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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 추문을 덮을 더 큰 추문 (93/151)


#093. 추문을 덮을 더 큰 추문
2023.01.18.


아, 어떡해. 에셀라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수십 초가 지났음에도 황후는 언니를 향해 고개를 들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를 갖추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에셀라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저도 모르게 발이 동동 굴러졌다.

하지만 정작 황후는 언니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 장미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천천히 테이블 위 귀부인과 영애 모두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에셀라와도 마찬가지였다. 초조하게 언니를 바라보던 에셀라의 손등 위로 소름이 쫙 끼쳤다.

청초하고 아름다운 황후. 자애로운 제국의 어머니.

하지만 찰나에 마주친 황후의 갈색 눈은 숨통을 틀어막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번뜩이는 눈은 단박에 분위기를 압도했다.


“……황후의 독기에 말라 죽을 정도로 괴로워할 겁니다.”

 
독사. 그것도 잔뜩 독을 품은 뱀.

머릿속을 꿰뚫듯 떠오른 콘라드의 말에 에셀라는 드레스 자락을 꽉 말아 쥐었다. 언니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왔는데 오히려 겁을 먹다니.

고개를 숙인 에셀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붉은 입술 위로 핏빛이 아른거렸다. 다른 귀부인들과 영애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어색하게 웃거나, 아니면 저도 모르게 황후의 시선을 피하거나.

테이블의 분위기를 손에 쥐었다. 황후는 우아하게 웃으며 옆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차양 아래라고는 하나 유난히 더운 날이었다. 열기가 이글거리는 이 더위에서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황후의 인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분이나 지났음에도 예법서에 나올 만큼 완벽한 자세였다.

독하기도 하지.


“어머니. 올리비아, 그 천한 반쪽짜리가 어딘가 달라졌어요.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 없죠. 제까짓 게 저를, 저를 비웃었다니까요.”

 
황후는 가늘게 떨리던 황녀의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비스듬히 올렸다. 과연 태가 달라지긴 했다. 칙칙하고 우중충한 드레스에 보석 하나 없이 다니던 과거가 무색하게 화려한 차림새였다.

하나, 달라졌다 한들 올리비아는 올리비아였다.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수치. 어리석을 만큼 순종적인 공녀. 그리고 늘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반쪽짜리.

얼마든 손아귀에 놓고 주무를 수 있었다. 태자의 옆으로 불러들이고, 폐광산을 되찾고, 종내에는 대공을 비참함에 빠트리고.

그러면 한눈에 보기에도 귀한 저 보석들 역시 대공비로 갈 제 딸의 차지가 될 것이었다.

황후는 매끈한 웃음을 그리며 너그러이 말했다.


“……얼마나 오랜만인지. 내가 잠시 감상에 잠겼네.”

“황공하옵니다.”

올리비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긋하게 웃던 황후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힘들어서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걸까? 찰나에 마주친 공녀의 얼굴은 묘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자리로 가지. 모두가 공녀를 기다리고 있었어.”

황후는 찜찜한 기분을 떨치며 말했다.

선심을 쓰듯 가리킨 자리는 테이블 가장 끝이었다. 서열대로 앉은 테이블에서 상석과는 동떨어진 자리 선정이었다.

늘 올리비아를 위한 자리는 그런 식이었다. 가장 말단, 혹은 의자조차 없이 서 있는 자리.

그리고 올리비아는 단 한 번도 그 자리에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적어도 황후가 아는 한에서는.


“송구하오나, 폐하.”

“응?”

그래서 조용한 목소리가 저를 향했을 때, 황후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탐스러운 장미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굽이치듯 흔들렸다.

올리비아는 ‘송구하다’는 말은 할 줄 알았지만, 반문은 할 줄 모르는 이였으니까.

하지만 고개를 돌린 자리에서 올리비아는 난감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황후의 고운 미간이 천천히 굳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올리비아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부디 저를 ‘영애’라 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뭐?”

“지금의 저는 마델레이네 공작가를 나온 몸으로, 공녀의 호칭을 듣기에 적절치 못한 입장이지 않습니까.”

허공에서 맞닿은 시선이 날카로웠다. 탐색을 하듯 가늘게 휘어진 눈이 올리비아를 훑어 내렸다.

영애라니.

늘 ‘공녀’라는 호칭을 애틋하게 여겼던 반쪽짜리가. 성조차 붙이지 않은 ‘영애’라는 호칭으로 자신을 불러 달라니.


“……엊그제 입장할 때도 성을 쓰지 않고 ‘올리비아’라 하더니. 진짜 마델레이네 공작가와 척이라도 진 걸까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마델레이네 공작가에는 작은 공녀 한 명만 남는 거예요?”

수군거리는 소리가 작은 파동을 일으켰다. 오프템 후작 부인과 리베오른 후작 영애를 비롯해 황녀와 황후의 측근들로 가득한 이곳에 입이 가벼운 이들을 몇 섞어 두었었다.

사교계의 소문을 이용해 올리비아를 몰아붙이려는 계획이었다.

