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버린 자리는 돌아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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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 버린 자리는 돌아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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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 버린 자리는 돌아보지 않는다
2023.01.15.
레오포드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비꼬는 기색이나 미련 하나 없는 말간 얼굴이라니.
꽉 다문 잇새로 언뜻 쇠의 비린 맛이 풍겼다. 레오포드는 턱에서 힘을 빼는 것조차 잊은 채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낯선 기분이 점점 그에게로 밀려왔다.
아니다. 아닐 거다. 레오포드는 애써 제 불안한 생각을 부정했다. 먼저, 올리비아에게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까.
“……나도 그 말을 안 했네요. 약혼을 축하합니다, 전하.”
오로지 올리비아와 저만 있던 순간을 깨고 느른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하. 레오포드는 시큰한 숨을 뱉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충격을 받은 듯 커다래졌던 눈이 금세 새파란 날을 세우며 대공을 마주했다.
조금 전까지는 시야에서 비껴 나 있던 놈이 존재감을 형형히 드러냈다.
대공은 감히 올리비아의 옆자리가 제 것인 양 에스코트를 한 팔을 더 가까이 밀착하며 도발하듯 레오포드를 바라보았다.
레오포드는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성마른 분노가 올라오며, 낯선 공포는 밀려났다.
그녀의 옆은 저를 위해 준비된 자리였다. 개 따위가 넘볼 게 아니었다.
“……약혼이라니.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그대가 잘 알 텐데. 올리비아.”
사나운 숨이 새어 나가지 못한 채 심장 아래에서 까맣게 타들어 갔지만 상관없었다.
초조함을 억누르며 레오포드는 애써 달콤하게 웃었다. 그리고 올리비아를 향해 한쪽 손을 내밀었다.
“그 정도로 오기 부렸으면 됐어. 올리비아.”
올리비아의 얼굴에 설핏 웃음이 어렸다 사라졌다.
담담하던 표정이 깨진 후에 나온 웃음이 더없이 유혹적이었다. 레오포드는 홀린 듯이 다시 한번 올리비아를 향해 말했다.
“유예니 뭐니 집어치우고, 내 궁으로 들어와. 태자비 방을 준비해 두라 명했어.”
“…….”
“예전부터 늘 바랐던 방이잖아.”
올리비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를 바라보는 초록 눈이 이제야 조금 낯익었다. 항상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 저를 사랑해 주던 눈.
희미한 고양감이 차올랐다. 레오포드의 잘생긴 입매가 안심하듯 올라갔다.
그 얼굴을 마주하며, 올리비아는 에스코트를 하던 대공을 뒤로한 채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잠시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손을 뻗던 대공이 가만히 팔을 내렸다.
“전하께서는 정말, 모르시는 게 없으시군요. 제가 그 방을 바랐던 것까지.”
“그럼. 그대의 일인데.”
“그러면 전하께서는, 제게 무엇을 바라시나요?”
지고한 태자가 바라는 것. 레오포드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들이 얽혔다. 하지만 입술 새로 바로 튀어나오는 말은 단 하나였다.
“……그대가 다시 내 옆으로 돌아오길 바랐어. 리브.”
레오포드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스스로 내뱉은 말의 파동이 서서히 심장을 뒤흔들었다. 물안개가 퍼지듯 뿌옇던 머리가 깨끗하게 갠 느낌이었다.
그래. 그거였다.
태자비 궁이 아닌 태자 궁으로 부르려던 이유도, 유예 따위를 짜증스러워했던 것도, 아까 마리아의 약혼 발표를 무마하려 연회장을 둘러보다 말문이 막혔던 것도.
어쩌면. 제가 올리비아에게 조금이나마 애정을 품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곁에 두고 싶은 게 아닐까.
돌연 올리비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밤하늘을 가르는 낭랑한 웃음소리에 레오포드는 더 이상 생각을 잇지 못하고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제게 다시 허울뿐인 약혼녀 자리를 하사하시면, 전하께서 그토록 사랑하는 에텔 영애는 다시 정부가 되는 걸까요?”
“……말조심해. 리브.”
금세 잘생긴 미간이 구겨졌다. 달콤한 꿀을 바른 듯했던 목소리가 경고 조로 돌아왔다. 올리비아는 피식 웃었다. 태자는 변한 게 없다. 어떻게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제게 예의가 없을까.
“저는 전하께, 정말 존중받지 못했군요.”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올리비아……!”
당황한 듯 레오포드의 음성이 날카로워졌다. 올리비아는 그 형형한 눈을 곧게 마주 보며 말했다.
