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262화
소리를 지르거나,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거나, 놀라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티가 나게 행동을 하는 것이 사람이지만.
때로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 있으면, 그대로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리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지금의 알베르토가 그러했다.
그는 이마와 정수리의 경계선 어딘가에 손가락을 얹은 채로, 한동안 그 자리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게, 그러니까…….”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만져졌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허나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특별하거나 낯선 순간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의 알베르토가 그러했다. 그는 손가락 끝에 만져지는 이 감촉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같은 부분을 더듬거렸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촉각만으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거울 쪽으로 향했다. 얼핏 보기엔 바닐라 빈즈처럼 보일 정도로 작고 오톨도톨한 점들이었으나, 그건 분명 머리카락들이었다.
“…어떻게?”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슬며시 뺨을 꼬집었다. 아팠다. 적어도 꿈은 아닌 모양이다.
“하, 하하…….”
허나 그는 이내 깨달았다.
이 상황을 이해하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는 새싹처럼 올라온 머리카락들을 다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어 재차 확인하기 위함이었다면, 지금은 계속해서 이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함이었다.
‘잠깐… 설마, 그 안마 때문인가?’
지금 이렇게 몸이 가볍고 컨디션이 좋은 것.
그건 안마 덕분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신기할 정도로 몸의 상태가 좋은 걸 확인한 순간, 그는 전날 강태한에게 안마를 받았던 것을 떠올렸다.
헌데 안마로 메마른 모근까지 살려 낼 수 있는가?
거기까지는 솔직히 뭐라 말을 할 수가 없다. 적어도 상식적이거나 일반적인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거 말고 짚이는 부분이 없기도 하고.’
다만 어떤 현상에는 다 원인이 있기 마련이고, 어제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 봤을 때 그나마 뭔가 가능성이 있다고 보이는 것은 강태한의 안마뿐이었다. 반년 전쯤에 때려치운 발모제의 효과가 이제 와서 나올 리도 없고 말이다.
“아니… 잠깐. 그럼 이럴 때가 아니지.”
전날의 기억을 더듬어 보던 알베르토는, 문득 헤어질 때 강태한이 꺼냈던 말을 떠올리고는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잠깐 시범을 보여 드린 셈이고, 혹시 좀 더 효과를 보고 싶으시면 나중에 따로 말하세요.’
강태한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실제로도 뭔가 본격적으로 안마를 받았다기보다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즉흥적으로 진행된 일이었다.
그 말인즉슨.
제대로 안마를 받을 경우, 지금보다 더 눈에 띄는 효과를 볼 수도 있으리라는 것.
지금은 머리카락들이 다시 자라고 있기는 해도 상당히 듬성듬성, 빈말로도 풍성하다고 말하긴 힘들 정도로 조금씩만 자라고 있는 중이었지만…….
만약 제대로 다시 안마를 받게 된다면, 예전처럼 다시 촘촘하게 머리카락이 자라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과대 해석일지도 모르지만 그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를 설레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어디 보자…….”
상황 파악이 끝났으면, 이제 행동을 할 차례다. 그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더니 곧바로 본인의 일정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대로 어딘가에 통화를 걸고 귓가에 스마트폰을 가져왔다.
“어, 나야. 알베르토.”
[네, 감독님. 무슨 일이세요?]
“이번 주 남아 있는 일정들 있었잖아.”
[예. 두어 개인가 있었죠?]
일정표를 찾아보고 있는지 수화기 너머에서 종이 뭉치를 몇 개 뒤적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아, 하나 있네요. 간단한 인터뷰긴 합니다만.]
“미안한데, 그거 다음 주로 좀 미뤄 줘.”
[예? 어… 진짜로요?]
알베르토의 말에 직원은 놀란 기색으로 되물었다.
무리한 부탁을 해서가 아니다. 인터뷰라고 해 봤자 그냥 지역 신문과의 인터뷰고, 딱히 대단하거나 중요한 기획도 아니었으니까.
다만 알베르토 감독은 평소 이런 부탁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꽤나 책임감이 깊은 사람이며, 한번 잡힌 일정은 어지간해서는 지키는 타입이다. 적어도 여태 동안 그가 지켜본 알베르토는 그런 사람이었다.
“왜? 어려워? 혹시 꽤 중요한 일정인데 내가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나?”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 이질적인 상황이 꽤나 충격적이었던 탓일까, 직원은 그 뒤로도 한동안 얼을 타다, 몇 박자 늦게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 둘게요.]
