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199화
“…하하하.”
그날 저녁.
호텔 인근의 공원에서, 캘리버는 소소한 웃음을 터트렸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나오는, 마치 기쁨이 새어 나오는 듯한 웃음이었다.
“자식, 그렇게 좋아?”
“그야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사실 말은 안 하고 있었는데, 그 보조기 진짜 지긋지긋했다고요.”
캘리버는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머리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그는 지금 무엇의 도움도 받지 않고, 그저 자신의 두 다리만으로 걷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아직 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다.
많이 완화되긴 했지만 다리는 여전히 절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걸음걸이도 꽤나 어색해 보였다.
하나 그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얼마 전, 아니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보조기가 없으면 오래 서 있지도 못하던 몸이었는데, 지금은 마음대로 공원을 산책하고 있지 않은가.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걷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가, 약간 꿈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캘리버는 약간 감동이 서려 있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신의 두 다리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그에게는 지금 상황 자체가 커다란 축복이자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아직도 믿기 어려울 정도니까.’
그런 캘리버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에드윈은, 그 말에 수긍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두어 시간도 지나지 않은 방금 전.
갑작스레 허리 통증을 호소하던 캘리버에게 한 낯선 남자가 다가왔었을 때, 에드윈은 그에게서 어딘가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기는 했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의 효과를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솔직히 아직도 이해할 수는 없었다.
느닷없이 허리와 등짝을 후려치는가 싶더니 굽었던 사람의 허리를 펴 내고, 뼈마디를 맞추듯 사람 몸을 이리저리 밀고 당기니, 다리의 절음이 멎었다.
그 모든 과정을 본인의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지만… 아니, 오히려 두 눈으로 봤기에 더욱 믿기가 어려웠다. 다른 뭔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의 여지마저 사라졌으니까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NFL 팀의 선수들에게 제공되는 의료 서비스는 상당한 수준이다.
물론 팀에 따라 그 수준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겠으나, 경기 자체가 과격한 만큼 거의 모든 팀이 의료 쪽에 상당한 예산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들이 속해 있는 팀, 마이애미 헤비나이츠는 업계 내에서도 특히 뛰어난 의료 서비스와 복지로 이름이 알려진 곳.
하나 그럼에도 캘리버에게는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었고, 걷는 것도 힘들어진 팀의 에이스에게 별다른 방도 없이 그저 진통제만 쥐어 줄 뿐이었었다.
탓할 일은 아니었다. 그들이 무능한 것도 아니다.
그저 그게 최선이었을 뿐인 것이다. 아픔을 덜 수 있도록 진통제를 쥐어 주고, 신체의 자생 능력으로 스스로 회복되기를 기원하는 것이 말이다.
한데 그걸… 잠깐 몸을 좀 두드리고 주무르는 정도로 이렇게까지 회복시킬 수 있다니. 아직까지 어안이 벙벙한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확실히 유명한 사람은 유명한 이유가 있단 말이지.’
에드윈은 셔츠 앞주머니에 넣어 뒀던 명함 한 장을 꺼내, 다시 한번 내려다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길거리에서 도움을 줬던 그 남자에게 건네받은 명함. 그건 다름 아닌 천마안마의 원장, 강태한의 명함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까지 찾아오기는 했어도 그렇게 큰 기대를 갖고 있진 않았다.
그냥 캘리버의 몸 상태에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다면, 그 정도로 충분한 수준의 기대일 뿐이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 실력이라니.
기대를 가뿐히 뛰어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가 생각하고 있었던, 아니 상상할 수 있었던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건 그렇고, 기대가 되네요.”
그때쯤, 앞장서서 걸어가던 캘리버가 말했다. 기대감을 넘어 설렘마저 묻어 나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뭐가?”
“이게 간단한 조치라고 했었잖아요.”
“…그랬었지.”
장소가 장소인 만큼 간단한 조치만 취해 드렸다.
남자는 분명 그렇게 말을 했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명함 하나를 건네주고, 연락을 하면 시간을 내줄 테니 찾아오라고 했었다.
“이게 간단한 조치라고 하니, 본격적으로 마사지를 하면 얼마나 효과가 뛰어나다는 걸까요.”
아무래도 간단한 조치라고 하면 비교적 가벼운, 약간 맛보기용 시식 코너 같은 느낌이 있지 않은가?
물론 간단한 조치와 본격적인 조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고 얼마나 다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전자만으로도 이미 큰 만족을 느끼고 있는 캘리버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만에 하나라도, 완쾌하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캘리버의 목소리에는 들뜬 기색이 역력했으나, 동시에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마치 그런 소망을 품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 말에 에드윈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간절한 소원은… 입 밖에 내기 어려울 때가 있는 법이다. 행여나 과분한 소원을 품었다고 부정을 타게 될까 봐, 막연하게 품은 기대가 실망으로 되돌아올까 봐 말로 꺼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동안의 캘리버 또한 마찬가지였다.
