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만났다
(4/20)
4. 만났다
(4/20)
4. 만났다
2023.06.11.
“고귀한 희생? 영웅? 집어치워! 자기들 살자고 가장 만만하고 힘없는 사람을 죽음으로 떠밀어 놓고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아니! 당신들은 그냥 이기적인 살인자일 뿐이야!”
“저, 저게!”
“너희 모두 천벌 받을 거다! 받지 않으면 내가 받게 만들겠어! 복수! 복수할 것이다!”
마을 이장이 분을 못 이겨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게 보였다. 빅시르 부렌은 아직도 제 중심을 부여잡은 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게다가 넋이 달아난 표정으로 멍청히 나만 올려다보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까지…….
좋아, 이제 밤에 두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다.
좀 더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태산 같았으나 빛기둥의 노란빛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만 가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따스한 빛이 몸을 감싼다. 웅성대는 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이윽고, 암전이다.
가장 먼저 깨어난 것은 청각.
평소보다 둔하게 반응하는 귀가 보글보글거리는 소리를 간신히 잡아챘다. 그것을 시작으로 온몸의 감각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코에 스미는 씁쓸한 풀의 향기, 온 몸을 덮은 묵직함, 피부에서 느껴지는 따스함, 그리고……
“이거, 깬 모양인데.”
그리고, 사람의 말소리.
‘사람?’
나는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을 뜬 직후 마주했다.
미의 신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어둠만을 모아 정성껏 빚어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남자를.
‘……오우.’
애초에 사람은 맞아? 사실 나 괴수들 입에 치즈처럼 집어 넣어져서 그대로 천국까지 직배송된 것 아냐?
심장 박동이 급격히 빨라졌다.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그때 갑자기 남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눈 조각상처럼 하얗고 섬세한 얼굴이 코끝이 비벼질 정도의 거리까지 성큼 다가온다.
그 탓에 남자의 검푸른색 머리칼이 시야를 가려서, 어쩐지 어두운 밤하늘이 품속으로 쏟아지고 있는 것만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남자는 그 상태로 잠시 멈춰 있다가, 다시 상체를 바로 했다.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내 코를 움켜쥐었다.
“켁.”
내 입에서 볼품없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남자가 곧바로 손을 치웠다. 그러자 언제 참았는지도 모를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서, 나는 뒤늦게 내가 숨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 도와준 건가?’
그런 거라면 고맙긴 한데, 그래도 사람 코를 다짜고짜 쥐어뜯는 건 너무하지 않나. 나는 숨을 헐떡이며 원망을 가득 담아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남자가 제 코를 두드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숨, 제대로 쉬어야지. 기껏 주워왔더니 별 같잖은 이유로 죽을 생각인가?”
도와준 게 맞았군.
그런데 숨 못 쉬고 죽을까 봐 도와줬다는 말을 왜 저리 한담. 서러움에 코가 시큰해질 정도다.
‘근데 잠깐.’
남자를 노려보며 복식 호흡을 반복하던 나는 문득 깨달았다.
저 짙은 흑발 고수머리와 심해 같은 푸른빛 눈동자. 널찍하고 탄탄한 어깨에 서늘한 기백이 느껴지는 조각 같은 얼굴. 그와 더불어 타고난 듯한 저 까칠한 성질머리는…….
<운바합>에서 묘사했던 내 최애와 판박이 아닌가?
‘아, 아스페이런!’
로판 독자 경력 10년 차답게, 이번에도 나의 상황 파악은 빨랐다.
‘와우!’
내 이름은 진노란. 특징, 로판 빙의자.
한 번의 생과 하나의 차원, 하나의 세계를 넘어서 드디어 나의 최애와 만나고야 말았다.
* * *
“환자에게는 좀 더 부드럽게 대해주셔야지요, 군주님.”
“숨을 안 쉬잖아.”
“그렇다고 코를 쥐어뜯으시다니요.”
