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22화>
최태준은 다시 목욕탕으로 들어가 온탕에 몸을 담갔다.
자는 동안 침도 흘렸을 뿐더러 안마를 받으며 땀을 얼마나 많이 흘렸던지, 찜질복이 축축해졌다.
씻지 않고 이대로 돌아가기엔 영 찝찝했다.
“후으으으···”
단잠을 자고 일어나 뜨끈한 탕에 몸을 담그는 것도 각별한 맛이다.
게다가 지금은 해가 기울어지지도 않은 대낮.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 사치다.
‘요즘 이렇게 컨디션이 좋았던 때가 있었나?’
몸은 새 것처럼 가볍고 머릿속은 구름이 걷힌 것처럼 맑다.
마치 누가 몸 안쪽에서부터 깨끗하게 청소라도 해놓은 것처럼 말이다.
그 덕분일까, 안쪽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르는 활력이 느껴진다.
지금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자신감이 가슴 한 켠에서부터 올라왔다.
헌데 왜일까.
그토록 피곤하고 지쳐있을 때는 훈련과 시합에 대한 강박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있었는데, 에너지가 넘치는 지금은 오히려 머릿속이 텅 비어있었다.
온탕의 온기가 참 따뜻하다, 온몸이 노곤한 게 참 기분이 좋다···
이런 생각들만 간간히 떠오를 뿐.
맑게 개인 머릿속에는 잡념이 없어 오히려 한가했다.
최태준은 멍하니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에 맺힌 물방울을 세기 시작했다.
고요하고 따스한 휴식.
분명 안마를 받기 전에도 들어왔었던 똑같은 탕이지만,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말보단 가까운 사람의 말을 경청하라···’
그렇게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문득 아까 전 강태한이 했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대로다.
자신은 그동안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고 있었다.
잡념이 흩어지고 정신이 맑아진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태준아, 좀 쉬면서 해라. 열심히하는 것도 좋지만 적당히를 알아야지.’
‘야 임마. 그 게 왜 다 네 잘못이야? 됐으니까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오늘 범호 형이 대게 사준댔다.’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쉬엄쉬엄해. 형들 따라서 놀러도 좀 다니고··· 내 참, 코치생활 하다가 선수한테 놀러 다니라는 말을 다 해보네.’
문득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은 이미 해답을 말해주고 있었다.
좀 쉬면서 하라고, 너를 탓할 문제가 아니라고···
단지 자신이 듣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등신이구나, 완전히.’
인터넷에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말은 신경 쓰면서, 정작 자신을 옆에서 지켜보고 걱정하는 사람들의 말은 흘려듣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
물론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라 해도 거기엔 팀의 팬들과 자신을 응원하는 팬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관심과 기대에는 그저 감사할 뿐이다.
팬들의 관심과 기대.
그 두 가지가 없으면 애초에 프로선수는 성립될 수 없는 직업이니까.
하지만.
‘감당도 못할 거면서.’
감당할 수 없는 짐을 들었다가 도중에 무너진다면, 오히려 방해만 되고 민폐만 끼친다.
아예 들지 않은 것만 못한 것이다.
자신은 아직 버거운 짐을 어떻게든 들어보려고 낑낑거렸었고···
그대로 무너진 채, 원래 할 수 있었던 일도 못하고 오랫동안 방황하고 있었던 꼴이다.
컨디션 관리.
이 또한 프로의 덕목이다.
그 중요성은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자신은 그걸 전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나는 계속 노력하고 있다’라는 면죄부에 사로잡혀 거기에만 집착했을 뿐이다.
“후우우우우···”
최태준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온탕의 물로 거칠게 세수했다.
이제야 좀 시야가 보이는 듯 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답답한 놈이었는지,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허나, 기분은 오히려 후련했다.
조금도 씁쓸한 감정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속이 시원한 기분이었다.
‘다시 시작하자고, 최태준.’
짝! 탕에서 몸을 일으킨 최태준이 자신의 두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뺨이 얼얼했지만 정신을 차리기엔 적당한 충격이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웃고 있었다.
‘근데··· 다시 오려면 예약을 해둬야 하나?’
거의 99%에 달하는 재방문 의사!
거기엔 작은 깨달음을 얻고 나온 프로야구선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최태준은 찜질방을 나서기 전에 다시 한 번 안마샵에 들러 예약부터 잡았다.
* * *
어딘가로 향하는 택시 안.
좌석에 등을 기댄 강태한은, 스마트폰 화면의 기사를 눈으로 읽으며 싱긋 웃었다.
[최태준, 연이은 무실점으로 순조로운 순항!]
[슈퍼루키의 화려한 부활! 슬럼프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성장통이었나?]
‘생각보다 효과가 빨리 나타나는군.’
최태준의 슬럼프 종식을 전하는 기사들.
물론 이 정도로 메인토픽 감은 아니었기에 기사가 많이 나오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간간히 올라오는 것들은 하나같이 호평들이었다.
부활, 극복, 도약, 무실점.
제목만 봐도 대충 내용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긍정적인 키워드 투성이였으니까.
‘사실은 원래 실력이 나오는 것 뿐이겠지만.’
최태준이 지지부진했던 이유는 쓸데없는 곳에 필요 이상의 심력을 소모하고 컨디션 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이지, 노력과 재능 자체에는 딱히 트집 잡을 곳이 없었다.
컨디션이 회복되고 본래 실력만 돌아온다면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겠지.
물론 강태한이 경기를 지켜본 건 아니었고 야구를 잘 아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 몸으로 경기를 뛸 때에 비하면 환골탈태(換骨脫態) 수준의 실력발휘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마음가짐도 바뀐 것 같고.’