처음 의식을 잃었을 때부터 자신의 몸 상태와 심각성을 직감했던 것일까. 그는 섣불리 희망적인 말을 꺼내는 법이 없었다.
종종 ‘금방 나을 수도 있지 않냐’, ‘괜찮다’ 같은 긍정적인 말들을 하곤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변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들이었을 뿐이다.
하나 지금은 다르다.
비록 조심스러운 말투이기는 하지만, 그동안 가슴 깊이 숨겨 놨던 소원을, 막연한 희망을 입에 담아 낸다. 그 덕분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어두워져 가던 눈빛에도 어느새 예전 같은 맑은 생기가 돌고 있었다.
“…충분히 가능하지.”
그런 캘리버를 옆에서 지켜봐 왔었기에.
그리고 그 또한 한때 현역 선수로 활동하다 은퇴를 했었던 입장이었기에, 그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 다시 빡세게 훈련시킬 거니까, 그렇게 알아 둬라. 아마 이게 마지막 휴가가 될 거다.”
“예? 재활 훈련은 차근차근하는 거 아닌가요?”
“차근차근 빡세게 하는 거지. 네 몸값이 얼만데? 내가 따로 붙어서 스케줄이랑 트레이닝 메뉴 관리할 거니까, 지금이라도 많이 놀아 둬.”
에드윈은 사적인 상담도 자주 해 줄 정도로 선수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는 코치로 유명했지만, 그만큼 빡센 훈련으로도 유명한 코치였다.
오죽하면 선수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도 개개인에 맞춰 극한의 트레이닝 메뉴를 짜기 위해 사전 조사를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으니까.
“에엑… 그렇게까지 말하면 좀 무서워지는데요.”
그 말에 질색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캘리버.
하나 둘 다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이, 말과는 달리 즐거워 보이는 분위기였다. 에드윈은 그 뒤로도 캘리버의 발걸음에 맞추며, 한동안 산책을 계속했다.
* * *
인도 동쪽에 위치해 있는 한 섬.
섬 자체는 그렇게 크지 않고 마을조차 없는, 거의 무인도에 가까운 곳이지만, 이상적인 형태의 해안가와 독특한 분위기 덕분에 촬영지로서 나름 이름이 알려져 있는 곳이다.
“조명 팀! 이쪽! 한 명 이쪽으로 좀 와 봐!”
“촬영팀장님! 촬영팀장님 어디 계신 가요!”
그리고 현재 이곳에선 곳곳에서 한국어가 울려 퍼지고 있는 중이었다.
드디어 일정이 맞춰지고 이곳에 도착하여 촬영 준비를 시작하는 제작진들과 스태프들.
안 그래도 해외 로케는 일정이 빠듯하기 마련인데 오랫동안 지연까지 되었었던 탓일까, 다들 긴장이 바짝 들어간 모습으로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아휴, 아무래도 이쪽 동네는 좀 덥네…….”
그나마 설치가 끝나 가고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을 무렵, 그늘 아래 의자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가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로 푸념하듯이 말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게 어딥니까, 감독님.”
“아니, 그야 그렇지. 그냥 좀 덥다고 한 거야.”
옆에 앉은 조감독의 말에 감독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의 말대로, 더운 것 정도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기적적으로 성사된 촬영이긴 했다. 조감독은 새삼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이듯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미뤄졌으면 촬영 계획도, 플롯도, 대본도 싹~ 바꿨어야 했는데, 정말 다행 아니겠습니까. 으휴,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얼핏 별거 아닌 것 같은 한 가지 요소 때문에 영화 전체가 이상해질 때가 있다.
캐릭터에 맞지 않는 대사라든가, 장면에 맞지 않는 로케이션이라든가, 이상한 OST, 잘못된 고증… 작게는 묘하게 이질적인 느낌에서부터, 심각하게는 몰입 자체가 깨져 버릴 정도의 모순이 생겨 버린다.
이번에 촬영하러 온 장면들이 그러했다.
섬의 지형과 계절, 분위기… 이 느낌을 담아낼 수 없다면, 이야기의 방향 자체를 수정하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울 정도였다.
“…그래도 덥긴 하네요.”
“…그렇지?”
하나, 그렇다고 몸이 절로 쾌적해지는 것은 아니다. 방금 전에 감독에게 핀잔을 주듯 말했던 조감독이었으나, 시간이 좀 지나자 그 또한 부채질을 하며 푸념하듯이 입을 열었다.
“그, 동준 씨랑 세아 씨는 좀 괜찮으십니까?”
