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33화>
다음 날, 목요일.
전날 아버지와 함께 기분 좋은 저녁을 보냈지만, 그렇다고 오늘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새벽 일찍부터 집을 나서서 목적지로 향했다.
‘오늘 수확도 알차구만.’
그런 그가 향한 곳은 당연히 신준호의 야산.
산을 오른 지 이제 두 시간 정도 되어 가는데, 그의 배낭은 이미 거의 가득 채워져 빈 공간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약초를 마구잡이로 캔 것도 아니다.
같은 약초 열 뿌리를 찾으면, 한 뿌리는 후일을 위해 두고 갈 것.
무림시절 약초꾼들 사이에 퍼져 있던 암묵적 규칙이자 상식이었다.
그걸 떠올리며 되도록 일부는 남겨두며 캤고, 차를 만드는 칡과 야관문은 아직 한참 여유가 남아있어 아예 제외하고 캤는데, 그럼에도 이 정도의 수확을 얻어낸 것이다.
역시 강태한에게는 보물창고와도 같은 곳.
다만 이렇게나 수확물이 많으니, 오히려 다른 부분에서 아쉬움이 생겼다.
‘차가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대전에서 여기까지 오는 교통이 불편한 것도 있지만, 한 번에 캐갈 수 있는 약초의 양에 한계가 있는 것이 컸다.
오늘은 챙겨오지 않았지만, 하룻밤을 보낸다면 캠핑용품까지 생각해야 했으니까.
허나 만약에 차가 있다면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양은 한 번에 확 늘어난다.
물론 서울과 대전 사이를 운전하는 수고가 생기긴 하겠지만.
“하긴, 면허 딴 게 육십 년 전이기도 하고.”
수능이 끝나고 다 같이 우르르 운전면허를 따러 다닐 때, 강태한도 분위기에 휩쓸려 면허를 따뒀었다.
허나 그 이후로 운전대를 잡은 적은 없다.
그 상태로 무림까지 다녀왔으니··· 자신의 면허는 과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 육십 년이 지난 장롱면허였던 것이다.
‘요즘 중고차들은 얼마나 하나···’
무림에서 돌아온 지 이제 얼추 두 달.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동안 돈도 꽤 모아뒀고, 나름의 여유는 생겼다.
한 번 천천히 생각이라도 해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산을 내려오자.
“태한 학생! 오랜만입니다!”
산 초입 구간에서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가 손을 흔들며 반겼다.
다름 아닌 이 야산의 주인, 신준호였다.
아직 기운이 좀 없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병실에 누워있던 때에 비하면 확연하게 좋아진 인상.
강태한도 싱긋 웃으며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이거 참, 제가 오늘 찾아 가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에이, 생명의 은인이 볼일이 있다는데 내가 와야지. 오히려 퇴원하고 따로 인사를 했어야했는데, 경황이 없어서 그러질 못했네.”
신준호가 두 손을 저으며 말했다.
강태한은 난감한 표정으로 옆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 볼일이라는 게 산을 쓰는 답례로 뭘 좀 드리려는 건데··· 본인이 이렇게 와서 받아 가시면 그림이 영 이상하잖아요.”
강태한은 미리 꺼내뒀던 비닐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서울에서부터 갖고 내려온, 전날 조원호에게 건네줬던 것과 똑같은 도라지청이었다.
“이건··· 꿀에 약초를 담근 건가?”
“네. 도라지청입니다. 그리고···”
만약 선물이 그것뿐이었다면 답례라는 거창한 말은 붙이지 않았으리라.
강태한은 배낭 안쪽을 뒤적이더니, 곧이어 약초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건··· 산삼이잖아?”
잔뿌리가 많고 다섯 장의 잎이 달려있는, 산에서 나는 약초 중에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 산삼이다.
이걸 알아본 신준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태한이 손에 쥐고 있는 산삼을, 받아가라고 재촉하듯이 신준호에게 내밀었기 때문이다.
“서, 설마 이걸 주려고?”
“제가 자랑하려고 꺼냈을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신준호의 반응에 강태한은 가볍게 웃으며 미리 준비해둔 손수건으로 산삼을 감쌌다.
그럼에도 감싼 손수건 너머로 윤곽이 또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딱 봐도 알이 굵은 실한 녀석이었다.
