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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빙의자는 다 계획이 있다 (5/20)


5. 빙의자는 다 계획이 있다
2023.06.15.


‘그, 그래도 상황은 나쁘지 않아.’

나는 애써 긍정회로를 빙빙 돌렸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비록 짜릿한 흑역사를 새로 적립하기는 했어도, 어쨌든 아스페이런을 멈춰 세우겠다는 목표는 달성했지 않은가?

이제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아스페이런의 곁에 찰싹 달라붙을 방법을 찾을 차례였다.

‘어떻게 하지?’

아스페이런의 옆에 붙어 있으려면 신하로 들어가는 게 가장 좋은데, 그렇다고 다짜고짜 신하로 받아달라며 매달리면 십중팔구 수상해 보일 것이다.

게다가 아스페이런에게 있어서 지금 내 인상은 최악.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호감도부터 올려야 해.’

다행히 나는 아스페이런의 이상형은 몰라도 그가 좋아하는 신하 타입 정도는 확실하게 꿰고 있었다.

우리 워커홀릭 군주님은 스스로 생각하고 알아서 척척 잘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했다.

그 부분을 공략하자. 마침, 좋은 소재도 있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얼굴 근육을 한 번 푼 뒤 입을 열었다.

“추태를 보여 송구합니다, 로아킨의 군주이시여. 반드시 드려야 할 말씀이 있어 마음이 조급해 그랬습니다.”

열심히 목소리를 내리깔고 책에서 봤던 예스러운 말투를 최대한 꾸며냈다. 심각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내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스페이런이 왼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관심을 보였다.

“반드시 해야 할 말이라.”

좋아. 이제 내가 가지고 있는 패를 슬쩍 꺼내서 보여주자.

“군주님, 혹시 그란시아에서 인간 제물이 바쳐졌다는 증거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흐음.”

아스페이런의 얼굴에 미약한 흥미가 깃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최근, 그란시아의 황제폐하께서 인간 제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간이 비대해진 괘씸한 놈들이 아직도 몰래몰래 인간 제물을 바치는데, 좀처럼 증거를 잡을 수 없다죠.”

긴장이 슬슬 풀리고 있었다. 나는 술술 입을 놀렸다.

“그리고 조금 전, 군주님께서 그란시아의 황제 폐하의 존함을 아주 친근하게 부르시는 걸 들었습니다. 덕분에 두 분께서 무척 절친한 관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사실 <운바합>을 보고 아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둘러대었다.

“그래서 군주님께서 그란시아의 황제 폐하께 도움을 주고 싶어 하시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제게서 증언을 받아내려고도 하셨고요.”

율리시스는 아스페이런에게 단 한 명 남은 소중한 가족이다. 그런 율리시스의 고민은 곧, 아스페이런의 고민이나 마찬가지.

때문에 아스페이런에게는 분명 인간 제물을 바쳤다는 증거가 필요할 것이다.

나는 확답을 받기 위해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니 군주님, 인간 제물을 바쳤다는 증거가 필요하신 게 맞으시지요?”

그리고 내 확신대로, 아스페이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한번 구경해볼까. 그 증거가 뭔지.”

됐다!

나는 당장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허리께를 더듬었다. 그런데…… 없다. 잡히는 게 없었다.

‘헉!’

기겁하며 내려다보니 내가 입은 옷은 붉은색 드레스가 아니라 흰색의 심플한 원피스였다. 누가 갈아입혔나 보구나.

나는 허둥지둥 루멜에게 물었다.

“저, 혹시 제가 입고 있던 옷에 말린 허브가 들어있는 주머니들이 달려 있지 않았나요?”

“……아! 있었어요! 잠시만요.”

루멜이 곧바로 포푸리 여섯 개를 가져다주었다. 다행히 모두 멀쩡했다.

나는 그것을 아스페이런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제가 말한 증거입니다.”

“이것이?”

“네. 제가 제물로 바쳐지기 직전에 이것과 똑같이 생긴 주머니 여러 개를 만들어서 유통시켰는데요.”

나는 씨익 웃었다.

“그 안에 ‘부렌 자작가의 막내아들이 인간 제물을 바쳤다’라는 내용의 고발장이 들어 있습니다.”

