곳은 황제뿐이었다. 황녀는 넘어질 듯 휘청이는 걸음으로 황제한테 달려갔다.
“아, 아바……!”
“……아무래도 오늘은 티 파티를 하기에는 적격이 아니군.”
황제의 시선이 황녀를 건너뛰었다.
쿵-. 마지막 희망이 진창으로 처박혔다.
입술이 덜덜 떨리는 와중에도 황제의 매끄러운 말이 또렷하게 들렸다.
“사절단을 이리 보내는 게 아쉬울 정도군. 내 배웅을 위해 성대한 만찬을 준비하지. 준비가 필요할 텐데, 사절단은 잠시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 채비할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떻겠소.”
“예. 폐하.”
완고한 축객령에 키월 공작이 깍듯하게 대답했다. 일찌감치 물러날 준비를 한 듯, 그가 사절단 모두를 향해 눈짓했다.
사절단이 아쉬운 듯 황녀를 흘끔거렸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황제는 짧은 숨을 토해 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만찬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지. 태자는 남아 자리를 정리하게.”
“예. 폐하.”
저 말속에서 황녀의 안위를 살피는 이야기는 없었다.
모두가 황제의 퇴장을 향해 예를 갖추는 와중에서도 황녀는 얼어붙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모든 게 가감 없이 드러난 상황의 비참함, 아버지의 외면에 대한 절망감,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수치스러움. 모든 게 하나로 합쳐져서 황녀를 바닥 저 아래로 끌어내렸다.
“황제 폐하께서 정말 바쁘신 모양입니다. 황녀 전하.”
아무도 말을 걸지 않던 순간, 유일하게 들려온 목소리는 대공이었다. 동시에 황녀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기시감이 드는 이 장면은, 분명 제가 했던 말과 같았다.
“공작이 정말 바쁘신 모양이야. 공녀.”
그 말이 번뜩 떠오른 건 황녀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디선가 풋, 가벼운 비웃음이 들려옴과 함께 누군가 말을 덧붙였다.
“황녀 전하께서도 공녀에게 저런 말씀을 하셨던 적이…….”
아니야.
황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엄연히 황제 폐하의 적통이었다. 고귀한 황녀였고, 절대로 버려질 수 없는 귀한 신분이었다.
제가 고작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그것과 비견되는 처지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황녀는 멀거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황제는 저 문을 통해 나갔다. 마지막 기회는 이렇게 끝났다.
어머니는 저를 감싸 주지 않았고, 오라버니는 제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러면, 제가 그토록 까 내리던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와 저 자신이 다를 바가 무엇이란 말일까.
“……아, 하하하.”
모두가 숨을 죽였다. 힘없는 웃음이 느리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실소이던 황녀의 웃음소리가 커다랗게 울리던 그 어느 순간…….
“황녀 전하!”
째지는 목소리와 함께 가냘픈 황녀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모두가 밟고 지나가는, 연회장의 가장 더러운 바닥을 향해서.
.
.
.
“……황녀를 궁으로 모셔라.”
아이고, 전하!
발을 동동 구르던 황녀의 유모가 황녀를 부축해 나갔다. 동시에 제국의 귀족들만 모여 있는 연회장은 다시 한번 조용해졌다.
사절단이 있는 곳에서 추태가 벌어지고, 황녀의 업적이 마델레이네 공녀의 공적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고 황제는 암묵적으로 황녀를 쳐냈다.
이 상황에서 누구의 눈치를 봐야 할까.
어느 순간 엘킨 공작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그 사실도 모른 채 마델레이네 공작과 태자, 그리고 비칸데르 대공을 번갈아 보았다.
싸하게 굳은 연회장이 다시 수런거리기 시작한 것은.
“공작. 잠시 자리를 옮기지.”
마델레이네 공작을 향해 명령하는 태자 때문이었다.
태자는 나간 황녀의 걱정 따위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귀족들을 다독이기는커녕, 오히려 대공이 연회장을 지배할 기회까지 주려 하다니.
“……정말 리테일 영지를 복구한 것이 마델레이네 공녀였단 말이에요?”
물꼬가 터진 마당에, 귀족들이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귀족들은 소름이 끼친다는 얼굴로 이야기를 터놓았다.
“세상에. 저는 여름 연회 이야기를 듣고서는 소름이 끼쳤다니까요!”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요. 마델레이네 공녀가 황녀 전하의 일을 대신한 게.”
“태자 전하와의 약혼이 십일 년이었는데, 설마?”
“세상에. 공녀야말로 성녀셨네요.”
누군가 감탄처럼 한 말에 귀족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다시 한번 혼란이 그들을 덮쳤다.
비천하기 짝이 없는 초록 눈, 외도로 인해 태어난 사생아, 공작 부인을 죽게 만든 요녀.
아무도 티 내지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사교계에 퍼졌던 소문과 실제의 공녀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었다.
그 침묵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을 때서야, 누군가 겨우 한마디를 했다.
“……아무도 몰랐던.”
성녀셨네요.
귀족들은 저희도 모르게 한곳을 바라보았다.
대공은 과연 이것을 알고 공녀를 데려간 걸까. 이 모든 찬사를 독점하기 위해서?
지금 얼마나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태자를 향해 또 어떤 비웃음을 날릴까.
하지만 가슴 떨리며 대공을 바라보았던 귀족들은 잠시 멈칫했다.
예상과 달랐다.
자랑스러워하며 제 아가씨에 대한 찬사를 떠들 줄 알았던 대공은…….
“어떻게 생각하나, 공작.”
짓이기듯 뱉은 말이 서늘했다. 대공은 웃지 못하는 얼굴로 마델레이네 공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공작이 도왔나? 그래서 내 아가씨가 성녀라 칭송받을 만한 이 수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었던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