“안 쥐어뜯었다.”
“하지만 환자분의 입장에서는…… 군주님? 제 말 듣고 계신가요?”
침대 주변에 쳐진 커튼 너머에서 아스페이런과 긴 연녹색 머리칼의 남자가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지금 아스페이런에게 환자에 대한 배려를 알려주고자 노력 중인 저 연녹색 남자는, 조금 전 허겁지겁 방으로 달려 들어와서 나와 아스페이런을 떨어트려 놓은 장본인이었다.
비록 아직 소개를 듣지는 못했지만 <운바합>의 진성 덕후답게 나는 그가 누군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아마 <운바합>에 나왔던 아스페이런의 최측근 중 한 명인 궁의 루멜일 것이다. 신비로운 연녹색 머리칼과 다정한 갈색 눈동자가 소설 속의 묘사와 똑같았다.
나는 두 사람의 입씨름을 배경음으로 삼은 채 멀뚱멀뚱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기운이 없고 몸도 으슬으슬 떨렸다.
“엣취야!”
결국 재채기까지 하고 말았군. 절망스럽게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재채기를 한 번 하고 나면 나는 항상 감기에 걸렸었다.
“이런! 죄송해요, 제가 환자분을 두고.”
우렁찬 재채기 소리에 깜짝 놀랐는지 루멜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차가운 손이 조심스럽게 이마를 짚는다.
“감기기운이 조금 있으세요. 기력도 많이 쇠했고요. 당분간 안정을 취하시는 편이 좋겠어요.”
“……제가 어떻게 된 건가요?”
내가 들어도 기운 없는 목소리였다. 루멜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상냥하게 대답했다.
“벨트라움에 쓰러져 계신 걸 저희 군주님께서 구출해오셨어요. 하필이면 계셨던 곳이 설원이라, 발견 당시 가벼운 동상과 저체온증이 있으셨고요. 그래도 지금은 다행히 괜찮으세요.”
“벨트라움?”
“아, 엘바스에서 오셨다면 이 명칭을 모르시겠군요. 제 3의 세계 말입니다. 엘바스에서 그곳을 트로노스라 부르듯이, 엘로스에서는 벨트라움이라 부르지요.”
“아.”
알아듣기 쉬운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덕분에 <운바합>에서도 관련 내용이 나왔었다는 게 기억이 났다. 작중의 배경은 주로 엘바스였던 탓에 벨트라움이라는 명칭이 낯설어 순간 알아듣지 못했다.
루멜은 진찰을 계속하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지금 환자분이 계신 곳은 엘로스 북부에 자리한 로아킨 왕국입니다.”
“제가 엘로스로 넘어온 거군요.”
아스페이런과 루멜을 보고 진작 눈치채기는 했지만, 확답을 받으니 안심이 되었다.
‘그나저나 문에 뛰어들자마자 기절했던 모양이네. 설원이고 뭐고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뭐, 잘 도착했으니 됐지.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불에 얼굴을 비볐다.
아스페이런이 데리고 왔다고 했으니, 그럼 여기는 왕성이겠지? 왕성에 들러붙어 있는 편이 시한부 탈출하기 편할 텐데.
이렇게 된 거 바로 알아보자 싶어 슬쩍 루멜의 소매를 잡았다.
“그런데요, 여기가 정확히 로아킨 어느 지역인가요?”
“로아킨의 왕성인 벨로이예요. 그러고 보니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이 성의 궁의인 루멜이라고 합니다.”
루멜이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인사했다.
나도 마주 인사하려 했는데, 그가 갑자기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루멜에게 가려져 있던 아스페이런이 똑바로 보였다.
“그리고…… 인사하세요. 이곳 로아킨의 군주이신 아스페이런 님이십니다.”
아스페이런은 맞은편 침대에 앉은 채 팔짱을 끼고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 얼굴은 정말로…….
