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4.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의 빈자리 (74/151)


#074.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의 빈자리
2022.11.13.



 
마리아 에텔이 종잇장처럼 휘청였다. 황녀의 유모인 루하스 남작 부인이 마리아 에텔을 단단히 잡아 몸을 세웠다.

순순히 휘둘리는 꼴이 꼭 제 뜻대로 움직일 인형처럼 보여, 황녀는 단단히 맺힌 앙금이 조금 풀어졌다.


“궁금했어요. 내 부름을 무시하고 나를 곤혹스레 만든 이가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나긋한 목소리에 마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그렁그렁한 눈이 점점 초점을 찾는 것을 보며 황녀는 한쪽 입매를 올렸다.


“여전히 참으로 어여쁘네요.”

인형처럼 예쁜 얼굴, 찬란한 금발. 눈물에 젖어 애처로운 분위기까지.

딱 제 오라비가 좋아하게끔 사랑스러웠다.

저 작은 머리통이 생각이라는 걸 할 줄만 알았어도 저도 퍽 예쁘다 아꼈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런 주변머리는 없는 모양이었다. 황녀가 우아한 얼굴로 덧붙였다.


“……오라버니의 비호를 받느라 나를 보러 올 시간도 없을 만큼.”

내뱉는 목소리가 칼날처럼 서늘했다. 황녀는 서리보다 매서운 눈으로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눈치가 있다면 엎드려 빌 것이었다.

겁에 질렸다면 울음을 터트릴 테고.

아직까지는 마냥 예쁘기만 한 얼굴을 보자 다시 화가 울컥 치밀었다. 황녀는 애써 웃음을 유지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리아 에텔이 올 때만 해도 가만두지 않겠다 이를 악물었지만,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지 않고 귀담아들은 유모의 조언은 제법 쓸모 있었다.


“당장 마리아 에텔을 불러와요! 이번에는 내 정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조금 전, 티 파티를 끝내고 응접실로 돌아왔을 때였다. 갖은 화를 내며 물건을 집어 던지자, 유모는 황녀의 발치로 다가와 그녀를 달랬다.


“고정하십시오. 전하. 어찌 되었든 일 년간은 전하의 수족처럼 일을 도울 영애입니다. 귀하신 황녀 전하께서 겨우 정부 따위를 신경 쓰실 게 무어 있,”

 
빠르게 말하던 루하스 부인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나. 황망한 얼굴로 중얼거린 유모가 면목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못, 못 들은 걸로 해 주시옵소서. 전하. 제가 불경한 말을 했습니다.”

 
정부.

차마 입 밖으로 내기 부끄러운 단어였다. 동시에 황녀는 암암리에 귀부인들이 마리아 에텔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득의양양한 얼굴로 사교계를 사로잡는 태자의 연인. 하지만 인정받을 수 없는 정부.

하. 황녀는 시린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못 들은 척 눈을 깜빡였다.


“유모가 무슨 말을 했나요?”


“……감사합니다. 전하. 이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에텔 영애에게도 뉘우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한 번 다독여 주는 아량으로 마음의 빚을 지울 수 있다면 전하께 오히려 득이 되는 일입니다.”

 
……물론 에셀라 마델레이네에게 치욕을 당한 만큼 호되게 혼을 내 준 다음의 일이었지만.

완벽하게 계산을 마친 황녀가 짐짓 너그러운 얼굴을 할 때였다.


“제게, 이러고도 괜찮으실 거라 생각하십니까? 전하.”

악을 쓰듯 내지르는 말이 방자했다. 황녀는 저도 모르게 한 박자 말을 늦췄다.


“……지금 뭐라고.”

“제가 황녀 전하를 위해 어떻게 했는데, 저를 이리 대하시는 겁니까?”

