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205화
“다 쓰다니, 뭘?”
“안마가 좀 많이… 하드 하더라고요.”
캘리버는 피식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안마가 모두 끝나고 난 이후, 강태한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혈(睡穴)을 짚어 캘리버를 깊은 숙면 상태에 빠트렸다.
그 강도 높은 자극과 고통을 견딘 상태고, 특정 부분의 혈도는 아예 까뒤집어 새로 만들어 놓은 상태였으니, 회복을 위한 휴식은 당연히 필요한 절차였다.
몸과 정신이 지쳐 있는 것은 물론이고, 중간중간 강태한이 힘을 보태 주기는 했으나 생기(生氣)도 많이 소모한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하나 이번에는 평소보다 정도가 심했던 탓일까.
아무리 그래도 한 시간의 숙면으로 모든 게 회복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몸 자체는 믿기 힘들 정도로 활력이 넘쳐흐르고 있었으나, 정신력은 아직도 고갈되어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하드 하다니… 네가?”
한편 그런 캘리버의 말에 에드윈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는 마이애미 헤비나이츠의 헤드 코치를 맡고 있는 몸이며, 특히 캘리버는 팀의 에이스인 만큼 따로 특별하게 관리하던 선수였다.
그렇기에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어지간히 빡빡하거나 말이 안 되는 수준의 훈련이 아니라면, 그의 입에서 ‘하드 하다’, 즉, 빡세다는 표현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캘리버는 에드윈이 여태 동안 보아 온 선수 중에서 가장 인내심이 높고 성실한 축에 속했다.
부상 때문에 몸이 부자유스러웠을 때도 꾸준히 재활 훈련에 참가해 왔으며, 좀처럼 앓는 소리도 내지 않고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배려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한데 그런 캘리버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물론 그냥 장난스럽게 농담조로 빈말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때는 티가 나기 마련이다. 지금 캘리버의 표정과 목소리는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표정.
마치 정신이 탈곡되어 버린 듯한 저 표정이 어찌 연기로 만들어진 것이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캘리버는 미식축구뿐만 아니라 배우로서도 엄청난 재능을 갖고 있는 것이리라.
“…고생했나 보구나.”
“아후. 그러니까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에드윈이 심심한 위로를 건네자, 캘리버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고는 스트레칭을 하듯 기지개를 펴 냈다.
그 와중에도 몸 상태는 너무나도 훌륭한 것이, 기지개를 편 게 무색할 정도로 부드럽게 움직였다.
“오우, 참… 느낌이 낯설어도 너무 낯서네.”
정신과 몸은 대부분의 경우 피로를 공유하기 마련이다. 서로 딱 떼어 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거니와, 둘 중 하나가 힘들 정도로 일을 하거나 운동을 하면 다른 한쪽도 지치기 때문이다.
한데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수 있다니.
몸은 너무 가볍고 힘이 넘치는데 정신은 그냥 쉬고만 싶은, 이 이질적인 상황이 캘리버에게는 너무나도 어색한 느낌이었다.
“…뭐, 그래도 그렇게 해서 세 달 안에 완치가 될 수 있다면야, 우리로선 감사한 일이지.”
“그야 그렇죠. 저도 싫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머리를 긁적거리며 가볍게 툭 던지듯이 말한 에드윈. 그 말에 캘리버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절실하게 갈망을 해 왔던 탓일까, 이렇게 무기력하게 처진 상황에서도 의욕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그 세 달 동안 뭘 어떻게 하신다는 거야? 그냥 오늘 안마 한번 받았다고 저절로 회복되는 건 아닐 거 아니야.”
“일단 일주일에 한 번씩은 꾸준히 찾아와야 한다고 했어요. 이게… 단번에 끝내기에는 신체와 정신에 부담이 너무 큰 과정이라고.”
말하던 와중에 기억 속의 감각이 떠올랐는지, 캘리버는 기겁을 하듯 조그맣게 어깨를 떨었다.
안마를 받았던 당시의 고통이 생생하게 떠오른 탓도 있고,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같은 고통을 견뎌 내야 한다는 현실이 두려운 탓도 있었다.
하나 가장 공포스러운 부분은, 이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그나마 걱정을 해서 적당히 배분을 해 준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아예 작정을 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잘은 모르겠으나, 만약 그가 마음을 먹는다면 세계 최고의 고문 기술자로 돌변할 수도 있으리라. 오싹한 생각에 캘리버는 괜스레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여기로 찾아오라 하셨고… 운동도 꾸준히 해 줘야 한다고 했어요. 몸에 최대한 적응을 해야 한다고 그러시던데.”