“그래, 부탁 좀 할게.”
목적을 마친 알베르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른 연락처를 찾기 시작했다. 물론 급히 강태한에게 안마를 받을 수 있도록 약속을 잡기 위함이었다.
이미 예정되어 있던 안마 일정은 모두 끝난 상황이니, 따로 날을 잡을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강태한이 머무르는 숙소는 이곳이다. 그러면,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삼십 분이나 한 시간 정도는 짬을 내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본인도 직접 ‘좀 더 효과를 보고 싶으면 따로 말하세요’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기존 일정을 미룬 게 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지금의 알베르토에게는 그런 것보다도 이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통화 버튼을 누른 그는 대단히 신중하면서도 진중한 모습으로 스마트폰을 귓가로 가져갔다.
* * *
“허어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창공을 느긋하게 가로지르는 헬리콥터. 그 안에서는,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듯한 탄성이 흘러나오고 있던 참이었다.
“참으로 장관이로구나.”
감탄을 터트린 것은 다름 아닌 강태한이었다.
무림에서 육십 년의 세월을 보내고 난 이후,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놀라는 일도 없어진 그였으나, 큼지막한 창문 아래로 펼쳐진 광경은 그의 입에서 감탄을 터트리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진 광대한 평원과 그 평원 사이로 새겨진 거대한 협곡. 그 두 지형의 조화만으로도 웅장함을 안겨 주는데, 협곡의 경사면을 따라 아로새겨진 줄무늬가 멋을 더하고 있었다.
그 막연할 정도의 웅장함은…….
마치 대지로 이루어진 바다를 보는 것과도 같다고 할까. 특히나 헬기를 타고 하늘 위에서 두 눈으로 내려다보는 그 모습은, 아무리 감수성이 메마른 이라고 하여도 감탄을 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태한아, 뭐라고 했니?”
그러던 와중, 그의 옆에 앉아 있던 강호연이 얼굴을 가까이 대고 살짝 언성을 높인 목소리로 물었다. 프로펠러 소리가 크게 울려 어지간해서는 대화를 나누기가 어려운 탓이었다.
“너무 멋있다고 했어요, 아버지.”
비슷한 의미와 뉘앙스로 말을 했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런 강태한의 대답에 강호연은 싱긋 미소를 짓고는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정말 장관이구나. 이것만 보고 돌아간다고 해도 딱히 후회가 없을 정도로 말이야.”
미국의 그 넓은 땅에서도 대표적인 관광지로 손에 꼽히는 곳이라고 하던데, 그럴 만도 하다. 강호연은 다시 멍하니 창가를 바라보다, 강태한 쪽을 쳐다보며 넌지시 말했다.
“혼자 안 오고 너랑 같이 오길 잘했구나.”
“…그러게요.”
강태한은 짧은 대답과 함께 가볍게 고개만 슬쩍 끄덕였다. 굳이 긴 대답이 필요하지는 않은, 그런 부류의 이야기였으니까.
[손님 여러분, 지금 우측 두 시 방향에 있는 언덕, 보이십니까?]
그때쯤, 스피커를 통해 조종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말한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확실히 큼지막한 언덕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협곡에 감싸여져 있어 살짝 배꼽처럼 튀어나와 있는 지형. 꽤나 멀리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강태한의 눈에는 그 위에 지어진 오두막 같은 건물도 보이고 있었다.
[지금부터 저곳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협곡을 따라 걷는 산책로도 있고, 사진 찍기 좋은 명당도 있고, 자가발전소로 돌아가는 시원한 냉장고에 콜라도 있습니다. 에이폰 충전도 할 수 있고요! 하하하!]
안내를 마친 조종사는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름 효과가 있었는지, 강태한의 좌우에 앉아 있던 강호연과 리겔은 차례대로 피식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뭐 저쪽에선 살짝 장난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여기서 전기라는 게 좀 귀하긴 합니다. 혹시라도 충전하실 게 있으시다면 해 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슬쩍 웃음을 흘렸던 리겔은 부가 설명을 덧붙이듯이 말했다. 그 말에 강호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까처럼 앞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내밀며 입을 열었다.
“리겔 씨는 여기 자주 오시나 봐요?”