앙칼진 외침에 유모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얼른 마리아 에텔을 말리려는 몸짓에 황녀는 손을 들어 올렸다.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표독스레 뜬 눈은 조금 전의 사랑스러움 따위는 가져다 버린 듯싶었다. 지금 마리아 에텔은 황녀의 앞에 있다는 것도 잊은 모양새였다.


“영애가 무슨 노력을 했죠?”

속에서 천불이 끓는 와중에 진심으로 궁금했다. 정말 무슨 노력을 하긴 한 걸까?

마리아 에텔은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소리를 지르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긴 황녀 궁이었고, 저를 붙잡고 있는 자는 황녀의 유모였다. 겨우 남작 부인. 마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유모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황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티 파티를 준비하고, 전하를 대신해 여름 연회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앞서.”

“…….”

“저는 에텔가의 적녀이자 태자 전하의 약혼녀입니다. 앞으로 태자비가 될 사람이란 말입니다!”

공표하듯 내뱉는 말에 황녀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제야 마리아는 제 페이스를 찾고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제 말대로였다. 저는 곧 태자비가 되어 제국의 달로 추앙받을 이였다. 그런데 겨우 타국으로 혼인을 갈 황녀 따위가 저를 이리 대해?

새파란 눈에 불꽃이 튀었다. 온몸이 저리고 얼굴이 따끔거렸다. 조금 전의 치욕이 생생했다.

마리아는 황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황녀 전하께 좋은 친구가 되고자 왔는데 이리 대해 주시니 심히 서운할 따름입니다.”

“……나야말로 그대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자 했는데 심히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군요.”

“저와 친구가 되고 싶으셨다니 유감입니다만, 세상 어디에도 친구를 이리 대하시는 분은 황녀 전하밖에 없으실 겁니다.”

“영애!”

옆에 있던 루하스 남작 부인이 황급히 저를 불렀지만, 마리아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이미 엘킨 공작님이 황후 폐하께 말씀드려 두기로 한 것조차 듣지 못한 황녀에게 연회에서 진행할 제 약혼식은 굳이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마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저릿한 몸에 힘을 주어 예를 갖췄다.


“……연회 때 뵙겠습니다. 전하.”

이번에도 황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마리아는 알아서 몸을 일으켜 문 앞으로 다가갔다. 기척을 느꼈을 텐데 문이 열리지 않아 마리아가 카랑카랑하게 소리를 쳤다.


“시녀들이 무엇을 하기에 문도 안 열어!”

“저런 방자한……!”

유모가 뒤늦게 분통을 터트렸다. 하지만 마리아 에텔은 응접실을 나간 뒤였다. 문 앞에 선 시녀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유모는 애꿎은 시녀들한테 소리를 쳤다.


“절대로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문 열지 말라고 했는데!”

“죄송합니다, 남작 부인. 바깥에서 들으니 그 목소리가 그 목소리 같아서.”

시녀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두꺼운 문 뒤로 들리는 목소리는 그게 그거였으니까. 유모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촌극 같은 상황이 펼쳐지는 동안 황녀는 가만히 찻잔을 들었다.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셨지만 끓는 속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황녀는 눈을 선뜩하게 떴다. 힘을 준 손에 피가 통하지 않았다.

이거야 원, 버릇을 가르치겠다며 부른 마리아 에텔한테 한 방 먹은 셈이 되었다. 기를 단단히 꺾었어야 했는데 제가 먼저 아량을 베푼 게 실수였다.

오라버니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오만한 영애를 약혼녀 자리에 내세웠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일 년짜리라도 차라리 저렇게 막무가내인 영애보다는 올리비아 그 천 것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름에 황녀는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핏줄이 천해서 그렇지 올리비아는 제가 인사를 받지 않을 때도 예를 갖춘 자세에서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제 폐광산을 그리 강탈하지만 않았어도 더 좋은 점수를 줄 텐데. 분노에 홧홧하게 눈을 불태우던 황녀가 순간 반색했다.