신준호가 그 또렷한 윤곽을 멍하니 보고 있을 때, 강태한은 신준호의 손 위에다 산삼을 올려놓았다.
“아직 기력이 쇠하실 테니, 보신용으로 쓰십쇼.”
지난주의 산행에서, 강태한은 같은 장소에서 한 번에 세 뿌리나 되는 산삼을 찾았다.
게다가 잔챙이도 아니고 하나같이 십 년에서 십오 년은 먹은 실한 놈들뿐.
덕분에 싱글벙글한 강태한이었지만··· 순간 이걸 다 가져가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허락을 받았다곤 하지만 어쨌든 산의 주인은 따로 있고, 그 본인은 일주일 넘게 의식을 잃었다가 아직도 기력을 회복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이렇게 산삼을 한 번에 세 뿌리나 찾게 된 것이 과연 우연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가장 오래 묵은 녀석을 따로 남겨둔 채 지난주 신준호에게 연락을 남겼다가, 오늘 이렇게 캐온 것이다.
‘영기는 이미 처리해두기도 했고.’
물론 산삼처럼 기운이 강한 약초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고, 특히 이런 영산(靈山)에서 캔 물건은 짙은 영기를 머금고 있어 그 위험이 더욱 크다.
허나 그걸 잊어버릴 강태한이 아니다.
흡성대법(吸星大法)을 활용하여 어느 정도 영기를 제거해뒀을 뿐만 아니라, 내력 간섭으로 산삼 자체의 강하고 억센 기운까지 부드럽게 완화시켜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제거해둔 영기를 본인이 흡수하여 하단전에 차곡차곡 쌓아둔 것은 부수적인 부분.
물론 직접 산삼 한 뿌리를 섭취하는 것보단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강태한도 이득을 챙겨가는 아주 훌륭한 윈윈(win-win)이라 할 수 있었다.
허나 신준호가 그런 사정을 알 턱이 없다.
신준호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강태한을 쳐다봤다.
“아니, 이 귀한 걸··· 태한 학생이 먹지 않고.”
“저는 이미 다른 걸 먹었습니다.”
강태한의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찾아낸 산삼은 세 뿌리.
다른 산삼 두 뿌리는 이미 꼭꼭 씹어 영양부터 영기까지 전부 흡수한지 오래고, 아직 남아있는 이것도 산삼의 기운을 정돈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내공을 챙겼다.
그러나 신준호의 입장에선, 정황상 강태한이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꺼내는 빈말로 들릴 뿐이다.
그의 눈에 짙은 감동이 아른거렸다.
“정말··· 태한 학생한테는 여러모로 도움만 받네.”
일주일이 넘게 의식을 잃었다는 건, 그 기간 동안 움직이지도, 먹지도 않고 사실상 생명만 유지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당연히 그 영향은 오랫동안 몸에 남을 수밖에 없다.
의식을 되찾고 회복에 전념을 한다 해도, 한 번 쇠해진 기력이 돌아오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안 그래도 허해진 몸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걸 느끼고 있었는데··· 그런 찰나에 이런 선물을 받게 된 것.
사람을 구해주고, 정신을 차리게 해주고, 이제는 기력을 보충할 산삼까지 챙겨준다.
이런 사람을 은인(恩人)이라 부르지 않고 뭐라 부르겠는가.
“그동안 받은 걸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별 말씀을. 저도 신 사장님한테 많은 걸 얻어가고 있는 걸요.”
아닌 게 아니라 이 산삼도 신준호의 산에서 캔 것이고, 당장 등 뒤의 배낭에 가득 채워져 있는 약초도 그 일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감격에 휩싸여있는 사람에겐 그저 겸손으로만 보일 뿐.
기어코 한 번 더 감탄을 터트리고야 마는 신준호였다.
* * *
감동의 산삼수여식이 끝난 후.
‘···음?’
함께 산에서 내려오던 도중, 신준호는 문득 작은 의문 하나가 생겼다.
입구에 세워져있는 차가 자기 것 하나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태한 학생은 여기까지 어떻게 오고 있는 건가?”
“택시타고 오고 있죠.”
강태한은 당연하지 않냐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준호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갸웃 기울었다.
“···그럼 돌아갈 때는?”
이곳은 인적이 드문 산골이다.
