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 안마하신다-42화 (42/286)

<천마님 안마하신다 42화>

“···기분 탓인가?”

유세아는 어깨 앞으로 내려온 옆머리를 쓸어넘기며 다시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하긴, 설령 정말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자기가 신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당이 좀 부족하긴 한가봐.’

원래 촬영이라는 게 생각보다 체력이 많이 깎이는 일이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는 건 둘째 치고, 세트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인 것이다.

그렇기에 컨디션 관리는 배우의 기본.

한참 기다리다 본인 씬을 찍을 차례가 왔는데, 수분섭취가 부족하다든가 당이 떨어졌다든가 하는 이유로 촬영이 딜레이 된다면, 창피한 걸 떠나서 모두에게 민폐인 일이다.

“세아 언니, 달달한 것 좀 가져와봤어요.”

때마침 유세아의 매니저, 권소윤이 간식을 챙겨왔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져 있는 작은 쟁반을 보며 유세아가 미소를 지었다.

“뭐야?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고 가져왔어?”

“오다가 조감독님이랑 만났거든요.”

“아하.”

그녀의 말에 유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적당히 말을 돌리려고 한 말이긴 했지만, 분명 조감독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미안해요, 언니. 자리를 좀 오래 비웠죠?”

“아냐. 해외까지 와서 업무 보는 네가 고생이지. 근데, 이건 어디서 난 거야? 섬이라서 커피차나 간식차는 못 불렀다고 들었는데.”

“스탭 분들이 이것저것 챙겨 오셨더라고요. 그리고 뭐, 어딜 가든 언니 간식 정도는 제가 따로 챙기고 다니고요.”

“···그렇구나.”

권소윤의 말에 유세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요즘 그렇게 간식을 자주 찾았나?”

“예? 하하. 아뇨. 그냥 매니저 기본 소양이죠.”

“그렇지? 후후. 괜히 찔렸지 뭐야.”

간식을 좋아하는 것과 간식을 자주 먹는 사람은 느낌이 다르다.

특히 배우라면 더더욱.

매니저의 말에 유세아는 안도의 웃음을 짓다가···

벌써 네 번째로 집어 들었던 초콜릿을 쟁반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촬영 쪽 분위기는 어때?”

“뭐 순조로운 것 같던데요? 그래도 언니 씬까지는 아직 많이 남은 것 같지만요.”

유세아가 다음으로 참여할 장면은 야간이 배경이기 때문에 적어도 해가 진 저녁에나 가능하다.

이제 슬슬 해가 져가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꽤 시간이 남아있는 상황.

“그럼 산책이나 좀 할까?”

“혹시 간식 얘기가 아직도 신경 쓰여요?”

“···아니, 여기 바닷가가 예쁘더라고.”

얼떨결에 초콜릿의 칼로리를 생각해버린 탓에 꺼낸 제안이었지만, 유세아는 자연스럽게 딴청을 피웠다.

그렇게 구두를 움직이기 편한 운동화로 갈아 신고, 가볍게 주변을 걸으려는 생각으로 나왔는데···

“야, 일단 얼음팩이라도 가져와봐.”

“수건도 챙겨갈까요?”

“그건 기본이지, 임마!”

뭔가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당황한 얼굴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스탭들.

움직이는 방향을 보아하니, 촬영 현장 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이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조찬혁 씨가 촬영 중에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으셔서···”

“선배님이요?”

조찬혁은 영화계에서 모르면 간첩이라 할 정도의 유명인으로, 이번 영화에선 주연들 다음으로 비중이 높은 핵심조연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유세아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다가가자, 조찬혁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양쪽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아 괜찮습니다. 큰일은 아니에요.”

스탭들이 얼음팩과 상비약을 비롯해 이것저것 가져오자, 조찬혁은 손을 저어 그것들을 마다했다.

이미 많이 경험해본 일이고, 저런 것들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 편두통이신가보다···’

갑자기 한쪽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오는 증상.

대중들에겐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찬혁이 극심한 편두통으로 고생한다는 것은 주변인이나 그와 함께 촬영해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지만, 발작적으로 증상이 나타나면 극심한 두통을 호소하게 된다는 모양.

사람에 따라선 걷는 것조차도 힘든 경우도 있다고 한다.

유세아도 몇 번 편두통을 앓아본 적이 있긴 하지만···

평소 힘든 기색도 잘 내지 않는 선배가 촬영을 스탑시킬 정도니, 아마 차원이 다른 수준이 아닐까, 그렇게 막연하게 추측을 해볼 뿐이다.