아니지. 어차피 올리비아가 다시 오라버니의 약혼녀로 오면 될 일이었다. 일 년간의 유예고 뭐고, 빨리 이번 여름 연회 때 올리비아가 다시 돌아오게끔 조치를 취해야 했다.

제 여름 연회에 손상이 가는 건 이번 연회로 끝이어야 했으니까.


“저, 전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루하스 남작 부인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조금 전까지 분노로 파르르 떨던 황녀의 얼굴이 묘하게 차분해 보이는 게 무서웠다.

마리아 에텔을 단죄하는 게 계획대로 되지 않았는데. 무슨 생각이실까. 잠시 그 속내를 짐작하려던 찰나였다.


“황후 폐하를 뵈어야겠어요. 먼저 연락을 넣어 주세요.”

황후 폐하라니. 그 말에 루하스 남작 부인의 얼굴도 밝아졌다. 황후 폐하라면 분명 마리아 에텔은 물론 황녀의 불편한 마음까지 능히 어루만져 주실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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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나간 마리아 에텔은 마차 앞에서야 자신의 유모를 발견했다. 유모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마리아한테 뛰어왔다.


“아이고머니! 아가씨! 왜 이러고 나오신대요?”

이제껏 부축도 못 받았던 몸이 무너지듯 유모에게로 쓰러졌다. 간신히 마차에 탄 뒤에야 마리아는 사납게 외쳤다.


“태자 전하를 뵈러 가자!”

이 수모를 모두 레오포드한테 말할 예정이었다. 이 말을 듣는다면 다정한 레오포드는 저를 위로하며 황녀를 단죄할 것이었다. 상상만으로도 욱신거리는 몸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태자궁에 도착했을 때.


“전하께서는 지금 출타 중이십니다.”

시종장의 보고에 마리아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아이고 아가씨! 옆에서 유모가 호들갑을 떨며 시종장한테 사정했다.


“시종장님. 우리 아가씨 잠시 휴식을 취하셔야 하는데 어디로든 좀 안내해 주세요.”

“응접실로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영애.”

“응접실이라니!”

거슬리는 단어에 마리아가 벌컥 화를 내었다. 태자궁은 제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훤했다. 늘 레오포드의 방에서 휴식을 했는데 갑자기 응접실이라니!

시종장이 재빠르게 마리아한테 속삭였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영애. 영애의 위신을 위함이니 오늘은 응접실로 가시지요.”

마리아는 씨근덕거리는 숨소리를 겨우 진정시켰다. 보는 눈이라고는 고작 유모 한 명 늘었는데!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시종장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정식 약혼도 안 한 사이에 방까지 오가는 게 밝혀지는 건 제게 좋은 소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순순히 따라간 응접실에서 마리아는 한 번 더 성을 내야 했다.


“세상에! 전하의 의원조차 내가 못 본단 말입니까?”

“약혼 관계에서는 작은 일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황족만이 볼 수 있는 의원이라면 차라리 안 보시는 게 나을 겁니다.”

복도로 나온 시종장은 잠시 응접실 문을 바라보았다.

열흘 붉은 꽃 없다더니. 요즘 들어 태자 전하의 태도가 예사롭지 않은 것을 마리아 에텔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 궁에 와서 아직도 제가 최고인 양 의기양양하지.

하지만 노련한 시종장이라면 모름지기 한쪽에만 베팅하는 법은 없었다.

시종장은 시종을 불러 넌지시 말했다.


“티아제 궁으로 가서 하지스 백작께 말씀드리렴. 에텔 영애가 와 있다고.”

그리고 같은 시간, 티아제 궁의 동편 복도.

겨우 멈춘 태자의 행보에 맞춰 소프론 남작 부인은 욱신거리는 발목에 휴식을 부여했다.

갑자기 티아제 궁에 방문한 태자는 이 궁의 모든 곳을 파악하기라도 할 것처럼 세세히 궁 전체를 살폈다.

……마치. 공녀가 이 궁을 떠나던 마지막 날처럼.

