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 여섯 살 올리비아, 스무 살 올리비아.
(75/151)
075. 여섯 살 올리비아, 스무 살 올리비아.
(75/151)
#075. 여섯 살 올리비아, 스무 살 올리비아.
2022.11.16.
콘라드는 황급히 다음 장을 넘겼다.
- 식사 예절이 우아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입맛이 떨어진다고 했다. 절대로 그러지 말아야지. 계속 생각하자. 올리비아. 실수하지 말고 계속 최선을 다하자.
다음 장도, 그다음 장도. 내용은 비슷했다. 가족들의 타박에 스스로를 타박하는 내용이 전부였다.
콘라드의 이름도 여러 번 나왔다. 저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던 일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나면 뒤따르는 말은 똑같았다.
- 절대로 그러지 말자. 올리비아. 실수하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자.
콘라드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똑같은 공책이 다섯 권이나 있는데. 그렇다면 모든 내용이 다 이런 식일까.
“무슨…….”
콘라드는 저도 모르게 일기장을 손에서 놓쳤다. 책상에 떨어진 일기가 휘리릭 넘어가며 첫 장이 펼쳐졌다. 글자 군데군데가 번진 이 글씨는 형편없이 삐뚤거렸다. 하지만 차마 콘라드는 이 글씨를 못났다 할 수 없었다.
- 어쩌면, 내가 이곳에 온 것 자체가,
그다음에 적힌 문장이 호흡처럼 자연스레 눈에 박혔기 때문이다.
- 써서라도 외우면 된다. 콘라드 오라버니가 그랬다. 써서 외우면 된다고. 올리비아, 넌 할 수 있어.
콘라드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저는 단 한 번도 올리비아한테 이런 식으로 고운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는 늘 화를 내며 욕을 했고, 자라면서는 무시를 했는데.
흐릿한 잔상처럼 조그마한 여자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악을 쓰는 목소리 하나가 귓가에 사무치게 울려 퍼졌다.
“너 때문이야! 못 알아듣겠으면 써서라도 외우라고! 너 때문이니까! 눈에 띄지 말고 찌그러져 살라고!”
기억 속 목소리가 커질수록 콘라드의 눈이 커다래졌다. 손이 벌벌 떨렸다.
생각났다.
열둘, 고래고래 악을 쓰며 올리비아를 원망했던 제 모습이.
“……죄송해요. 오라버니.”
그리고 여섯. 그 악을 듣고 가만히 고개를 숙였던 올리비아의 모습이. 그 퀭한 눈이 저를 마주했을 때.
콘라드는 잠시 숨을 참았다.
평생을 미워했던 재앙.
제 어머니를 죽게 만들고 이 집안을 삭막하게 만들었던 죄악.
미처 잊고 있었다.
그때 올리비아는 겨우, 여섯 살이었다.
이렇게 삐뚤빼뚤한 글씨를 쓰는 여섯 살.
저를 그토록 동경 어린 눈으로 따라다니던 조그마한 여자아이. 갈망하는 초록 눈으로 연신 가족을 따르던 아이.
어찌할 줄 모르는 콘라드의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도망치고 싶은 것처럼 계속 다른 곳을 바라보던 콘라드는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하필, 시선을 돌린 곳이 침대 머리맡. 그곳에 있는 건 작은 토끼 인형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주인이 귀하게 여긴 것 같은 토끼 인형.
그건 어린 시절, 제이드가 에셀라에게 선물한 토끼 인형과 크기만 달랐다.
에셀라는 이미 인형을 버린 지 몇 년이 되었다는 사실이 떠오르는 동시에 몸서리치도록 지독한 감정이 그에게로 밀려왔다.
이제껏 외면했던 만큼, 더 날카롭게.
* * *
대공과 아가씨의 제도행이 결정된 뒤. 대공성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오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 이렇게 갑자기 제도로 가시다니……!”
급하게 짐을 꾸리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막 아가씨한테 맹세를 마친 기사들은 물론, 안면을 익힌 가신들과 시녀들, 하다못해 하인들까지 모일 때마다 아쉬운 속내를 이야기했다.
“그것도 내일 새벽에 조용히 가신다잖아. 세상에. 배웅조차 하지 못하게 하시다니.”
그건 떠나기 전날의 늦은 저녁에도 마찬가지였다.
발코니의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서운함 가득한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마지막으로 짐을 확인하던 베서니도 놀란 얼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둘러 시녀 한 명이 발코니 문을 닫으러 통창으로 걸어갔다. 그사이에도 대화가 빠르게 이어졌다.
“하여튼 황궁이 문제야. 무슨 연회를 한다고 바쁘신 아가씨 쉬지도 못하시게.”