이전 콘셉트를 따라 한 여름 연회, 마리아 에텔의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약혼식,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에게 거절당한 태자에 관한 추문들.

이 모든 추문을 덮을 건 오직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의 추문뿐인데, 올리비아는 이 와중에 처연하게 웃었다.

그리고 절묘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쐐기를 박았다.


“폐하께서도 이런 제 처지를 가엾이 여겨 저를 끝자리로 지정해 주신 게 아니십니까? 저를 공녀라 생각하셨다면 왜…….”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이 황후를 향했다. 누구보다 귀족적이고 황족의 품격을 갖췄다던 황후를 비꼬는 말이었다.

황후는 잠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린 채 눈을 맞췄다.

발톱을 숨기고 있었다니 제법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그 발톱은 스스로를 다치게 만들 테다.

황후가 바로 표정을 바꾸었다. 그리고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에둘러 말했다.


“저런, 어쩐지. 공작의 얼굴이 많이 어두워졌다 싶더니. 귀애하는 고운 딸이 단단히 토라져 나감에 상처를 많이 받았던 모양이야.”

올리비아는 의뭉스럽게 웃었다. 드레스를 말아 쥔 손등이 작게 떨렸지만 다행히 황후는 제 얼굴만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귀애하는 고운 딸이라. 에셀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럴 필요 없는데. 제게 아버지는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이제는 공작을 떠올려도 심장이 저릴 정도로 아프지 않았다.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는 아버지라는 세 음절조차 무심히 넘길 수 있었다.


“고운 딸을 귀애하는 아버지라면, 어젯밤 에텔 후작이 황제 폐하께 사정하던 것을 잠시 본 듯합니다.”

“……기특한 줄로만 알았더니, 퍽 맹랑한 구석이 있었군. 공녀.”

묘하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기세에 황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 표독스러운 눈빛이 번뜩이며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었다.


“저도 몰랐던 구석인데,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단히 새기고 더 가꾸겠습니다.”

 

* * *

향기로운 차향이 가득 퍼지고, 귀부인들은 영애들의 선망 어린 눈빛을 받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텔 후작이 황제 폐하의 궁 앞에서 무릎을 꿇다가 저택에 감금되었다죠?”

“에텔 영애도 함께 있었나요? 제가 알기로는 영애는 태자 전하의 궁으로…….”

“쉬. 그 이야기는 지금은 비밀이에요.”

귀부인은 화들짝 놀라며 황후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황후는 듣지 못한 얼굴이었다.

소리를 죽인 귀부인들이 얼른 다른 말로 넘어가는 사이, 올리비아는 마리아 에텔을 떠올렸다.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

그토록 무너지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직 태자의 비호를 잃지는 않은 모양인데.

참, 눈물겹도록 애틋한 사랑이었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 황후는 고상하게 미소 지으며 손톱으로 찻잔을 두드렸다.

화려하고 날카로운 손톱이 잔을 두드리는 소리가 청명했을 때, 황후의 측근 오프템 후작 부인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여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으니, 동정론은 없을 거예요.”

“후작과 같은 신세가 될 이들도 몇 있어 보이는데요. 뭘. 여식 관리를 어찌하는 건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날 서게 저격을 하는 대상이 마델레이네 공작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올리비아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가장 상석의 황후는 이 분위기와 상관없다는 듯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귀부인들은 입을 맞춰 연극을 하는 것처럼 떠들어 댔다.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황녀 전하께서는 얼마나 현숙하고 성녀처럼 올바른 태도만 보이시나요?”

“모든 이들이 황녀 전하 반절만 따라가도 좋으련만. 에텔 영애만 봐도 그래요. 어쩌면 그렇게 함부로 까불어 댔는지.”

“모범을 보이려 애를 쓰는데. 제가 아직 부족합니다.”

황녀가 고개를 떨구었다. 이제는 영애들이 더 난리를 칠 차례였다. 리베오른 후작 영애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였다.


“전하, 당치도 않습니다. 에텔 영애야 이제 자숙하고 스스로의 행실을 반성하겠죠.”

“뭐, 지금 봐서는 꼭 에텔 영애만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재미있는 소문을 들었는데. 혹시 아시나요?”

은근하게 운을 뗀 황녀가 주변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두가 황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난 헤페르티의 전쟁을 핑계로 기사들과 부적절한 편지를 주고받은 영애도 있다고 합니다.”

헤페르티와의 전쟁. 기사와의 편지.

올리비아는 잠시 눈을 커다랗게 떴다. 모든 표적이 저를 가리키고 있었다.

에드윈한테도 말하지 않은 것들을 황녀가 어떻게 알았을까.

부적절한 편지라니. 편지의 내용조차 모르는 이들이 열심히 제 평판에 흠집을 내려고 안달이었다.

정작 올리비아가 소름이 돋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혹시 황녀는 그 이름 모를 기사가 누군지 알고 있을까.

저와 그 기사의 이야기가 분명했다.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실마리를 잡게 되다니.

설마 이름 모를 기사가 황녀의 편인 것일까. 기뻤던 마음이 순식간에 땅으로 떨어졌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도 전에 귀부인들은 연신 말을 이었다.