“뭐 아무래도 손님 대접 대신 해 드리는 게 저희 업체 일이니까, 그랜드캐니언은 종종 오는 편이죠.”
리겔은 머쓱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저기 산책로도 제법 괜찮은데, 가신다고 하면 제가 안내를 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말씀만 해 주세요.”
“오… 그렇습니까?”
그 말에 강호연이 관심을 보였다.
확실히, 조종사가 말한 언덕과 점점 가까워지자 제법 근사한 주변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제대로 볼 수가 없는, 그런 세밀하면서도 정교한 풍경들이었다.
“태한아, 어떠냐? 같이 산책이나 좀 돌까?”
살짝 들뜬 목소리로 물어보는 강호연.
허나 프로펠러 소리 때문에 목소리가 묻힌 것일까, 강태한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태한아?”
“아, 네. 아버지.”
“리겔 씨가 안내해 준다고 하는데, 이따가 저기 내려가고 나면 같이 산책이나 좀 돌까?”
두 번 부르고 나서야 강태한은 반응을 보였다. 허나 강호연의 말을 듣고 있는 와중에도 강태한은 살짝 집중을 못 하는 듯한, 보다 정확히는 다른 곳에 신경이 쏠려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산책이라… 좋죠. 근데 조금 쉬었다가 출발해도 괜찮을까요? 한 이십 분 정도요.”
“안 될 건 없지. 상관없죠?”
“아, 네. 어차피 두 분을 위한 일정이니까, 시간제한 같은 것도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여기서 숙영을 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요.”
강호연이 물어보자 리겔은 당연하다는 듯이 즉답을 했고, 강태한은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기감 쪽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가까워질수록 더욱 선명해지는군.’
착륙을 준비하기 위해 헬기가 서서히 고도를 낮춰 가고 있던 와중, 어느 순간 강태한의 기감에 포착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영기(靈氣).
고도를 낮추고 있다고 해도 아직 한참 높은 곳에 떠 있는 상태였는데, 그럼에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짙고 방대한 그랜드캐니언의 기운이었다.
* * *
꿀꺽, 꿀꺽, 꿀꺽.
“으햐아!”
목젖이 움직이는 게 보일 정도로 음료를 들이켠 리겔은, 이내 눈을 질끈 감은 채 거창한 탄성을 터트렸다. 그의 손에는 반쯤 줄어든 500ml 페트병 콜라가 하나 쥐어져 있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곳에는 종종 오는데, 그때마다 이건 참 각별한 경험이라니까요.”
그랜드 캐니언은 꽤 더운 편이고, 협곡이 흐르지만 초목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건조한 편이다.
그런 곳을 돌아다니다가 마시는, 냉장고에서 방금 막 꺼낸 이 시원한 콜라 한 병은 각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원래 탄산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건 안 마실 수가 없네요.”
“그렇죠? 그렇죠?”
동감하는 강호연의 말에 리겔은 신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남아 있던 콜라를 마저 마시고는, 크게 숨을 내쉬며 늘어지듯이 의자의 등받이에다 등을 기댔다.
“근데, 내색만 안 했지, 태한 씨도 좀 피곤하기는 하셨나 보네요.”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는지, 리겔은 구석 쪽의 벽을 쳐다보며 말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 건너편에는 강태한이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을 터였다.
“저는 며칠 동안 피곤해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무슨 철인이신 줄로만 알았는데.”
“뭐… 저 녀석이 원래 약한 소리를 잘 안 하기는 합니다, 애초에 체력이 강한 편이기는 한데.”
그런 리겔의 말에 강호연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자기도 들뜬 나머지 강태한의 몸 상태를 생각 못 하고 있었기에, 꽤나 멋쩍은 상황이었다.
“스으으읍…….”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강태한은 피곤해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크게 숨을 들이쉰 그는, 오랫동안 숨을 머금고 있다가 한참 뒤에야 그 숨을 내뱉었다.
“…후우우우.”
보기에는 그저 깊게 심호흡을 반복하며 쉬고 있을 뿐이다. 허나 여기에 만약 기감이 트인 사람이 있었다면, 예컨대 천마안마의 김성훈이나 황태진 정도만 되는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그 사람은 아마 이 광경에 기겁을 했을 것이다.
주변 일대를 충만하게 채우고 있는 영기와 그것을 어마어마한 기세로 흡입하고 있는 강태한의 모습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