“맞아. 이제 겨우 예니브 거리 일 끝내시고 한숨 돌리셨는데.”
“설마 황궁에서 아가씨께 돌아오라 하신 건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칼터 경이 초대장 드렸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 황궁에서 온 걸 아가씨께 드렸단 말이야?”
마치 황궁에서 온 게 독극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질겁하는 목소리였다.
야,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옆에서 타박하는 말과 동시에 시녀가 문을 닫았다.
뒤돌아선 시녀가 멋쩍게 웃었다.
“다들 아가씨께서 제도에 가시는 게 너무 아쉬운 모양이에요.”
“맞아요. 저희도 정말 배웅해 드리고 싶은데.”
슬그머니 시녀 한 명이 서운한 속내를 내비쳤다. 그 말에 다른 시녀들도 동의한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아가씨는 웃기만 할 뿐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이른 새벽, 한창 바쁠 사용인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잘 알았지만 그렇다고 아쉬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배웅 대신 돌아올 때 환영을 두 배로 해 드리면 되지.”
베서니가 대수롭지 않게 좋은 해결책을 제시했다. 두 배의 환영이라니. 시녀들의 눈이 다시 반짝거리는 사이, 베서니가 올리비아 앞으로 다가왔다.
베서니의 잔소리가 다시 시작되리란 것은 그녀의 걸음만 보고도 알았다.
“배웅은 차치하고, 아가씨. 제도는 늘 경계해도 모자람이 없다는 제 말은 꼭 새겨들으셔야 해요. 아무리 바쁘셔도 식사는 꼭 한 접시 다 마치셔야 하고요. 제가 소벨한테도 편지했으니…….”
“연회 갈 때 보석들 모두 착용하는 것도 단단히 새겨들었어요. 베서니.”
벌써 스무 번도 더 들은 말이었다. 이제는 줄줄 외는 말에도 베서니는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으며 방에 있는 모두를 살펴보았다. 제가 제도로 간다고 선언했을 때, 바뀔 잠자리부터 걱정해 주던 사람들이었다.
“보고 싶을 거예요.”
진심이었다. 대공저로 가도 소벨이며 해나에 마사까지. 반가운 얼굴을 만나겠지만. 이 비칸데르는 항상 보고 싶을 거였다.
아쉬운 얼굴을 하던 베서니가 다가와 올리비아를 꼭 껴안았다.
“빠르게 오시는 게 가장 좋겠지만…….”
베서니는 잠시간 침묵하다 이어 말했다.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편지 주세요. 제가 금방 날아갈게요.”
올리비아는 마주 안은 그녀를 보고 활짝 웃었다.
덕분에 올리비아는 몰랐다.
베서니의 말을 들은 시녀들이 동시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는 것을.
선대 대공비가 세상을 떠난 뒤, 단 한 번도 비칸데르령 바깥으로 나간 적 없는 베서니의 말이 얼마나 큰 결심이었는지도 말이다.
.
.
.
칠흑처럼 어두운 새벽이었다.
대공성 앞에 줄지어 있던 마차 행렬이 출발하기 시작했다. 차마 명을 어길 수 없는 사용인들은 현관 대신 각자의 방에서 불을 켜고 마차 행렬을 배웅했다.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불이 켜진 대공성.
앞장선 마차 안, 올리비아는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배웅하지 말라니까. 다정한 저들이 이렇게 바로 그리워질 줄 알았다. 지난번 대공저를 떠날 때도 지금처럼 마음이 울렁거렸으니까.
여름 연회라면 못해도 약 이 주는 이어질 거였다. 오가는 시간까지 한다면 넉넉잡아 한 달.
날짜로 환산하니 생각보다 더 긴 시간이었다.
대공성을 바라보는 올리비아의 눈이 아주 조금 젖어 들었다. 대공성의 안팎을 나누는 성문에 다다른 마차가 잠시 멈춰 섰다.
평소 같으면 멈추지 않고 바로 나갔을 텐데, 오늘따라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어떻게.”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자 올리비아는 피식 웃었다.
“다시 마차를 돌릴까요?”
에드윈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저 속에 담긴 게 혹시나 하는 염려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부러 눈을 곱게 흘기며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절대 안 되죠. 꼬박 하루 동안 짐을 한 달 치를 쌌는데.”
“난 또. 올리비아가 너무 애틋하게 대공성을 보는 바람에 착각할 뻔했지 뭐예요. 그런 눈으로 봐 줘야 할 나는 여기 있는데.”
나른한 목소리가 올리비아의 마음을 툭, 건드렸다. 올리비아는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카드를 쓸 시간도 없었으니까.”
“누구한테요?”
“그야…….”
올리비아는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 대공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시 앞을 바라보았을 때.