문득 생각이 났는지, 조감독이 뒤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임시로 마련해 놓은 배우들의 대기실. 그곳에 앉아 있던 주연 두 사람이 손을 저으며 답했다.
“예, 저희는 괜찮습니다.”
“설치 중에는 할 것도 없는데요, 뭐.”
힘들게 촬영 허가를 받아 내긴 했지만, 애당초 무인도나 다름없는 곳이고 여러모로 환경도 열악할 수밖에 없다. 인프라 자체가 없는 느낌이라고 할까.
하나 모두가 감내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래도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 배우들이 툴툴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두 사람의 말에 조감독이 미안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마실 거라도 좀 좋은 걸로 준비하고 식사라도 잘 내놔야 하는데… 워낙 급하게 준비하다 보니 뭐가 없네요.”
무인도라는 건, 필요한 물건을 육지에서 공수해 와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쉽게 뭘 구해 오고 가져오기가 힘든 상황. 더군다나 예산까지 빠듯한 상황이니, 아무래도 열악한 환경이 될 수밖에 없다.
“물만 있으면 충분하죠, 뭐.”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뒤쪽에 있던 다른 남자 배우가 손에 쥔 생수병을 흔들며 말하자, 조감독이 눈인사로 감사를 보냈다.
그러던 중, 옆에 있던 유세아가 약간 의문이 섞인 표정을 지으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사실 제 남자 ㅊ… 아니, 아는 사람이 커피 차를 보내도 되냐고 물어봤었거든요.”
“커피 차?”
배우나 주변 지인이 사비를 들여 촬영지로 보내는, 일종의 이동식 카페를 말한다.
예전에도 종종 보이곤 했지만, 특히 근래에는 팬들이 보내 주는 일도 잦아지며 촬영지에서 꽤나 자주 볼 수 있는 요소가 되긴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여기까지 커피 차를 어떻게 보내요?”
“정확히는 제 지인이 보내는 건 아니고, 인도에 있는 지인이 보내도 되냐고 물어봤다더라고요. 그러니까 정확히는, 지인의 지인이 보내는 셈이죠.”
“흐음… 커피 차가 와 주면 좋죠. 좋은데…….”
정말 바쁜 상황이 아니라면, 촬영진 쪽에서도 당연히 반길 만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선 더더욱. 하지만 조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덧붙이듯이 말했다.
“섬에서 촬영하는 걸 모르고 말한 게 아닐까요? 내륙이면 모르겠는데, 아무리 인도 사람이라 해도 섬까지 보내긴 힘들겠죠. 여기로 보내려면 커피 차가 아니라 커피 배를 보내야 할 텐데.”
“조감독, 그거 말 되네. 아니면 수륙양용 커피 차라든가. 하하하!”
조감독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감독이 맞장구를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수륙양용 커피차라. 자기가 생각했지만 꽤 재밌는 말이었다.
“역시 좀 어렵겠죠?”
유세아는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애초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만큼, 그녀도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물어본 것이었다.
그때쯤이었다.
“…근데 저 커다란 배는 뭐야?”
“유람선 아닐까요? 바로 앞이 인도양이잖아요.”
저 멀리 바다에 보이는 큼지막한 크기의 배.
보아하니 어지간한 중형 선박 정도는 되어 보이는 게, 촬영진 전원이 타고 왔던 배보다도 훨씬 규모가 커 보이는 배였다.
그런 배가 지나가는 것 자체는 별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은데?”
“…어? 그러게요?”
그 배가 무인도를 향해, 이쪽으로 오고 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다. 슬슬 마무리를 하고 있던 스태프들도 하나둘씩 배의 존재를 발견하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그 배는 마침내 이 섬의 유일하게 제대로 된 시설인 부두에 정박을 하더니, 뭔가 짐들을 잔뜩 실어 옮기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상황…….”
“혹시 다른 팀이랑 겹친 거 아니에요?”
“딱히 촬영 장비 같지는 않은데. 그보다는… 음식? 저기 봐 봐. 샴페인도 있잖아.”
모두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던 와중.
“여기, 혹시 유세아 님이 어느 분이십니까?”
“어… 저인데요.”
깔끔하게 하얀 정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촬영장으로 다가오더니, 유세아를 찾았다. 유세아가 조심스레 손을 들며 말하자, 그는 정중히 인사를 하며 공손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유세아 님과 일행분들이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하라는 의뢰를 받고 왔습니다. 요 며칠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세아의 연인인 강태한.
그리고 강태한의 지인이자 그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엘리펀트 그룹의 회장, 타르빈 마르케시.
그런 그가 보내 온 것은 커피 차가 아니라, 일류 셰프의 요리들과 음료, 거기에 온갖 편의 시설까지 제공하는 커피 크루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