“찬혁 씨, 어떻게 안 되겠어?”

“죄송합니다, 감독님. 저 조금만 쉬어야겠는데.”

“···아냐. 오늘 일정이 너무 빡빡하긴 했지. 그럼 다들 잠깐 쉬었다가, 다른 씬부터 먼저 찍자고.”

첫 촬영부터 이번 해외로케까지 힘든 소리 한 번 안했던 조찬혁이었기에, 감독 또한 긴 말을 하지 못했다.

단지 아쉬운 표정을 지을 뿐.

결국 찍고 있던 장면은 다음에 다시 촬영하기로 하고, 조찬혁은 차양막이 쳐져있는 쉼터로 몸을 옮겼다.

얼핏 보기엔 태연한 표정이었으나 눈에 띄게 안 좋아진 안색이 그의 몸 상태를 알려주고 있었다.

“선배, 괜찮아요?”

“누구··· 아, 세아구나.”

간이침대에 몸을 뉘인 조찬혁이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뭐 자주 있는 일이기도 하고. 전에 같이 불효자 찍을 때도 한 번 이랬었··· 윽.”

그는 괜찮은 척 몸을 일으키다, 다시 머리를 붙잡고 침대에 누웠다.

한동안 앓는 소리를 내던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한숨 자고 일어나면 사라진다.”

조찬혁은 배우로서는 승승장구를 하며 인기를 얻은, 소위 꽃길을 걸어온 배우였지만, 적어도 주변에서 그의 삶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이제 막 스타덤에 오르기 시작했을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지고 빚더미에 앉아버렸을 때.

조찬혁은 아버지의 남은 빚을 모두 떠맡았고, 고작 2년 만에 그 빚을 모두 청산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당시 지나치게 무리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지금과 같은 편두통을 앓게 된 것이다.

‘게다가 찬혁 선배는 몰입파 배우니까···’

본래 연기라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정신이 피로해지는 일이지만, 그 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 중에서도 배역에 최대한으로 몰입하는, 소위 메소드 방식의 연기는 피로도가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

이런 배우들은 되도록이면 한 번에 하나 이상의 배역을 맡으려고 하지 않을 정도니까.

허나 그때에도 본인의 연기방식을 고수하며 배우활동을 계속했고,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으니···

잘은 몰라도 이 또한 편두통이 사라지지 않는 원인 중에 하나일 것이라고, 유세아는 생각했다.

“잠은 잘 수 있겠어요?”

“어쩌겠니. 노력해야지··· 약도 소용이 없으니까.”

“수면제는요?”

“그건 약효는 들어서 잠은 바로 오는데, 자고 일어났을 때 오히려 두통이 악화돼서 안 돼.”

결론은 억지로 잠을 청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뜻.

조찬혁은 눈을 감고 매니저가 가져온 안대와 안구찜질팩을 그 위에 올렸다.

“···안마 같은 건 효과가 없나?”

“안마? 좋지. 효과는 일시적이지만. 근데 왜?”

“예? 아뇨,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서.”

정확히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강태한 생각이 나고, 안마는 그 덤으로 생각이 난 것이다.

“어디 솜씨 좋은 안마사라도 알고 있나봐?”

“어··· 아마 그럴 걸요?”

“아마?”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 거지 아마는 뭔가.

조찬혁이 황당해하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보니까 인스타그램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그리고··· 음. 지압하는 솜씨부터가 좀 남다르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정작 태한 씨한테 안마를 받아본 적은 없다.

단지 잠깐 손바닥 지압을 좀 받아봤을 뿐.

유세아는 문득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느낌이 참 묘하긴 했었지···’

손바닥을 꾹 누르는 순간, 가슴까지 전류 같은 게 찌릿하고 흘러들어오는 느낌.

잠깐 있었던 일이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강렬한 경험이었다.

만약 태한 씨한테 안마를 받게 된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유세아는 입술을 씰룩이며 괜히 위에 쳐놓은 차양막을 올려다봤다.

생각만 해도 너무 강한 자극이었다.

* * *

수요일의 이른 오후.

강호연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을 나왔다.

이렇게 느즈막하게 일어나 집을 나오는 게 영 어색한 기분이었다.

‘이래본 적이 별로 없으니···’

젊을 때는 막내생활을 하느라 댓바람부터 일찍 나왔었고, 나이를 좀 먹고 가게를 낸 뒤에는 장사준비를 위해 일찍 나가야했다.

