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가장 높은 곳에서,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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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가장 높은 곳에서,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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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가장 높은 곳에서, 추락
2023.04.09.
금빛으로 꾸며진 화려한 복도.
걸음을 옮길 때마다 유난히 구두 굽 소리가 높게 울렸다. 리베오른 후작 영애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위를 바라보았다.
벽면으로 유려하게 떨어지는 둥근 천장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소리가 울리듯 퍼지는 이 크리스털 연회장은 오케스트라를 부르기에 제격이었다.
다시 말해,
“……저, 황녀 전하. 배웅의 티 파티인데. 괜찮을까요?”
티 파티를 진행하기에는 부적절했고.
염려 섞인 완곡한 말에 앞서가던 황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조마조마한 마음과 달리 황녀는 태연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딱 좋지요. 이래야 소리가 몇 번이고 울리지 않겠어요?”
어리둥절한 표정의 놀이 친구들을 뒤로한 채, 황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드레스를 말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뒤를 따르는 영애가 고작 네 명.
그것도 유모가 회유해서 데려온 거면서 저를 생각하는 척하긴.
늘 티 파티에 입장할 때마다 방 앞에 자신에게 선택받기를 바라던 영애들이 줄을 섰었는데……. 하지만 황녀는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오늘 이후면 다시 돌아올 이들이었다. 연회장 문 앞에 다가가며 황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나팔수까지…….” 하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황녀는 개의치 않았다.
“황녀 전하 입장하십니다.”
나팔 소리와 함께 웅장한 문이 열렸다. 동시에 티 파티의 심상찮은 분위기가 피부 위로 예민하게 느껴졌다.
“황녀. 나는 조금 이따 폐하와 함께 티 파티에 입장할 겁니다. 알겠지만, 배상금 협정 결과로 인해 귀족들의 분위기가 좋지 않을 겁니다.”
어머니의 말이 맞았다.
마치 편이라도 가르듯 귀족들은 분열된 채 서 있었다. 분열된 무리의 주축을 이루는 이는 역시나 마델레이네 공작과 엘킨 공작이었다. 심드렁히 귀족들을 보던 황녀는 예상외의 세 번째 주축을 발견했다.
비칸데르 대공……?
안 올 줄 알았던 사람이 저보다 티 파티에 이르게 도착해 있다니.
지난번 황제의 응접실 앞에서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지나쳤던 대공이 무슨 이유로?
느슨한 대공의 입꼬리가 올라간 건 순간이었다. 그의 붉은 눈은 사람을 홀릴 듯 매혹적으로 빛났다.
마치 무언가 재미난 것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흥. 황녀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이상한 기분을 단번에 지웠다. 그리고 상대하기 싫다는 듯 몸을 돌렸다. 동시에 대공을 에워싼 귀족들이 눈치를 보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때다 싶었는지 황녀한테 몰려든 귀족들이 그를 언급했다.
“협상을 그렇게 망쳤는데 무슨 낯으로 전하의 티 파티에 온 걸까요.”
“그러게 말이에요. 저는 이번에야말로 역대 최고의 배상금이 될 줄 알았는데.”
사정없이 헐뜯는 모양새는 마치 이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싶었다.
헤페르티의 배상금을 기대하던 때의 여유로움은 어디로 갔는지 귀족들은 날카로움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황녀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연회장을 훑어보았다.
화합을 도모하는 티 파티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헤페르티의 사절단은 물론 타국의 사절단들까지 한창 예민한 제국의 귀족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있었다. 티끌 하나 정도의 트집마저도 피하는 모습이었다.
“이 분위기 속에서 사절단이 들고 가는 추문은 어떻게든 마리아 에텔, 그녀 단독의 실책이어야 해요.”
그러려면 우선 사절단을 불러 모아야 했다. 무슨 이야기를 듣든 가장 잘 들리게.
“그러고 보니 오늘로 사절단분들을 뵙는 것도 마지막이네요.”
황녀는 너그러운 얼굴로 사절단을 바라보았다. 빤한 시선에 각국의 사절단 대표는 한 명씩 나와 황녀한테 감사를 표했다.
“황녀 전하께서 배웅 티 파티를 직접 준비하셨다 들었습니다. 이제까지의 환대는 물론, 프란츠에서 묵는 모든 순간의 영광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사절단의 착실한 감사 인사에 귀족들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저렇게 지극한 예의를 표하는데 트집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귀족들도 애써 날카로움을 눌렀다. 대공이 바치는 광물 세율이 대폭 줄어들 수도 있는 상황에서 풍요로운 곡창 지대, 트리스탄의 영주인 황녀의 위엄은 훨씬 크게 느껴졌다.
귀족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황녀는 제게 호의적인 그들의 태도를 재확인했다.