와-.
성문이 열리는 동시에 어둠 위로 작은 불빛들이 어룽거렸다. 이 컴컴한 새벽에 무슨 빛이지, 하며 눈을 깜빡이던 올리비아가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작은 불을 든 사람들이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서 있었다.
마차가 느리게 출발했다.
“실수했어요, 올리비아. 대공성의 사람들한테만 배웅하지 말라고 했다면서요.”
“……하지만, 지금은 너무 이른 새벽인데.”
믿을 수 없었다. 불빛에 사람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는 순간,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웃음과 한숨이 섞인 에드윈의 목소리는 앓는 듯 중얼거렸다.
“설마,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몰랐다면 이제는 좀 알아줘요. 이 비칸데르가 당신을 얼마나 소중히 사랑하고 있는지.”
지독하게도 달콤한 기대가 충족되었다.
꾹꾹 눌러 담으려 해도 와르르 쏟아진 행복이 사라지지 않고 올리비아의 곁에 남아 있었다.
저를 배웅하는 대공성의 환한 불빛과 길거리에 선 어린아이들부터 어른들, 심지어는 초록 눈의 사람들까지.
도로 양옆에 선 사람들은 환하게 웃으며 마차를, 정확히는 올리비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심장이 이렇게 빠르게 뛰어도 되는 걸까. 손끝이 떨려서 손을 마주 잡았다.
“잘 다녀오세요, 아가씨.”
조용하던 거리 위로 앳된 목소리 하나가 던져지자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에서 참았던 배웅들이 쏟아졌다.
“빨리 다시 돌아오셔야 해요!”
“다시 오셔서 저희 가게에도 꼭 놀러 오셔야 해요!”
새벽의 적막이 깨진 비칸데르는 처음 올리비아를 환영하던 때처럼 활기찼다.
어느 순간부터 바깥을 향해 쉴 새 없이 손을 흔들던 올리비아는 비칸데르령의 경계 성벽에 다다랐을 때에서야 작게 웅얼거렸다.
온 감각을 올리비아한테 집중하고 있던 에드윈은 그 작은 두 음절이 ‘카드’라는 것을 알아듣고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러다 이내 울음 섞인 투정에 웃음을 터트렸다.
“안 쓰길 잘했어요. 이 많은 비칸데르 사람들한테 언제 다 써요.”
* * *
결국 마차가 비칸데르령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해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였다.
“잘 다녀오세요!”
성벽 위로 울리는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창문 바깥으로 몸을 빼려다가 화들짝 놀랐다.
“아무리 아쉬워도 마차 바깥으로 넘어가는 건 위험해요.”
귓가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고혹적이었다.
“잡아 줄 거였잖아요. 에드윈이.”
“알고 그런 거예요?”
“모르지는 않죠.”
퍽 기분 좋은 듯 에드윈의 눈매가 나른하게 풀어졌다. 올리비아는어깨를 으쓱이다 푸스스 웃었다.
“왜요?”
“재밌잖아요. 넘어질 것 같으면 잡아 줄 거라 믿고, 길 잃으면 찾으러 와 줄 거라고 강하게 확신이 들고. 이건 꼭…….”
엄마, 같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가 한없이 믿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에드윈은 이제 제게 정말 엄마와 비슷하게 커다란 존재였다.
문득 든 생각에 올리비아는 잠시 발목에 매어 둔 실 발찌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바쁘게 일을 진행하느라 에드윈한테 실 발찌를 선물하지 못했다.
그녀의 생각을 꿰뚫으며 에드윈이 올리비아의 말을 따라 했다.
“꼭, 뭐요?”
“……베서니 같달까요? 조금 더 있다가는…….”
제 잠자리까지 고쳐 주시겠어요.
농담조로 덧붙이려던 말이 어쩐지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아서, 올리비아는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올리비아를 바라보던 에드윈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뭐 하긴. 나도 가끔 올리비아가 데뷔탕트를 앞둔 소녀처럼 느껴질 때가 있죠.”
“와…….”
올리비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장난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볼에 입을 맞추고 껴안고, 심지어 손목에 입술까지 찍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올리비아는 이 장난 같은 도발에 홀린 듯 넘어갔다.
“어딜 봐서 저를 그리 어리게 보셨을까요? 이리 어엿한 스무 살을?”
“그야.”
볼멘소리에 다정하게 웃던 에드윈의 눈빛이 한순간 짙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내가 이럴 때마다 토끼 눈이 되어서 그런 것 같은데?”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쿵쿵-. 심장이 툭 떨어졌다 다시 하늘로 솟구치기를 반복했다. 눈앞이 아득하게 흐려졌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눈앞의 에드윈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