“적응이라… 재활 과정을 말하는 건가?”
“저도 그렇게 물어봤는데, 혈도와 관련된 문제라 조금 다르긴 하지만 비슷한 맥락이라고 하셨어요.”
“혈도……? 그게 뭐지?”
“몰라요. 동양적인 뭔가가 아닐까요?”
흐음. 에드윈은 의아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이면서도 납득했다는 듯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혈도가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 이해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중요한 건 캘리버가 세 달 내로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 스케줄부터 바꿔야겠네. 한국에서 최소한 세 달은 머무르고 있는 걸로.”
“예. 그래야겠죠, 아무래도.”
한국에서 안마를 받으려면 당연히 한국에 있어야 한다. 물론 캘리버가 매주 왕복을 하는 방법도 있겠으나, 쓸데없는 낭비이기도 하거니와 회복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적절하지 못하다.
결국 가장 바람직한 건 체류 기간을 늘리는 것.
캘리버도 미국에 몇 가지 스케줄들이 잡혀 있는 상황이었으나, 그냥 취소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 어떤 스케줄이라 해도 본인의 몸을 회복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팀에서 뭐라고 하진 않을까요?”
“시즌 중인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애초에, 구단주님이 팀의 에이스를 걱정하시는 마음이 생각보다 꽤 크시거든.”
시즌이 아니라고 할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교적 자유롭고 개인 일정에 관대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캘리버는 명실상부한 헤비나이츠의 에이스 쿼터백. 팀의 에이스가 이번 시즌에 참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해외에 몇 달 더 머무른다고 굳이 반대를 할 인간은 없을 것이다.
“아, 그리고 말이야. 이참에 숙소도 여기로 바꿔 버릴까? 여기 빌딩에 있는 라이너 호텔로 말이야.”
“숙소를요?”
“그래. 너 안마받으러 다니려면 아무래도 가까운 곳이 편할 테고, 그럼 바로 아래층에 있는 여기 호텔이 최적이지. 그렇지 않냐?”
그러던 중, 에드윈은 방금 전까지 자기가 떠올리고 있던 생각을 자연스럽게 꺼내 놓았다.
확실히, 나쁜 생각은 아니다. 캘리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한테는 확실히 좋은 이야기인데, 코치님은 괜찮겠어요?”
“나도 좋으니까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겠어? 너 안마받는 동안 여기서 운동이랑 목욕을 좀 했는데, 아우, 시설이 꽤 괜찮아.”
캘리버는 천마안마와 가까워져서 좋고, 에드윈도 호텔의 시설들이 마음에 들었던 참이니, 나쁠 게 없는 선택이다. 두 사람은 서로 동의하듯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행사 쪽에 방 좀 알아봐 달라고 하죠.”
“좋아. 질질 끌 게 아니라, 지금 바로 돌아가는 길에 연락을 해 두자고.”
에드윈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들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살살 흔들며 말했다.
처음에는 막연한 희망을 보고 출발했을 뿐이다.
여기에 오면 혹시라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 막연하고 조그만 희망.
그렇게 이 한국이라는 땅에 도착했으나, 그 조그만 희망조차도 사라져 버렸었다. 계획이 헝클어져 애초에 안마를 받아 볼 수도 없게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시작부터 목적을 잃고 실패한 여행.
그렇게 시간이나 때우다가 돌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아,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뭣 좀 먹고 돌아갈까?”
“삼겹살로 하죠. 정신이 허해서 그런가, 든든한 게 좀 먹고 싶네요. 안 그래도 원장님이 영양 섭취는 충분히 해 두라고 하셨고.”
“삼겹살은 어제도 먹었잖아. 안 질리냐?”
“그럼 감자탕은 어때요?”
“감자탕은 뭐냐? 감자면 포테이토 아닌가?”
숙소를 향해 다시 걸어가기 시작하는 두 사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작부터 끝이 난 여행인 줄 알았으나, 그런 것치고 두 사람의 표정은 굉장히 즐거워 보이는 것이었다.
* * *
“가라, 가라, 가!”
“때려! 그냥 쏴 버려!”
관중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축구 경기장.
경기가 마무리되기까지 일 분도 채 남겨 놓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관중의 시선이 한 사람의 드리블에 집중되어 있었다.
한때 부상으로 인한 슬럼프를 겪었지만, 복귀 이후 놀라운 실력과 성적을 뽑아낸 강주완 선수.
