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23화>
텐트는 낮에 볕이 드는 건조한 땅에 치는 게 좋다.
그냥 평평한 곳이라고 무턱대고 자리를 잡았다간, 밤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습기에 축축해진 바닥에서 잠을 자야할 테니까.
잠을 잘 텐트를 치고 나면, 그 다음은 모닥불.
불을 피울 땐 당연히 땔감이 필요하지만, 텐트를 칠 건조한 곳을 찾았다면 대개 그 주변에서 마른 나무 또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가지를 구부려보면 알 수 있지.’
구부렸을 때 가지가 휘지 않고 부러지거나 쪼개지는 것이 잘 마른 나무다.
되도록이면 자잘한 나뭇가지부터 굵은 것까지 골고루 찾아두는 것이 좋다.
이제 필요한 것은 불을 붙일 불쏘시개.
잘게 찢은 종이도 좋고, 실 뭉치도 좋고, 날씨가 건조하다면 나무를 찾을 때 마른 잎들을 같이 찾아도 좋다.
이것들을 땔감 사이에 집어넣고, 불을 붙인다.
불쏘시개의 불이 옮겨 붙을 기색이 보이지 않으면 조치를 취해야하지만···
잘 마른 땔감을 구해뒀다면, 어지간해선 저절로 불이 붙어, 모닥불이 완성된다.
“끄흐으음···!”
강태한은 가볍게 기지개를 핀 다음, 모닥불에 손가락을 가까이했다.
괜히 평온해지는 느낌.
야지에서 불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은 생각보다도 깊다.
게다가 모닥불을 직접 피우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가,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살짝 들뜨는 기분이다.
‘옛날 생각나는군.’
무림에 있을 땐 이렇게 지붕 없는 야지에서 머무는 일이 종종 있었다.
야영지로 적합한 곳을 찾거나, 불을 피우는 지식들 모두 그때 직접 몸으로 경험하며 익힌 것들이다.
“···후후. 이젠 무림의 기억들이 옛 추억이 됐나.”
문득 든 생각에 강태한은 웃음을 흘렸다.
무림에서는 뭔가 현대적인 인상을 받았을 때 옛날 생각이 난다고 했었는데, 이젠 정 반대가 된 꼴이다.
‘그건 그렇고··· 슬슬 시작해볼까.’
원래라면 이렇게 텐트를 치고 모닥불까지 피웠으면 한동안 경치를 둘러보거나 풍광을 쐬면서 멍하니 불이나 쬐고 있는 것이 정석이다.
허나 강태한이 오늘 여기에 온 것은 마냥 쉬기 위함이 아니었다.
약초를 캔다는 목적은 이미 달성했지만, 만약 목적이 그것뿐이었다면 이럴게 아니라 진즉에 하산을 했으리라.
아직 남아있는 목적은 바로 내공의 정련(精鍊).
보다 순도 높은 내공을 얻기 위해 필요한 과정으로, 특히 자신처럼 흡성대법을 활용하는 경우엔 사실상 필수적인 과정이다.
얼마 전 계룡산에서 시도했을 때도 성공적인 결과를 거뒀었지만, 아무래도 거긴 운기조식에 깊이 몰입하기엔 여러모로 제한이 따랐다.
일단 주변을 오가는 등산객들이 많아 호흡을 길게 가져갈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해가 질 무렵에는 산에서 내려와야 한다.
산 위에서 캠핑을 하며 머무르는 것은 당연히 금지되어 있고 말이다.
‘반면에 여긴 상관없지.’
다른 등산객도 없고, 약초 채집은 물론이거니와 캠핑을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산 주인이 마음대로 하라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더군다나 사람의 발길이 자주 닿지 않아 기의 순도도 높고, 영기의 농도는 계룡산보다도 훨씬 짙다.
정신을 집중하여 내력을 다루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좋은 수확물도 있고 말이지.”
강태한은 백팩 안쪽을 조심히 뒤적거렸다.
곧이어 그의 손에 쥐어져 나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방금 전에 찾아냈던 산삼.