“애칭을 부르지 말라고 말씀드렸어요. 또한 여기 계신 대공 전하와 약혼을 할 예정이라 말씀드렸고요. 그런데 저보고 이제야 다시 돌아오라고요? 어디로요?”
“그대는, 내 약혼녀잖아!”
분노에 찬 목소리가 배짱을 부리듯 외쳤다. 올리비아는 대답 대신 가늘게 웃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듯 레오포드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설마 아직도. 제가 자신을 사랑하리라 믿었던 걸까?
어리석고, 또 어리석어서 가엾기까지 한 마리아 에텔. 마리아 에텔은 지금 이 상황을 알고 있기나 할까?
“겨우 그 정도로 굳건한 약혼을 저버릴 만큼 그대의 사랑이란 게 그렇게 얄팍했나? 날……!”
입술을 달싹이는 그 얼굴은 어딘가 공포에 질린 것 같기도, 또 오기가 가득한 것 같기도 했다. 결국 레오포드는 한참이나 올리비아를 바라보다 말했다.
“날 사랑하잖아……!”
최후통첩 같은 말을 한 레오포드의 눈이 점점 간절해졌다. 마치 예전의 올리비아가 레오포드를 바라보던 것처럼.
그래서 올리비아는 비칸데르로 떠난 이후, 처음으로 태자를 향해 다정하게 웃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달콤하게 대답했다.
“앞으로 영원히.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자신의 말이 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 될지 올리비아가 가장 잘 알았다.
바다 빛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럴 리 없다는 시선이 올리비아의 얼굴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한 점 흔들림 없이 웃었다.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내가 그대를 바라볼 때마다, 나를 사랑한다는 표정을 지었으면서.”
“그것조차 아셨는데. 왜 전하는 당신의 이름으로 제게 꽃이 오는 것조차 모르셨나요?”
“꽃이라니. 설마, 그때 내게 꽃 이야기를 한 게…….”
올리비아는 빙그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답이 된 듯 레오포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 그렇지. 감히 제가 누구를 동정하려 든 걸까.
마리아 에텔은 절대 동정받을 짓은 하지 않는다. 이 어리석은 선택이야말로 마리아 에텔이 그토록 바라는 것이었을 테다.
올리비아는 가만히 손을 내렸다. 누군가 잡아 주기를 바랐던 손은 꼼지락거리기도 전에, 이제 다정한 온기가 단단하게 맞잡아 준다.
“……저는 전하께서 하셨던 모든 말씀을 기억합니다.”
“…….”
“에텔 영애한테 얼마나 절절하게 사랑을 말씀하셨는지도요.”
“올리비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꽉 쥔 주먹이 볼품없이 떨리는 것 같았다. 레오포드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아렸다. 입 밖으로 나가는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눈앞의 올리비아는 우아하게 웃었다.
“그러니 감히 말씀드리건대.”
더없이 예쁘고.
“이제 와서 제가 옆에 있기를 바라 왔다,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한없이 단단하게.
제게 약혼을 깨겠다 선언하던 때 그랬던 것처럼.
이제야 움튼 마음이 서서히 자각을 시작하기도 전에 꺾였다.
난생처음으로 느끼는 무력감에 레오포드는 입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는 상황에서 바라보는 올리비아는 지독하게 예뻤다.
우아하게 휜 입술과 달리 초록색 눈은 차갑게 식은 채 레오포드를 향해 경고했다.
“만에 하나라도, 전하께서 제게 다른 마음을 품으신다 해도 그조차 밝히지 마세요.”
“…….”
“그리고 부디.”
“…….”
“제가 그 자리를 버리고 나왔을 때, 그때의 제 마지막 모습이 전하께 드리는 대답이라 생각해 주세요.”
처음으로 이상함을 느꼈던 올리비아의 뒷모습. 제가 품었어야 했던 건 의아함이 아니라, 위기감이었어야 했다.
레오포드의 얼굴이 점점 무너져 내렸다.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지는 레오포드의 속내를 무심히 바라보며, 올리비아는 제가 한 말을 되새겼다.
버린 자리 따위는 돌아보지 않는다. 처음으로 그에게 뒷모습을 보이고 나오던 날 다짐했었다.
위태롭던 걸음을 옮길 때 손을 잡아 준 이는 지금 제 옆에 있었다. 십수 년 동안 바랐던 감정을 한순간의 시선만으로도 충족시켜 주는, 그래서 더 최선을 다하고 싶은. 에드윈.
“제국의 달. 그 드높은 자리에…….”
제가 버린 자리에는,
“……이미 전하께서 애정하시는 에텔 영애가 있군요.”