다른 거라고는 궁을 살피며 희미하게 웃던 공녀와 달리 지금 태자는 양미간을 무섭도록 찌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화려한 화병과 흐드러지게 핀 연분홍색 리시안셔스를 바라보는 태자의 바다 빛 눈이 사나웠다.

이 분위기를 아는지, 급히 달려온 보좌관 하지스 백작도 잠시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전하.”

“…….”

“에텔 영애가 궁에서 전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부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 펼쳐진 허망한 기적은 여기까지일까? 하지만 곧바로 제 궁으로 돌아갈 것 같은 태자는 발걸음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궁의 모습이 형편없군.”

“예? 아니, 송구합니다. 전하.”

예상 밖의 말에 부인은 허둥댔다. 지금 궁의 모습은 모두 마리아 에텔 영애의 취향이었다. 그걸 알 텐데. 저런 말을 하는 것은……!


“예전으로 돌려놓게. 부인.”

“……예!”

소프론 남작 부인의 대답이 한 박자 늦었지만, 레오포드는 그걸 지적할 기력조차 남지 않았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궁의 복도를 바라보았다.


“우선. 이 꽃부터 치우고.”

이 엉망인 궁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야 했다. 그래야, 다시 제가 이곳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궁의 주인이 돌아오겠지.

레오포드는 밖으로 나섰다. 어느새 남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티아제 궁의 지붕이 시린 은빛으로 선명하게 빛났다.

이 궁을 떠나간 궁의 진정한 주인을 기리듯.

* * *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응접실.

늦은 밤까지 장부를 살피던 콘라드는 문득 어음의 빈 부분을 보고 탁한 한숨을 내뱉었다.

집중도 되지 않는데, 아예 빈 부분이라니. 모든 게 다 저를 골탕 먹이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여름 연회에 헤페르티 사절단을 초대하는 태자나, 그것을 보고 넘기는 외무대신까지도.

콘라드는 고개를 저으며 제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제 방의 책장 그 어디에서도 어음 대금 처리를 확인할 수 있는 서류는 없었다.

모두가 잠에 든 시각. 난감한 콘라드의 머릿속에 문득 제이드의 말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장부는 올리비아 방 ……쪽 서랍에 있다고 했어.”

 
이 모든 장부들을 다 올리비아 방에서 가져왔다고 했었지. 꺼림칙했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있으면 날이 샜고, 그러면 출근할 시간이었으니까.

콘라드는 묘하게 수런대는 마음을 꺼림칙하다는 단어로 대체하며 올리비아 방문 앞에 섰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단 한 번도 자의로 들어와 본 적 없는 방문을 열려니 망설여졌다. 주인 없는 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콘라드는 무심코 노크를 했다. 당연하게도 응답이 없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불을 켰을 때, 콘라드는 저도 모르게 쯔, 혀를 찼다. 에셀라의 방과는 전혀 달랐다. 따뜻하고 포근한 에셀라 방의 분위기와 달리 올리비아의 방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개인적인 추억이 담긴 물건보다는 값어치 있고 정갈한 가구들과 최소한의 물건들만 가득한 곳.

꼭 올리비아 그 애를 닮았다고 생각한 콘라드는 서둘러 책상으로 갔다.

하나만 있는 줄 알았던 서랍은 책상의 양쪽에 있었다. 낭패였다. 어느 쪽 서랍인지 고민하던 콘라드는 결국 오른쪽 서랍을 열었다.

다행히 서랍 안쪽에 다섯 권의 두꺼운 공책이 있었다. 얼핏 보아도 보통의 장부와는 모양이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외양 정도는 다를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콘라드는 아무렇게나 중간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콘라드는 번개에 맞은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떴다. 공책에 적힌 건 이제 막 글쓰기를 시작한 듯 서툰 글씨였다.


 
- 오늘은 경망스럽게 에셀라를 불렀다. 절대로 귀족답지 않은 태도이니 꼭 고치라고 들었다.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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