그리고 다행히, 오늘 귀족들에게 가장 적합한 물어뜯을 거리를 준비했다. 자신 대신 모든 추문을 껴안고 추락할 여자.
“마리아 에텔 영애 입장입니다.”
굳이 티 파티 입장에 나팔수를 배치한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마리아 에텔이 입장할 때, 모든 귀족들이 훤히 알 수 있도록.
순식간에 연회장의 분위기가 서늘하게 낮아졌다. 황녀가 의도했던 대로 모두가 입구를 쳐다보았다.
마리아 에텔은 파트너 없이 입장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태자비 궁의 시녀장인 소프론 남작 부인만 대동한 채였다.
안 오겠다고 발악이라도 하면 끌고 오라 명을 내렸는데. 생각보다 선선히 들어오는 모습에 황녀는 비웃음을 삼켰다.
이제야 끈 떨어진 스스로의 처지를 아는 모양인지 그 요란하던 차림새도 오늘따라 단정했다.
가라앉은 베이지색 드레스에 최소한의 보석과 장신구. 옅은 화장에 온화한 척 웃고 있는 얼굴까지.
“……정숙지 못하게 나간 뒤로 처음 보네요.”
하지만 당연하게도 사교계에서 마리아 에텔을 보는 눈은 달갑지 않았다. 둥근 돔형의 천장 아래로 수런거림이 더 크게 울렸다.
“에텔 후작은 아직도 감금 신세라죠? 하여튼 오냐오냐 기를 때부터 알아보았어요. 원.”
비수 같은 말이 들릴 텐데, 마리아 에텔은 얼굴에 띤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제 그녀에게 변변한 뒷배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귀족들은 그 미소가 오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나운 공격에도 불구하고 고고히 웃는 얼굴은 어쩐지…….
귀족들은 순간 드는 생각을 애써 지웠다.
“……뭐, 이제 와서 현숙한 척해 보았자 이미 흐름이야 돌아섰죠.”
“태자 전하께서도 함께 입장하지 않으시는데.”
“어머, 그러고 보니 저 드레스. 꼭 예전의 마델레이네 공녀를 따라 한 것 같지 않나요?”
그리고 그 공격은 먹혔다.
무엇을 들어도 은은하게 웃던 마리아 에텔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을 때, 황녀는 누구보다 진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자리만 바뀐 채,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건가요?”
올리비아의 이야기가 나오자 흠칫한 마리아 에텔이 고개를 숙였다. 황녀는 간절히 바랐다.
마리아 에텔이 미친 듯이 화를 내길, 발악하고 소리를 치며 모두의 적이 되길.
그렇게 사절단 모두의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이길.
마리아 에텔한테 쏟아지는 비난이 점점 커질수록 황녀는 눈을 반짝였다. 곧 벌어질 일을 상상하며 쾌감이 커지던 순간이었다.
“……했던 것을 반복하는 건 제가 아니라, 황녀 전하시죠.”
“뭐?”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서는 혹시 연회의 첫날을 기억하시나요? 그 연회야말로 이전에 했던 요정 콘셉트의 여름 연회와 똑같았는데.”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는 얼굴에는 울음 한 점 없었다.
“그건 영애 그대가……!”
그대가 올리비아의 연회를 따라 한 거잖아!
황녀는 목소리를 높이다 입을 다물었다. 생긋 웃는 마리아의 얼굴이 이상했다.
“네? 제가 뭘요?”
유난히 당당한 모습은 마치 황녀의 실수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뭐지? 뒷배 하나 없이, 가문 자체가 망하기 일보 직전인 마리아 에텔이 미치기라도 한 걸까? 황녀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뻔뻔하게도 마리아 에텔은 주눅 하나 들지 않았다. 편편한 배를 감싸듯 손바닥을 올린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모든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매년 황녀 전하께서는 색다른 연회를 주최하셨는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예전 연회를 똑같이 ‘반복’하셨죠. 왜 그러셨나요, 전하?”
상냥한 물음에 황녀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마리아 에텔은 깔깔 웃음이라도 터트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멍청하게도 짝이 없는 황녀 같으니라고. 제게 일을 맡길 때 이런 일조차 짐작하지 못했던 걸까?
“지금 뭘 믿고……!”
“더 말씀드릴까요? 사실은 황녀 전하께서 따라 하신 게 아니라…….”
황녀의 얼굴이 이제는 새파랗게 변했다.
클라이맥스에서 끊어진 말을 기다리듯 귀족들이 조용해졌을 때, 마리아 에텔은 사랑스럽게 웃으며 황녀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그러니 제 앞에서 올리비아 그 천것의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눈만 커다랗게 뜬 황녀를 바라보며 마리아 에텔은 화사하게 웃었다. 올리비아 그것의 이야기에 잠시 화가 치민 것도 가라앉을 정도로 멍청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싶었는데. 마침 황녀가 좋은 판을 깔아 준 것도 같았다.