뇌두에 새겨진 테를 보아하니 이십 년을 훌쩍 넘긴 놈인데다, 이곳의 짙은 영기를 듬뿍 머금으며 자랐으니 영약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놈이었다.
‘이 정도면 무림이라도 구하기 꽤 힘들었겠지.’
산삼을 효과적으로 먹는 법은 무림이건 현대건 이견이 많지만, 소림에서 환단(還丹)이라도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면 체질의 차이일 뿐이다.
강태한이 선호하는 방식은 생식.
아직 흙이 묻어나오는 산삼을 살살 털어내고, 생수로 가볍게 겉을 씻어낸다.
그 다음에는 잔뿌리부터 천천히, 꼭꼭 씹어 목구멍으로 넘긴다.
“그럼 어디.”
텐트 근처에 박혀있는 말라붙은 나무 그루터기.
야생에서 찾은 것치곤 둘레와 높이가 꽤 적당하다.
강태한은 미리 찾아둔 좌석에 앉아 편안한 자세로 눈을 감고, 내면에 정신을 집중했다.
위장을 통해 혈도로 스며드는 선명한 영기의 기운.
역시나 다른 약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대한 기운이다.
허나 그렇기에 이대로 내버려두는 것은 위험하다.
일반인이라면 이런 식으로 혈도를 맴돌며 몸의 기운을 채워주다, 남은 기운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호흡으로 빠져나가겠지만.
무림인처럼 단전에 본인의 내공을 따로 모아둔 경우에는, 서로 부딪혔을 때 반발을 일으키게 된다.
그 과정에서 탁기로 변질될 수 있고, 심하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다.
따라서 본인의 내공은 모두 하단전으로 끌어내린 다음, 외부에서 들어온 영약의 기운은, 미리 비워둔 중단전에 따로 모아 잠시 가둬놓는다.
“후우우우···”
그 상태에서 호흡을 통해 기공(氣功)을 거듭 반복하며, 자연 상태에 있던 영기의 야성(野成)이 무뎌지고 거센 기운이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그렇게 날뛰는 영기를 진정시키고, 서서히 파도가 가라앉으면···
이대로 체질에 맞게 변화하도록 천천히 유도시키는 것이 기초적인 방식이다.
허나 그 방식으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강태한은 태극무늬를 그리며 양손을 모은 다음, 왼손에는 하단전의 내공을, 오른손에는 중단전의 영기를 흘려보내 가운데에서 서로를 접촉시켰다.
두 기운을 합쳐 변화의 속도를 끌어올리는 것.
본래라면 반발이 일어나야 마땅했지만, 양손의 두 기운은 서로 조용히 어우러져, 하나의 성질로 합쳐진 다음 하단전으로 흘러들어갔다.
태청심공과 역근경의 원리를 동시에 활용하는 내공운용법.
무림에서부터 흡성대법을 사용해왔던 강태한에게, 성질이 다른 두 기운을 조화시키는 것은 그야말로 전문분야라 할 수 있었다.
‘이러면 별도의 정련과정이 필요해지긴 하지만.’
그걸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겠는가.
강태한은 최소한의 경계심만 남겨둔 채, 내면 깊이까지 심취하여 거듭 심호흡을 반복했다.
그렇게 서서히 해가 저물어 어둠이 내려앉고.
모닥불의 불길이 사그라져 잔불이 되고.
전신에 맺힌 땀으로 얇은 막이 생겨날 무렵.
“스으으읍···”
후우우─
깊은 날숨을 마지막으로, 강태한은 천천히 눈을 떴다.
끓어오르는 기운으로 후끈 달아오른 몸에 불어오는 선선한 저녁바람이 유난히 마음에 들었다.
‘시간이 꽤 흘렀군.’
벌써 어둑해질 시간.
아직 완전히 해가 지진 않았지만, 반대편 하늘에 흐릿한 달과 별이 떠올라 있었다.
허나 그만큼의 보람은 있었다.