“에구머니. 설마 누가 그런 짓을. 약혼자인 기사와 주고받은 게 아닐까요?”

끔찍한 일이라도 일어난 듯 한껏 높아진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제가 말도 안 꺼냈을 겁니다. 분명 알지도 못하는 기사, 그것도 품계나 작위조차 모르는 기사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고 합니다.”

촘촘한 거미줄처럼 보이지 않는 말들이 정교하게 올리비아를 향해 좁혀지기 시작했다.


“원, 몸이 달았어도 유분수지.”

“정말, 망측스럽기 짝이 없군요.”

“그 영애가 누군지는 아세요? 제 딸들과는 마주치지도 못하게 할 거예요.”

“부단장인 오라버니를 핑계로 편지를 보냈다고 파다하던데. 부단장인 젊은 기사라면, 마델레이네 경일까요?”

이제 시작이었다. 이 가벼운 이야기들 속에는 의도를 담은 말들이 가득했다. 모든 귀부인들과 영애들은 올리비아를 힐끔거렸다.

이 상황에서, 황녀는 힐난 어린 미소를 지은 채 올리비아 쪽을 바라보았다.

흠집투성이인 올리비아에게 새로운 추문이 갱신되었다.

안 그래도 일 년간의 유예로 정절을 시험받는 터에 또 다른 의심받을 일이 생긴다면 대공조차도 쉽게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그 후에 새로운 추문들을 매일 추가한 다음 기가 죽은 올리비아를 궁에 들여 백수정 광산을 빼앗고 태자의 옆에 붙여 놓는다.

황녀는 이제야 빙그레 웃으며 황후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어머니의 계획은 완벽했다.

갑자기 짜랑한 웃음소리가 들리지만 않았더라면 그 기분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제게 또 재미있는 소문이 붙었군요.”

“뭐라고요?”

리베오른 영애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듯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올리비아는 일부로 의뭉스레 말했다.


“그래도 이왕 소문이 난다면 하지 않은 일보다는 한 일이 소문 나는 게 덜 억울하니 다행입니다.”

“세상에! 외간 남자와 정말 편지를 주고받았단 말이야?”

“조심해요. 공녀. 그 기사와의 이야기를 알고도 대공 전하의 태도가 똑같을 거라 판단하는 건 아니겠죠?”

올리비아는 가늘게 웃었다. 이런 되지도 않는 말들은 에드윈의 곁에 갈 것도 없이 제 선에서 기각이었다.

호들갑을 떠는 귀족들 사이로 콧대를 높인 황녀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뱀처럼 독살스러운 얼굴이 드러났다. 우월한 기분을 한껏 드러내듯 잔인한 미소.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올리비아 역시 준비한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전하. 저 역시 황녀 전하의 소문에 대한 진위를 여쭙고 싶습니다.”

“……내게, 소문이라니.”

즐겁게 이야기의 흐름을 감상하던 황녀의 위로 날벼락이 떨어졌다. 등허리로 긴장이 스쳐 내려갔다. 나긋하게 웃고 있는 올리비아의 눈은 어젯밤처럼 저를 비웃고 있었다.

어제 당한 망신이 떠올라 화가 치밀 때였다. 담담한 목소리가 올리비아에게서 뻗어 나왔다.


“황녀 전하께서 비칸데르령에 방문하셨다 하신 황제 폐하의 말씀은 사실입니까?”

“……뭐?”

황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모두 비밀리에 이루어진 일들인데 그걸 저것이 알 리가……! 순간 황녀의 머릿속에 연회의 첫날이 떠올랐다.


“연회의 주인인 황녀가 첫 춤을 시작하지. 대공이 함께해 주게. 안 그래도 이번에 황녀를 맞이하느라 수고로웠을 텐데.”

 
맞다. 황제가 모두를 향해 과시하듯 말했다. 당황스러웠던 그때의 기분이 물씬 올라오는 사이, 올리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요 근래 비칸데르 성에서는 손님을 맞은 기억이 없는데. 황제 폐하께서 잘못 알고 계시더군요.”

의뭉스러운 시선들이 황녀를 향했다. 황녀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러는 사이 올리비아의 말이 이어졌다.


“워낙 공사다망하신 터에 제국 온 데를 다니시니. 폐하께서 잘못 아실 만하시죠.”

“말조심하시오. 공녀! 폐하께 그 무슨 무례한!”

오프템 후작 부인이 날카롭게 경고했다. 올리비아는 가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충고 고맙습니다. 부인. 생각해 보니 명민하신 폐하께서 그러실 리 없는데. 그렇다면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황녀 전하께서 다녀오지도 않으신 비칸데르에 방문했다고 하신 거라면, 어떨까요?”

무어라 대답하든 황녀를 골탕 먹이기에 충분했다. 이제야 말의 의도를 알아챈 황녀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져 갔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올리비아는 부드럽게 물었다.


“어느 쪽 소문이 더 마음에 드십니까?”

황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탕-. 테이블을 내려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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