“!”

그랬다. 내가 포푸리를 만든 이유는 사실 한 가지가 더 있었다.

포푸리 안에 숨겨둔 고발장. 이는 빅시르 부렌과 마을 사람들을 확실히 끝장내기 위해 준비한 밑밥이었다.

“문이 열린 곳은 부렌 자작령의 소소리 마을입니다. 그 마을 이장의 손녀인 밀라라는 아이에게 포푸리를 건네주었는데, 욕심이 많은 아이니 진즉에 팔아치웠을 겁니다. 지금쯤이면 근방에 널리 퍼졌겠죠.”

“흠. 고발장이라.”

흥미롭게 듣던 아스페이런이 제 턱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 정도로는 증거라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에이, 왜 모르는 척하시나.

“하지만 부렌 자작령을 수색할 명분은 되겠지요.”

빅시르 부렌이 나불댔던 말에 의하면, 지금까지 율리시스는 제물을 바쳤다는 심증은 있어도 물증이 없어 제대로 된 수색조차 하지 했던 모양이다.

영주가 문을 걸어 닫고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면 마땅한 명분이 있지 않는 이상 억지로 밀고 들어갈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괜히 다른 귀족들의 반발심까지 사기 십상이니까.

하지만 고발장이 있다면?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핑계로 황제가 친히 나설 수 있게 된다.

그 후에는 똑똑한 아스와 율리가 알아서 판을 짜겠지. 유도 신문을 통해 근방 주민들에게 증거를 얻는다거나 해서.

아스페이런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인지, 냉랭하게 경직되어 있던 그의 얼굴 근육이 아주 미세하게 풀렸다.

그가 일전보다 약간 더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곧 죽을 상황에 용케도 그런 꾀를 냈군.”

“저를 마지막으로 그런 끔찍한 일을 겪는 사람이 더는 없기를 바랐으니까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능한 데다가 범죄까지 저지른 부렌 일가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하는 이유가 더 컸지만, 이 또한 거짓말은 아니었기에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아스페이런이 한 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무서운 얼굴이다.

‘비, 비웃음……? 인가?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나 괜한 걱정이었다. 왜냐하면.

“너, 이름이 뭐냐.”

“!!”

그 뒤에 아스페이런이 내게 이름을 물었으니까.

세상에, 이름을 묻다니!

관심이 없으면 이름은커녕 존재조차 기억하지 않는 그 아스페이런이, 직접! 몸소!

이건 물구나무서서 봐도 내게 긍정적인 호기심이 생겼다는 뜻이 아닌가!

‘성공이다!’

아스페이런의 이상적인 신하상(像)을 공략하겠다는 작전이 완벽하게 적중했다!

나는 속으로 만세 삼창을 부르며 춤을 췄다.

'여윽시 진노란~ 우리 아스의 남바완 오타쿠~. 아스페이런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아는 갓노란님, 만세!'

그리고 싱글벙글 웃으며 당장 이름을 대려 했으나,

……생각해보니 말할 이름이 없었다. 여기서 ‘진노란’이라는 이질적이기 짝이 없는 이름을 댈 수도 없고.

결국 나는, ‘이 몸’의 원래 주인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저어,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이 없다?”

“예. 그것이…….”

그렇게 이름 없는 여자의 기구한 사연이 줄줄 이어졌다. 기억 상실증, 마을에서의 취급, 제물로 바쳐지게 된 과정까지.

길지 않은 이야기를 모두 끝내자, 아스페이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알았다. 그럼 루멜.”

“예, 군주님.”

“이 여자를 귀히 돌봐 주거라. 필요한 게 있다 하면 들어주고. 그녀는 소중한 증인이니, 그에 맞게 대우해야 마땅하겠지.”

“명 받들겠습니다.”

루멜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아스페이런이 나를 보았다.

“일단 여기에 머물고 있거라. 네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이 판명 나면, 그때는 네게 상을 내리마.”

“네!”

다시 한번 비웃음 같은 무서운 미소를 지은 아스페이런이 그대로 방을 나섰다.

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당분간은, 이곳에 붙어있을 수 있게 됐다.