강태한은 가볍게 주먹을 쥔 채로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파스텔 톤의 회색빛이 주먹의 테두리를 서서히 감싸 안았다.
“후후.”
강태한은 다시 내공을 거둬들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틈틈이 쌓아둔 성과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할 것도 했으니···”
강태한은 무릎을 탁탁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니 준비를 해볼까.’
허나 금강산도 식후경.
땀을 흘린 탓인가 허기가 진다.
강태한은 일단 사그라져가는 모닥불을 다시 되살리고, 텐트 안의 백팩에서 생수 한 통과 라면 한 봉지, 그리고 작은 코펠과··· 휴대용 버너를 꺼냈다.
‘모닥불과 요리용 불은 완전 별개의 것이지.’
이미 불은 피워놨지만, 저걸 요리용으로 쓰기에는 지나치게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하다.
모닥불에다 해먹는 요리.
상상할 때에는 낭만이 있어 보이지만, 말 그대로 낭만만 있을 뿐이다.
그럴 바엔 휴대용 가스버너 하나 챙겨가는 것이 훨씬 현명하고 효율적이다.
라면을 끓이는 동안, 강태한은 잠시 기지개를 피고선 해가 져가는 산의 풍경을 바라봤다.
여러모로 소득이 있었던 덕분일까, 유독 각별한 느낌이다.
서서히 내려오는 어둠.
밤의 산에는 고요한 적막만이 흐르지만, 모닥불의 빛과 따스한 온기가 함께 한다면, 그마저도 풍류를 즐기는 하나의 밑바탕이 되어줄 뿐이다.
‘···나쁘지 않은 휴일이군.’
강태한은 슬슬 닫아놨던 코펠의 뚜껑을 열었다.
입맛을 자극하는 라면 냄새가 새하얀 수증기와 함께 잔뜩 피어올라, 차가운 밤공기를 가득 채웠다.
* * *
며칠 뒤, 찜질방 인근에 위치한 PC방.
몇 주 전에 컴퓨터 부품들을 최고 사양으로 싹 갈아 맞춘 곳으로, 사양 좀 따지는 게이머들이 몰려드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최성현은 그곳의 한 자리에 앉아 뚫어져라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원래라면 안마샵에서 일을 할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다.
“아, 제발··· 마지막 학기도 수강신청 조지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다고···”
최성현의 입에서 가냘픈 절규가 새어나왔다.
그는 매학기, 계획했던 대로 수강신청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불운의 사나이였다.
“마지막 학기면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냐?”
“그렇지? 나도 그게 참 신기해.”
옆에 앉은 강태한이 가볍게 한 소리 건넸다.
그는 최성현과 달리 별 긴장이 없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겐 꼭 들어야하는 필수과목도 없었고, 학점도 정확히 5학점만 채우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잠깐. 좋은 생각이 났어.”
최성현이 뭔가 번뜩인 듯 고개를 돌렸다.
“뭔데?”
“네가 내 거 대신 해주면 안 되냐? 네 거는 내가 해줄게. 그러면 되지 않을까?”
최성현과 다르게 강태한은 수강신청이 꼬여본 적이 없다.
망해도 한 과목 정도 포기했을 뿐, 특히 경쟁이 치열한 과목일수록 실패한 적이 없었다.
“싫은데.”
허나 강태한은 매몰차게 거절했다.
“왜!”
“네 거는 네가 해야지. 그리고 나도 이거 놓치면 같은 시간대에 다른 수업 알아봐야 한다고.”
“나쁜 놈··· 넌 내 고통을 몰라···”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애초에 농으로 던진 말이다.
최성현은 한숨을 푹 쉬고는 다시 모니터를 주시했다.
수강신청까지 남은 시간은 초 단위.
이젠 PC방 컴퓨터의 성능과 자신의 반사신경을 믿을 뿐이다.
딸칵, 딸칵, 딸칵!
“끄아아악!”
클릭은 했으나, 좀처럼 로딩되지 않는 홈페이지 화면에 최성현이 절규를 터트렸다.