마리아는 온화한 얼굴로 웃으며 제 배를 쓰다듬었다.
“……태교에 좋지 않거든요.”
커다란 목소리가 폭탄을 떨어뜨렸다. 둥근 천장 위로 울리는 목소리에 귀족들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태교라니?
그건 황녀도 마찬가지였다. 저 미친 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태교라니, 무슨……!”
“태자 전하 드십니다-!”
그 순간, 나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태자가 등장했다.
느슨한 얼굴로 들어오던 레오포드가 마리아를 보고 얼굴을 굳혔을 때, 마리아 에텔은 누구보다 화사하게 웃으며 그에게 달려갔다.
“그대가 왜 여기에 있지?”
“레오포드, 기뻐해 주세요.”
“…….”
“제가 귀한 황손을 품었습니다.”
말을 하면서 동시에 마리아는 스스로 멍청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 자락, 끊을 수 없는 마음은 레오포드가 기뻐하길 바랐으니까.
“그럴 리가.”
하지만 단박에 나오는 반박에도 마리아 에텔은 더 이상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남자의 허황된 사랑보다 더 단단한 증명이 제 배 안에 있었다.
오히려 지금이 적기였다. 제가 황손을 임신했다는 것을 증명할 순간이.
마리아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궁의를 불러 주세요. 제가 증명…….”
“내 말을 이해 못 했군. 에텔 영애.”
“……네?”
시린 목소리. 그보다 더 차갑게 선을 긋는 호칭.
알고 있었던 것은 머리만이었다는 듯, 마리아의 심장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레오포드의 얼굴이 무심하게 높았다. 저를 바라보는 바다 빛 눈동자가 심해처럼 어둡고 차가웠다.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기운이 부디 살기가 아니길 바랄 때였다.
“설사 그대가 무언가를 품었다 해도.”
연회장을 울리는 목소리가 나직했다. 소름 끼치게 차가운 목소리에 마리아 에텔은 뒷걸음질을 쳤다.
“그 배 안에 정말 귀한 황손이 있다 자신할 수 있냐는 말이야.”
“레, 오포드……!”
가냘픈 목소리가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레오포드가 성가시다는 듯 눈썹 앞머리를 찡그렸다. 마리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레오포드를 마주했다. 무심한 눈동자에 마리아의 모습이 하나도 비치지 않았다.
“나는 그대한테 어떤 것도 주지 않았는데.”
툭 떨어지는 말이 완벽한 선을 그었다.
우리가 나누었던 사랑, 소중한 애정, 다정하고 친밀한 관계, 농후했던 밤들. 그를 위해 비정하게도 아버지를 등졌던 순간.
모든 게 매도되었다.
부정한 여자, 딱 그 정도로.
아아……. 배가 아팠다. 귀가 멍멍하게 울리는 사이, 마리아 에텔은 배를 감싸 안은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연회장의 바닥이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레오포드는 저를 일으키는 대신 마델레이네 공작 쪽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현실이 매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마리아 에텔의 입 밖으로 나간 말은 그저 그녀를 아무 남자와 동침하는 여자로 만들었다.
장밋빛 미래도, 사랑하는 연인도 없는 가운데에서 남아 있는 건 이 배 속의 황손뿐이었다.
아, 그래 황손.
마리아는 어떻게든 배를 감싸 쥐었다. 모든 것은 황손이 태어나면 밝혀질 일이었으니까.
그때였다. 달콤한 향과 함께 누군가 마리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저런, 에텔 영애. 에텔 후작이 그대의 실책에 책임을 지신다고 했는데. 이렇게까지 또 거짓을 꾸며 낼 필요는 없잖아요. 그것도 타국의 사절단이 와 있는데.”
황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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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는 곁눈질을 하며 사절단을 바라보았다. 황녀가 심은 세작들은 착실하게 말을 퍼트리는 중이었다.
“에텔 후작이 지난번의 에텔 영애 일로 책임을 지고…….”
“그 딸인 에텔 영애가 지금 여기에서 이러는 것을 안다면 이번에야말로 후작이 쓰러질지도 모르는데…….”
만족스러웠다. 더없는 쾌감이 황녀를 훑고 지나갔다. 태교라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아찔했는데. 오라버니의 반응에 사절단 또한 마리아 에텔을 정신 나간 여자로 보고 있었다.
황녀는 마리아 에텔을 다독이듯 어깨를 두드리며 일으켰다.