 
나흘 뒤, 로아킨 군주의 집무실.

“율리시스 님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보랏빛이 도는 잿빛 머리칼을 옆으로 땋아 내린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가 편지 한 통이 올려진 트레이를 아스페이런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이름은 키아라 고르도. 아스페이런의 수석 보좌관이었다.

아스페이런이 편지를 집어 들자 키아라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 증인의 말이 전부 맞았습니다. 부렌 령을 비롯한 주변 영지 몇 곳에서 고발장이 담긴 포푸리가 총 52개 발견되었다더군요.”

“52개?”

“굉장하네요!”

아스페이런의 뒤에 서 있던 짙은 적갈색 머리칼에 기사 제복을 입은 남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감탄했다.

그는 로아킨 군주 근위대의 총대장인 카니스였다.

“혼자서 그걸 어떻게 다 만들었을까요? 게다가 곧 죽을 상황에서요. 의지가 정말 대단합니다.”

“확실히.”

아스페이런이 가볍게 긍정했다. 흔치 않은 반응에 키아라와 카니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군주님께서 생각 이상으로 그 증인을 좋게 보신 모양인데?’

라는 속마음이 담긴 시선이 두 사람의 사이에서 빠르게 오갔다.

자신의 최측근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아스페이런은 심드렁한 얼굴로 편지를 뜯었다.

율리시스의 친필 편지에는 간단한 안부 인사와 함께 그가 고발장을 이용해 어떻게 부렌 가를 무너뜨렸는지에 대한 내용이 간략하게 적혀있었다.

첫 번째 장을 빠르게 훑은 아스페이런이 중얼거렸다.

“고발장이 도움이 되었나 보군.”

“예. 고발장 덕분에 늦지 않게 수색에 착수하여 문이 열렸다가 강제로 닫혔다는 증거를 찾아냈다고 합니다. 제물 의식이 벌어진 소소리 마을을 비롯한 인근 마을의 주민들을 회유해 증언도 얻어냈다고 하고요.”

키아라의 부가적인 설명을 들으며 아스페이런은 편지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제물의식을 주도한 부렌 가의 막내아들과 알고 있었음에도 묵인한 가주는 참수하여 머리를 성문에 걸어놓고, 다른 직계와 방계, 가신들은 재산 몰수에 귀족 작위 박탈이라…….”

“그리고 소소리 마을의 주민들은 가담한 정도와 자발적인 증언 여부에 따라 최대 사형, 최소 10년의 노역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강하게 나갔군.”

아스페이런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편지를 다시 원래대로 접어 트레이에 올려두었다.

인간 제물을 바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강한 본보기를 보였으니, 이제 더 이상 율리시스의 심기를 거스르는 놈은 없을 터.

사건 종료였다.

“율리시스 님께서 아주 기뻐하셨겠습니다.”

“그래.”

너무 기쁜 나머지, 죽고 못 사는 제 부인에게 철썩 들러붙어서 열심히 꼬리나 흔들고 있겠지.

자신의 앞에서 율리시스가 종종 보였던 꼴값을 떠올리며 아스페이런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아스페이런에게 키아라가 물었다.

“그럼, 그 증인은 이제 어떻게 할까요? 돌려보내시겠습니까?”

그 말에 아스페이런의 손이 멈칫했다.

돌려보낸다, 라.

아스페이런은 지금쯤 병실에서 뒹굴 거리고 있을 여자를 떠올렸다.

작은 체구, 동그란 머리와 턱 부근에서 달랑거리는 짧은 연갈색 머리카락. 발간 홍조가 번진 흰 뺨과 천진해 보이는 둥근 눈매.

그리고 당돌하게 고개를 들어 올릴 때마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밝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그 이름 없는 여자.

율리시스의 편지에는 여자를 그란시아로 보내 주면 자신이 직접 상을 내리겠다고 적혀 있었다.

율리시스가 포상을 부족하게 하지는 않을 테니, 분명 앞으로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겠지.

게다가 여자는 본래 엘바스 사람이다. 그러니 몸이 회복되는 대로 돌려보내라 말하면 되는 일인데.

왜인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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