올 때라면 몰라도, 돌아갈 때 택시를 찾는 일은 아주 상당히 힘든 일일 수밖에 없다.
“버스로 가죠.”
“버스? 배차가 별로 없는 걸로 아는데···”
“시간만 잘 맞추면 문제될 건 없더라고요.”
허나 강태한은 별 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정 뭣하면 뛰어서 돌아와도 상관없는 게 강태한의 솔직한 마음가짐이다.
마음만 먹는다면야 대전까지도 걸어갈 수 있었으니까.
‘허어···’
허나 그걸 듣는 신준호에겐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이곳까지 이렇게 힘들게 오가고 있었다니!
그렇다면, 심지어 그렇게 힘들게 와서 찾아낸 귀한 산삼을 흔쾌히 쾌척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안 그래도 무거웠던 선물의 가치에 무게 추 하나가 더해지는 순간이다.
이쯤 되면 반드시 뭐라도 보답을 하고 싶은 지경.
“···일단 오늘은 내가 태워다줄게. 타.”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자연스레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은 두 사람.
차는 곧 출발했지만, 신준호는 방금 전 일로 인해 한동안 고민에 빠져있었다.
‘···매번 태워다주는 건 당연히 불편해할 테고.’
산삼도 원래는 자기가 직접 와서 주려고 했던 사람이다.
할 수 있냐 할 수 없냐의 문제가 아니라, 애당초 강태한 쪽에서 거절할 것이 뻔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의 고민이 점점 길어지고 있을 쯤.
“새로 뽑으신 지 얼마 안 되셨나보네요.”
“아, 응. 아직 한 달도 안 됐어.”
그때 차 안을 둘러보던 강태한이 가볍게 한 마디 꺼냈다.
정적 속에서 뭐라도 화두를 던지려고 꺼낸 말.
허나 그 말이 신준호에게 아이디어가 되었다.
신준호는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근데 차를 새로 바꾸니, 자연스레 전에 타던 차가 남지 않겠어?”
“···예. 그렇겠죠?”
옷을 갈아입었더니 입었던 옷이 생겼다는 수준의 당연한 말이었기에, 강태한이 의문스럽게 답했다.
“그래서 차를 좀 팔려고 했는데··· 딜러 놈들이 죄다 후려치려고 그러더라고. 원래 알고 지내던 딜러들은 다 그만뒀다 그러고, 참 난감하지.”
“저런, 곤란하시겠네요.”
“그래서 그런데··· 혹시 태한 학생만 괜찮다면 답례 겸 나쁘지 않은 가격에 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데.”
“···흐음.”
강태한은 입가에 손을 얹은 채 침음을 삼켰다.
‘뭔가 인연이 닿는 모양이군.’
영약이 필요할 때에는 영약을 구할 산이 나오더니, 자동차가 필요해지니 이번엔 자동차를 팔겠다고 한다.
처음에 선행을 통해 만난 인연이라 그런가, 참 묘하게 일이 맞물려가는 느낌이다.
“차종은 산타페에 한 5년 정도 탔는데, 일할 때는 트럭을 타고 다녀서 주행거리도 얼마 안 돼. 사고는 예전에 주차하다 긁어먹은 거 정도가···”
강태한의 침묵을 고민하고 있는 거라 여겼는지, 신준호는 계속해서 차와 관련된 정보를 줄줄이 말했다.
차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지만 적당한 타이밍에 고개를 끄덕이는 강태한.
신준호의 말이 끝났을 때, 강태한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가격은 어느 정도 생각하시는데요?”
“일단··· 생각해놓고 있는 가격은.”
갑자기 꺼낸 말이었기에 생각해둔 가격도 없다.
마음 같아선 그냥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면 이런 대인(大人)이 받을 것 같지 않았기에 명목상의 가격이라도 붙여둬야 했다.
대충 이 정도면 될까.
때마침 신호에 차도 멈춰있었기에, 신준호는 머릿속에 떠오른 금액을 넌지시 입에 담았다.
“···신 사장님,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말인데.”
강태한은 자동차에 대해 잘 몰랐고, 중고차 시세는 더더욱 몰랐지만.
“혹시 하자가 있는 물건은 아니죠?”
신준호가 말한 가격은 잘 쳐줘봤자 크게 하자가 있는 경차 정도 되는, 강태한이 봐도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이는 저렴한 가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