“그래도 그간의 정을 보아, 내가 그대만큼은 꼭 수녀원에 갈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정말 태기가 있으면 연계되어 갈 수 있는 보육원 또한 확실한 곳으로,”
“무슨 소리십니까, 전하. 제 배 속에는 분명 황손이……!”
“황손을 낳고 싶었거든 더 조용히 있었어야지.”
발악하듯 소리치는 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황녀는 자애롭게 웃으며 속삭였다.
“네 태를 빌어 태어났다 소문이라도 나면, 그 아이야말로 네가 가장 경멸했던 사생아밖에 더 되겠어?”
황녀는 코웃음을 치며 파르르 떨리는 마리아 에텔의 어깨를 다정하게 껴안았다. 어느새 달려온 소프론 남작 부인이 함께 마리아 에텔을 일으켜 세웠다.
“뭐, 올리비아 그것이 같은 처지인 것을 가엾이 여겨 제 이름 아래로 들여 황손으로 삼아 주었을지도 모르지.”
“……어떻게, 그런 말을…….”
마리아 에텔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사생아라니, 올리비아의 이름 아래로 들어간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하지만 황녀는 조롱 섞인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황손을 원했다면 황궁에서 함부로 음식을 먹지 말았어야지.”
순간 마리아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레오포드와 만나는 내내 몸가짐을 조심했다. 좋은 것만 먹고, 일찍 자고.
……그러고 보면 제가 황궁에서 묵었던 모든 날의 다음 날이면 호화로운 만찬이 차려지곤 했었다. 거기에 설마……!
“그 정도의 조심성도 없이 감히 황손을 품으려 했어?”
“우,”
우욱.
황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마리아를 밀었다. 구토감이 몰려오는 듯 마리아 에텔은 연신 헛구역질을 해 댔다. 마리아를 받아 든 소프론 남작 부인이 서둘러 그녀를 옮기려 기사들을 불렀다.
“여기, 누가 좀 도와줘요!”
그 모습을 보며 황녀는 기분 좋게 돌아섰다.
기껏 소란을 대비해 모든 소리가 울리게 이 연회장을 선택했는데. 고작해야 울리는 건 헛구역질 소리라니. 하지만 저렇게 품위 없는 모습도 나쁘지는 않았다.
이쯤이면 사절단은 물론 제국의 귀족들에게도 똑똑히 보였으니까.
에텔 후작가와 황가 사이엔 접점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 정도면 황제 폐하께도 면이 설 정도는 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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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지옥이었다.
잘못을 해야 간다던, 무저갱의 가장 어둡고 비천한 밑바닥.
“그럴 리가 없어요. 궁의를, 분명 이 안에는 황손이……!”
“전하의 말이 사실입니다. 영애. 그러니 이쪽으로…….”
소프론 남작 부인은 더듬거리는 마리아의 말을 막았다.
마리아는 손끝으로 제 배를 더듬었다. 이제껏 저를 지탱해 오던 배 속이 매스껍다 못해 지독하게 시렸다. 손에 쥔 희망이 툭, 끊어졌다.
늘 제 옆을 지키고 설 줄 알았던 레오포드는 마델레이네 공작의 옆으로 가 있었다. 영영 닿을 수 없는 간극이 마리아를 진창으로 끌어내렸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을 것 같을 때였다.
마리아 에텔의 흐릿한 시야 너머로 환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황녀였다.
왜? 왜 황녀는 저를 이 지옥 속으로 밀어 넣고 웃고 있을까? 저와 무슨 원수라도 졌다고. 모든 것을 망치게 한 주범인 주제에!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며,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황녀에게 향했다.
그와 동시에 나팔이 성대히 울리며 시종이 크게 외쳤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드십니-.”
“황녀 전하께서는 뭐 그리 잘나셔서 그러십니까?”
시종의 목청마저도 눌러 버릴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였다.
소란의 근원을 찾아 귀족들이 눈을 치켜뜰 새도 없이, 거칠게 소프론 남작 부인을 뿌리친 마리아가 절규하듯 외쳤다.
“귀한 피를 이으셨다는 이유만으로 그 어떤 능력도 없이 남의 노력을 빼앗으시면서요!”
남의 노력을 빼앗으시면서요-, 빼앗으시면서요-, 면서요-.
둥근 지붕에 갇힌 비명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황녀는 온몸에 피가 싹 빠져나간 것처럼 희게 질린 얼굴로 마리아 에텔을 바라보았다.
“여름 연회도 제게 맡기시고, 황녀 궁의 예산 편성도 제게 던져 놓으셨잖아요. 레오포드의 옆에 있고 싶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면서!”
핏발이 선 눈은 마치 악귀 같았다.
함께 지옥으로 떨어지겠다는 듯 처절한 얼굴이 마지막 발악을 외쳤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가 다 했던 일이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