그토록 그 자리를 탐하던 마리아 에텔이 앉으면 될 일이었다. 고층의 창문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마리아 에텔의 얼굴이 유독 또렷하게 보였다.
저를 진심으로 원망하는 그 푸른 눈.
올리비아는 미련 없이 시선을 떼었다.
어느새 사방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회가 중반으로 치달아 가는데 귀족들은 모두 나와서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통제가 되지 않는 여름 연회라니. 그 앞에 선 황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에드윈의 에스코트가 유려하게 이어졌다. 올리비아는 걸음을 옮기며 여상하게 중얼거렸다.
“……예전에는 이렇게 귀족들이 웅성대면 걱정부터 몰려왔어요.”
아, 사교계 단속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내일 또 황후 폐하께서 부르시겠구나. 아버지, 아니. 공작님한테 또 혼이 나겠구나.
제가 통제했어야 하는 수많은 일들을 떠올리며 올리비아는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제는 좋네요. 아니, 오히려 내일이 기대돼요.”
누가 수습을 하든, 제 일이 아니었으니까.
올리비아는 짐짓 배짱을 부리듯 몸을 뒤로 빼며 거들먹거렸다. 짓궂은 미소가 걸린 얼굴이 지독하게 사랑스러웠다.
“저희 혼인은 아직도 한참 남았지만, 이 정도면 예비 대공비로서의 자질은 제법이지 않나요?”
거드름을 피우듯 능글맞은 목소리에 에드윈은 앓는 소리를 삼켰다. 그리고 아주 조금 욕심을 부려 드러난 어깨를 끌어안았다.
“차고 넘치다 못해 지금이라도 당장 혼례를 올려야 마땅할 정도죠.”
올리비아가 환하게 웃었다. 그녀를 뒤에서 바라보는 레오포드의 무너지는 표정 따위는 신경 쓸 바 아니었다.
* * *
“이게 무슨 망신이야!”
벼락같은 진노가 황제궁의 응접실을 뒤흔들었다.
닫힌 문틈으로도 새어 나오는 노성에 복도에 서 있던 시종들까지 지레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
그 노여움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황녀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몸을 숙였다.
늘 기품을 지키도록 교육을 받아 왔지만,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건 황제에 대한 공포뿐이 아니었다.
어떻게, 올리비아가. 그 천한 게. 제 오라버니를 거부하다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잠시 화를 식히러 나갔을 뿐인데, 미처 통제하지 못한 새 연회의 모든 귀족들이 그 꼴을 보았다. 올리비아를 꼼짝 못 하게 할 줄 알았던 오라버니가 도리어 참패라도 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다니.
보다 못한 황후가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는 듯 말했다.
“폐하. 고정하세요.”
“고정? 이게 고정으로 될 일이야?”
벌컥 화를 낸 황제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에텔 후작에게 죄를 물어 감금하고, 그 딸을 빨리 다른 곳으로 결혼시킨다 하더라도 이미 타국의 사절단이 이 우스운 꼴을 봤다.
장차 황제가 될 태자의 앞길과 사교계에서 황녀의 위치, 그리고 프란츠 제국 전체가 우스꽝스러워 보였을 거다.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타국의 사절단도 방문하는 연회를 이따위로 만들어! 늘 하던 대로만 했으면 되었을 텐데!”
순간 황녀의 몸이 긴장으로 바싹 굳었다. 불안한 예감에 황제는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내일부터는 당장 어떻게 할 계획이야!”
“그, 그게.”
어쩔 줄 몰라 하는 황녀의 얼굴이 황제의 예민한 촉을 건드렸다. 설마. 하지만 황제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녀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일을 해결했다.
누군가의 손을 빌렸다는 생각은 억측이었다.
당장 황녀를 몰아붙이는 건 이득이 없었다. 황제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 황녀를 외면하며 말했다.
“내일 연회부터는 황후가 담당해.”
“예?”
“폐하!”
경악한 황녀가 커다랗게 외쳤지만 황제는 씨근덕대는 숨을 겨우 참으며 쳐다도 보지 않았다.
시기를 맞추듯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장이 들어왔다.
“엘킨 공작이 알현을 청하고 있습니다.”
“……들어오라 하게. 황후는 황녀와 함께 물러가고. 이번 연회 이후에 황녀는 근신을 명할 테니 행동거지 늘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것이야.”
지엄한 명이 떨어졌다.
세상이 무너진 듯 황녀의 몸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
.
.
“……후작은.”
“저택에 감금해 두었습니다. 영애 역시 같이하고 싶었으나…….”
엘킨 공작은 난처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황제는 눈앞에 불이 튀기는 것 같았다.