사이드를 뚫고 나온 그가 힘껏 공을 차는 순간.
거의 직선을 그리며 날아간 공은, 비어 있는 공간을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가 이윽고 골문을 뒤흔들었다.
“우아아아아아!”
“최고다, 미스터 강! 최고다, 에버튼!”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오는 함성과 수많은 응원.
안 그래도 에버튼의 팬들이 과반수 이상의 좌석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경기장 내부는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경기 끝났습니다! 마지막에 팀의 승리를 결정지은 강주완의 역전 골! 리그를 뒤흔든 에버튼이 마지막 경기에서도 승리를 거두며 3위로 마무리를 맺습니다!]
“에버튼! 에버튼!”
“위 고 챔스! 위 고 챔스!”
경기가 끝이 나자 더욱 크게 터져 나오는 함성.
오랫동안 지지부진했던 팀의 놀라운 성과 때문일까, 에버튼에 열광을 보내는 것은 비단 팬들뿐만이 아니었다. 경기를 중계하던 캐스터도 꽤나 감격을 했는지, 목소리에서 흥분한 기색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정말, 정말 대단합니다, 에버튼!]
[솔직히 오랫동안 중하위, 잘 쳐 줘도 중위권 수준이던 팀인데요! 시즌 중반부터 엄청난 실력을 보여 주더니 기어코 3위까지 올라서는 기염을 토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파죽지세로 연승을 거둬 가더니, 소위 빅 클럽이라 불리는 팀들마저 무너트리고 3위의 자리에 안착을 해 버렸다.
만약 팀의 잠재력이 두 달 정도만 더 일찍 터졌더라면 2위, 어쩌면 1위의 자리까지도 올라섰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전문가들 사이에서의 중론.
이 기록적인 대활약 덕분에 축구에 관심을 끊었던 오랜 팬들도 다시 경기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만들었으며, 특히 전 세계의 축구 팬들에게 ‘에버튼 FC’라는 팀을 새롭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감정이 벅차오르는 것은 직접 경기를 뛴 선수들이었다.
“우하하! 우리가 3위야, 리그 3위라고!”
“최고다, 주완! 고생했어! 하하”
“너도 임마! 아니, 우리 모두 최고다! 하하하!”
방금 전까지 경기장에서 땀을 흘린 열기.
관중석에서 보내 오는 열광.
가슴 가득히 채워진 이 성취의 기쁨.
선수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부딪치고, 뭐라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격렬한 그 감정들을 공유하며 함께 이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아…….”
그리고 그 모든 모습을 VIP 박스에서 생생하게 지켜보고 있던 타르빈 마르케시.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몇 차례 숨을 몰아쉬더니, 감격에 찬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이 팀의 구단주라니.”
그가 처음 에버튼 FC를 인수하려고 했을 때, 그룹 내에서는 꽤 많은 반대의 이야기가 나왔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에버튼 FC는 실력도, 인기도, 리그 내 위치도 어중간한 팀이었으니까. 뜬금없는 걸 떠나서 사업적으로 별 이득이 없어 보이는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걸 강행했던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냥 언젠가 프리미어리그의 구단주가 한번 되어 보고 싶었다. 사업적인 접근이 아니라 축구를 좋아하는 한 명의 남자로서 팀을 키워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마음은…….
지금, 그야말로 상상 이상으로 달콤한 결실을 맺어 그에게로 돌아왔다. 너무 좋은 나머지 기뻐서 날뛸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냥 감격스러울 뿐.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로, 이 기쁨과 감동을 고요하게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좋냐?”
“물론이죠, 아르힌. 챔스 확정도 말이 안 되는 건데, 심지어 3위? 이건 꿈에서도 못 본 일이라고요.”
“그렇구만…….”
그의 옆에서 같이 관람하고 있던 아르힌 두르는 비교적 담담한 얼굴로 테이블에 놓인 음료를 들이켰다.
마르케시가 잔뜩 신이 나서 같이 보러가자고 하길래 같이 오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그는 축구보단 크리켓을 더 좋아하는 인도인이었다.
“이 기쁨과 감사를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은데…….”
“왜, 지금 강 선생님 연인분이 계신다는 섬 있잖아. 거기로 크루즈 한 대 더 보내지.”
“아, 그럴까요?”
“…장난이다, 이놈아. 두 대는 너무 과해.”
농담 삼아 던진 말에 진심 어린 반응이 튀어나오자, 아르힌이 질색하며 손을 저었다. 여기서 맞장구라도 쳤다간 정말로 실행에 옮길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