이것은 곧 수강신청에 실패했다는 의미였다.
“망했냐?”
“이번에도 조졌다··· 넌?”
강태한은 엄지손가락으로 자기 화면을 가리켰다.
수강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
거기엔 그의 성공을 알리는 짧은 문장만이 남아있었다.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천마의 반사신경!
만약 수강신청 속도에 순위를 매겼었다면, 아마 강태한이 1순위에 올라있을 것이다.
일을 마친 강태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바로 돌아갈 건데, 넌 어떻게 할 거냐?”
“실장님한테 나는 조금 있다가 들어간다고 전해줘··· 과 사무실에 전화라도 좀 해봐야겠다.”
“···그래. 그럼 고생해라.”
강태한은 인사를 남기고 깔끔하게 떠났다.
시간은 조금 여유가 있었지만 어차피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을 뿐더러, 출근하자마자 목욕탕에 들르는 것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개강이라···’
솔직히 말하면, 대학생활은 이제 기억도 안 난다.
4학년의 겉멋 든 소리가 아니라, 그 사이에 육십 년이란 세월이 끼어있는 탓이다.
까놓고 말해 지도교수 이름도 기억이 안 난다.
그렇기에 이제 와서 큰 의미도 없겠다만··· 그래도 대학은 마무리지어야하지 않겠는가.
단순히 학력을 떠나서,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연결해주는 고리 중에 하나였다.
‘···음?’
그렇게 생각에 잠긴 채 조금 걸었을까.
횡단보도에 초록불이 이제 막 켜져 걸어가려던 순간··· 저쪽 도로 먼 곳에서부터 어떤 기척을 느꼈다.
빨간불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 중형 세단.
아직 정지선까진 거리가 있었기에 상관없을지도 모르지만, 강태한은 그 차가 미묘하게 비틀거리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마치 주정뱅이가 휘청거리는 것처럼.
“미친놈이군.”
아니나 다를까, 놈은 정지선 바로 앞까지 와서도 멈출 기색 없이 그대로 앞으로 달려왔다.
미친놈은 피하는 것이 상책.
사람들도 그걸 보고 건너편으로 빠르게 건너가거나 다시 되돌아왔지만···
가운데에 한 명, 여성 한 명이 발이 굳은 듯 제자리에 멈춰 있었다.
“흐음.”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이 흘러간다.
방금 떠오른 계획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결론을 내린 순간, 강태한의 발이 스르륵,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달려드는 중형 세단과 한껏 움츠러든 여성.
강태한은 그 사이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사량발천근(四两拨千斤).
무(武)의 이치를 터득한다면, 넉 량의 힘만으로도 능히 천근을 다스릴 수 있다.
시조 때부터 무당파에 전해 내려오는, 무당파의 핵심을 꿰뚫는 핵심적인 가르침 중의 하나.
물론 강태한이 무당의 가르침을 배운 적은 없었지만··· 그 핵심의 묘리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으며, 충분히 다룰 수 있다.
콰아앙!
땅이 살짝 흔들릴 정도로 강렬한 충돌음.
허나 그 소리는, 강태한의 앞이 아니라 뒤쪽 중앙선의 가드레일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솜씨가 녹슬지는 않았군.’
차량은 우측으로 흘려보내고, 그 과정에서 신체로 전달된 나머지 충격량도 두 발을 통해 바닥의 아스팔트로 흘려보낸다.
결과 강태한 본인은 아무 일 없이 멀쩡한 상태로 제자리에 서있었다.
실제로 아무런 타격도 가해지지 않은 상황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괜찮소?”
뒤로 돌아선 강태한이 아래로 손을 내밀었다.
방금 전의 여자는 놀란 나머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예, 예··· 근데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일으켜드리지.”
여자는 강태한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순간 저릿, 하는 느낌이 손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더니, 풀렸던 다리에 힘이 돌아왔다.
그녀는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두 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친 데는 없나보군.”
“더, 덕분에요.”
“무얼. 차가 혼자 비켜간 것이거늘.”
강태한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상황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