물론 그렇게 해서 대단한 영광을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덕분에 태한이 대학은 빚 하나 안 지고 보낼 수 있었으니, 스스로 나름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아득바득 일하던 때보다 요즘이 더 매출이 좋단 말이지···”

정확히는 어깨후유증이 사라지고, 다시 수타면을 치기 시작한 뒤부터다.

밖에서 수타면 치는 걸 구경하는 행인들이 하나둘씩 생기더니, 어느 순간부터 손님이 확 늘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에는 이렇게 일주일에 하루 휴일을 갖는 사치도 부리고 있지만··· 오히려 매출은 예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다.

빵빵.

그때 골목 저 편에서 클락션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 창문으로 얼굴을 빼꼼 내민 채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버지!”

다름이 아니라 강호연의 아들인 강태한.

아는 분에게 자동차를 구했는데 오늘 받는다면서, 이걸로 같이 드라이브라도 가자며 여기까지 차를 끌고 온 것이다.

“···저걸 헐값에 받았다고?”

순간 자동차를 쳐다본 강호연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전에 강태한이 말한 가격을 듣고 ‘경차 정도 되겠거니’했었는데, 느닷없이 큼직한 산타페가 나타난 것이다.

“아버지, 어서 타시죠.”

“야 태한아. 이거··· 침수차량이나 뭐 그런 거냐? 아니면 돈을 더 줬나?”

요즘 중고차 가격도 비싸다는데, 뭔가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납득할 수 없는 가격이다.

허나 아버지의 말에 강태한은 싱긋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감사의 표시로 좀 깎아줬다는데··· 좀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냥 고마울 뿐이죠, 뭐.”

“···여러모로 좋은 사람이구나.”

“좋은 인연이죠.”

강호연은 조수석에 올라 안전벨트를 맸다.

그러곤 가볍게 차 내부와 계기판을 둘러보고는 탄성을 터트렸다.

주행거리마저도 양호했던 것이다.

‘대충 이야기는 들었지만···’

아들이 계룡산에서 원호 동생의 친구 중 한 명을 구해줬다고 했던가.

전에 두 사람이 서로 알게 된 계기를 물어봤을 때 들었던 이야기다.

뭐 어디서 중고차 딜러한테 그 가격에 사왔다고 하면 걱정이 됐겠지만, 선행을 하고 그 보답으로 받은 것이라 하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이야기다.

“···네가 착한 일을 하고 다니니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모이고 좋은 일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예? 잘 못 들었어요, 아버지.”

“아니다. 아무것도.”

한참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던 강태한이 되묻자, 뒤늦게 머쓱해진 강호연이 말을 얼버무렸다.

“그보다 참 좋다! 세상에. 아들놈이 운전하는 차를 다 타보고.”

“앞으로는 자주 타실 겁니다.”

“하하. 됐다. 누구는 차 없는 줄 아냐.”

강호연은 잠시 고개를 돌려, 운전을 하는 아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어렸을 때 바쁘다고 애비노릇도 제대로 못해줬는데, 어떻게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준 건지.

그냥 보고만 있어도 뿌듯해지고 마냥 고마운 강호연이었다.

“···근데.”

그렇게 좀 시간이 지났을까.

차는 어느새 고속도로로 진입하더니, 능숙하게 주변 속도에 맞추며 자연스레 달리고 있었다.

“너 운전을 제법 하는구나. 어느새 이렇게까지 연습을 한 거냐?”

원래 국도보단 오히려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는 게 쉽긴 하지만, 그래도 초보운전일 때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강태한의 운전에서는 그런 불안한 부분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서울에서 운전을 몇 번 해봤던 모양이다.

허나 강태한의 대답은 아버지의 예상과 달랐다.

“예? 그런 거 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뭐? 너 꽤 오랫동안 장롱면허 아니었나?”

당황한 강호연의 목소리.

강태한은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게 면허 따고 두 번째 운전이네요.”

“···그렇구나.”

잠시 동안의 침묵.

강호연은 조용히 정면을 바라보다, 괜히 안전벨트를 한 번 더 확인한 다음, 조수석 손잡이의 위치를 확인했다.

“···저 앞에 졸음쉼터에서 잠깐 세울래?”

“졸리세요? 졸리시면 주무셔도 되요.”

“···아니다. 됐다.”

차라리 계속 모르고 갔으면 좋았을 걸.

그런 생각을 하며, 강호연은 옆에 있는 조수석 손잡이를 꼭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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