이 프란츠를 욕보인 그 맹랑한 계집이 지금 태자의 안온한 궁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니.
심지어 오늘로서 두 번이나 태자를 거절한 공녀는 대공저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갔다고 했다.
“허.”
황제가 허탈한 숨을 뱉었다. 생각의 흐름은 자연스레 제 아들을 비난했다. 치기 어린 나이라고는 하나, 제 위치를 생각해야지.
공개적인 장소에서 계집 따위를 통제하지 못해 타국의 망신을 두 번이나 사다니.
“마델레이네 공작은 무엇을 하기에 오지도 않아!”
짜증이 다른 곳으로 튀었다. 마델레이네 공작이 딸 관리만 잘했어도 이런 망신 자체가 없었을 텐데. 엘킨 공작은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이 망신을 쇄신해야 했다.
순간 황제의 눈이 번뜩였다.
약혼식으로 문제가 불거졌으니, 이걸 덮을 것은 더 큰 약혼식뿐이었다.
“내일.”
황제가 탁하게 말했다.
“연회 전, 황실의 저녁 식사에 대공을 초대하지.”
아직 백수정 광산이 있었다. 마지막 남은 목줄이야말로 이럴 때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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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저, 정말 폐하께서 모든 걸 아시게 되면 어떻게 하죠? 올리비아 그게, 오라버니를 거절한 걸 모두가 봤어요!”
황후 궁의 응접실.
애처로이 눈물을 흘리던 황녀가 결국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흐느끼는 울음소리와 함께 어룽거리던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후는 가빠지는 숨을 참지 못했다.
제 자랑스러운 아들과 딸에게 이런 망신이라니. 제 가문과는 연결점이 없을 거라는 오라버니의 말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에텔 후작과 마리아 에텔 그 둘 다 가만두지 않으리라. 핏빛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분노는 제 아들을 거절한 올리비아한테까지 향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선뜩한 분노가 입술 새로 터져 나왔다.
모두가 있는 곳에서 천대를 받아야 할 건 올리비아 그것이었다. 황후는 제 분노를 꾹 누르며 시녀장을 향해 말했다.
“아직 비칸데르령으로 보낸 사람은 소식이 없는가?”
“송구합니다. 폐하. 그쪽의 소식은 없지만 대신…….”
황망한 얼굴로 답변한 시녀장이 황후를 향해 몸을 기울인 채 귀엣말을 했다. 날 선 얼굴로 그 말을 듣던 황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게 정말인가?”
“예. 분명 공녀의 담당 하녀가 공녀가 가명까지 써 가며 외간 남자와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 * *
올리비아의 예측대로였다.
언론은 막았지만 사교계의 입은 막을 수 없었다. 다음 날부터 제도의 대공저에 티 파티 초대장이 왔다.
정중한 편지의 이면에는 두 번이나 태자를 거절한 ‘마델레이네 공녀’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귀족들의 호기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모든 편지를 다 거절했지만, 단 하나. 거절할 수 없었던 편지가 있었다.
황후에게서 온 티 파티 초대장. 모두에게 똑같이 보냈을 편지 하단에 올리비아한테만 보내는 추신이 적혀 있었다.
- 마델레이네의 작은 공녀도 참석하니 공녀 역시 참석을 하면 좋겠군.
에셀라를 인질로 잡겠다는 빤한 수였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한 번은 넘어가 보기로 했다.
타고 있던 마차가 완전히 멈췄다. 올리비아는 마차 바깥을 내다보았다. 늘 올리비아가 단장을 해 왔던 황녀의 궁은 어딘가 어수선한 느낌으로 올리비아를 맞이했다.
문득 조금 전에 헤어진 에드윈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가지 않아도 돼요. 올리비아.”
그 말 한마디가 오히려 더 든든했다는 걸, 에드윈은 알까. 올리비아는 피식 웃으며 마차의 열린 문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기다렸다는 듯 시종이 안내를 했다. 응접실 문 앞에서 시종이 안을 향해 소리쳤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공녀 도착했습니다.”
문이 열리자 화려한 응접실, 이미 도착한 귀부인들과 영애들이 긴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상석 가까이 앉은 에셀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올리비아가 올 줄 몰랐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가장 위쪽, 상석에 앉은 아름다운 황후가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인사를 하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야. 공녀.”
황후의 화사한 목소리가 뱀처럼 서늘했다. 올리비아는 가만히 황후를 바라보았다.
우아한 눈매 속 웃지 않는 눈 아래에서 늘 움츠렸던 올리비아는 가만히 숨을 한 번 참았다. 그리고 완벽한 예법을 갖추며 말했다.
“제국의 달께 영광을.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