‘잘생겼네. 역시 내 최애.’
좋아, 이참에 점수 좀 딸까.
원래 높으신 분일수록 인사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법이다. 나는 허리를 숙이다 못해 거의 절을 하며 씩씩하게 외쳤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군주님! 이 은혜는 평생에 거쳐 갚겠습니다!”
나름 회심의 한 방이었는데 아스페이런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나를 속속들이 파헤치려는 것처럼 빤히 들여다볼 뿐.
그러다 그가 불시에 입을 열었다.
“너, 제물로 바쳐진 건가?”
단도직입적인 물음이었다. 뭐라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며 머리를 긁적이는데 루멜이 내 앞을 막아섰다.
“군주님, 이제 막 의식을 찾은 사람에게 그건 너무 예민한 질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문하시려거든 이 환자가 좀 더 회복된 뒤에 하시지요.”
“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스페이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하긴, 이제 와서 정황을 파악해 봤자 이미 너무 늦었지. 적당히 돌봐주어라. 회복되는 대로 그란시아로 돌려보내야겠다. 율리시스에게 연락해두어야겠군. 이후는 그 애가 알아서하겠지.”
‘……예?’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돌려보낸다니, 나를? 왜? 누구 마음대로?
어안이 벙벙해서 뒷목이 다 뻣뻣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내가 패닉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아스페이런은 미련 없이 돌아서서 문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 안 돼!’
지금이 아니면 누구보다 바쁜 일국의 군주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당장 잡아서, 아스페이런의 마음을 돌려야 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거의 구르듯이 침대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힘차게 앞으로 달려 나가려 했으나.
“으헉.”
바닥에 발을 내딛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아서.
쿵.
“…….”
“…….”
“…….”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바닥과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이, 이런 씨이―!’
조금 전 의사가 콕 집어서 말했었다. 기력이 쇠했으니 당분간 안정을 취하라고.
그렇다면 이건 의사의 말을 듣지 않은 못된 환자에게 하늘이 내린 벌인 걸까.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고통스러워했다.
흑역사의 맛이 참으로 맵고도 썼다.
* * *
1초가 한 시간 같은 쥐 죽은 듯한 정적.
이를 깨트린 것은, 의사 선생님의 경악 어린 비명이었다.
“세상에! 괜찮으세요?”
루멜이 허겁지겁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 당황이 깃든 손길이 내 이곳저곳을 살핀다.
“일단 코피는 안 나는데. 제가 제대로 보이시나요? 이명은 들리지 않고요? 토할 것 같지는 않아요?”
“괘, 괜찮아요. 저 튼튼해서 괜찮아요.”
실제로 나는 정말 괜찮았다. 조금 골이 울리기는 하지만 혹도 안 난 것 같고.
한참 진찰을 하던 루멜 역시 나와 같은 결론을 내리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뒤로 물러났다.
그다음에는, 아스페이런의 차례였다.
“……어이가 없군.”
문 앞에 선 아스페이런의 얼굴에 한심하다는 기색이 짙게 묻어나왔다.
“뭐지? 내 궁과 네 머리 중에 뭐가 더 튼튼한지 알고 싶었던 거냐? 아니면, 사실 빠른 인생 하직이 목표였던 건가?”
쯧, 아스페이런이 혀를 한 번 찼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하거라. 내가 너를 구해 온 것을 후회하게 만들지 말고.”
아스페이런의 따가운 힐난이 머리 위로 작렬했다. 하지만 반박할 말은 없었다.
솔직히 아스페이런 입장에서는 얼마나 어이가 없겠는가. 기껏 구해서 데리고 온 애가 깨어나자마자 뜬금없이 숨을 참더니, 잠시 뒤에는 냅다 바닥에 머리를 가져다 박는데.
나는 반성하고 있다는 마음을 담아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앉았다.
그런 내 위로 내리꽂히는 아스페이런의 기막히다는 시선이 너무나도……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