혈도를 깨우고 자극하여 회복력을 끌어올려놓긴 했지만, 결국 그걸 유지하는 건 본인이다.
만약 지금까지처럼 다시 몸을 혹사시켰다면, 지금쯤이면 다시 컨디션에 난조가 찾아오기 시작했을 것이다.
허나 근래 올라오는 기사들의 내용을 보면 그런 기색은 딱히 없어보였다.
적어도 타인의 기대라는 함정에서는 잘 빠져나온 모양.
‘처음 봤던 안색보다는 훨씬 보기 좋군.’
기사 속 최태준의 환한 얼굴을 보고 강태한이 씨익 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도움을 받은 누가 활약을 펼친다는 것이 생각보다 나쁘진 않은 기분이었다.
“손님, 대충 여기쯤으로 나오는데, 여기 맞아요?”
그때 운전을 하던 택시기사가 강태한에게 말을 걸었다.
도로가 깔려있긴 하지만 주변에 건물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택시기사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네, 맞네요. 여기서 내릴게요.”
지도 어플로 위치를 확인한 강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을 마치고 택시에서 내리자, 선선한 산 공기가 기분 좋게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눈앞에는 높이 솟아올라 있는 야산.
그 광경에 강태한의 입 꼬리가 솟았다.
이곳은 다름이 아니라 영약을 구할 가능성이 있는, 그때 강태한이 목숨을 구해줬던 신준호 소유의 야산이었다.
‘느낌이 좋군.’
지도 어플로만 봤을 땐 여기가 맞는지 조금 애매했지만, 공기를 접하니 바로 확신이 생겼다.
터가 좋은 곳에는 좋은 기운이 흐른다.
아직 산에는 오르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영적인 기운이 희미하게 주변을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더군다나 이곳은 좀처럼 사람이 오가지 않는 빈 산.
산의 영기(靈氣)라는 것은 사람의 발길이 닿을수록 점차 무뎌지고 주위로 흩어지는 성질이 있다.
유명한 명산들 중 대부분이 정작 수련을 쌓기엔 적합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뭐 애초에 현대에선 불법이기도 하고.’
만약 계룡산에서 수행을 쌓는다고 산중에 틀어박히거나 약초나 나물을 캔다면 산림공무원들에게 제재를 받게 되겠지.
허나 여기선 그런 걱정이 없다.
사람의 발길도 그리 닿을 일이 없고, 약초들도 날짐승들이 건드리지 않았다면 온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게다가 산 주인에게 ‘뭐든 마음대로 하셔도 좋다’라는 허락까지 받아둔 상태다.
이보다 마음 편하고 설렐 수가 있을까.
지금 강태한에겐 앞에 놓인 야산이 커다란 보물 상자와 크게 다를 것 없이 보였다.
‘슬슬 가볼까.’
뒤에는 커다란 백팩.
겉옷 위에는 휴대용 채집도구들이 수납된 다용도 조끼.
준비를 마친 강태한은 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주변을 유심히 살피며 조금 올랐을까.
아니나 다를까 금방 하나를 찾아낸 강태한이다.
“이건 더덕이군.”
도라지, 인삼과 굉장히 비슷하게 생긴 약초.
워낙 비슷하게 생겨 산삼과 헷갈리기 쉽지만, 산삼은 잎이 다섯 장이고 더덕은 네 장이다.
강태한도 순간 기대를 했다가 잎이 네 장인 것을 보고 실소를 터트렸다.
허나 실망할 건 아니다.
생긴 것만 닮은 게 아니라 효능 자체도 비슷하니까.
물론 약효의 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몸에 좋고··· 무엇보다 맛이 좋다.
‘당연히 챙겨가야지.’
조끼 주머니에 들어있는 작은 삽을 꺼내 조립한다.
원래라면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넉넉히 거리를 두고 흙을 걷어가며 찾아야하지만, 강태한은 망설임 없이 뿌리 옆에 삽을 꽂아넣었다.
기감으로 위치를 미리 파악했기에 가능한 행동.
그 다음에는, 주변의 흙과 함께 삽으로 떠올려 알맹이만 집어가면 그만이다.
“확실히 상태가 좋군.”
전문가는 아니기에 몇 년을 묵었는지 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안에 품어진 영기의 양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이 정도면 그때 마셨던 도라지주 정도의 물건은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다.
즉, 영약으로서 충분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산 초입 구간부터 이런 물건이 나오다니.
그야말로 긍정적인 신호다.
강태한은 등에 맨 백팩에 더덕을 집어넣고, 산을 오르는 걸음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틈틈이 기감을 펼친다.
원래는 사방에 퍼진 기를 타고 감각이 전달되지만, 영기를 어느 정도 머금은 영초(靈草)는 그 기를 일부 흡수해버린다.
즉, 그 근처의 기감이 흐릿해지는 것.
이것만으로 정확한 위치를 찾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그 근방엔 나름 영기를 품은 약초가 있다는 뜻이 된다.
말하자면 영초 레이더라 할 수 있으리라.
“그래도 이건 상상 이상인데.”
강태한은 큼직한 하수오의 흙을 털면서 중얼거렸다.
아직 시간도 그리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등에 맨 가방의 무게가 꽤나 묵직하다.
더덕만으로도 열 뿌리가 넘어가고 하수오, 산도라지, 야관문(夜關門)이나 창출(蒼朮) 같은 약초들이 한 가득이다.
확실히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곳이라 그런가, 기감을 펼칠 때마다 약초들이 수두룩하게 나타났다.
칡 같은 건 하도 많아 적당히 캐놓고 이젠 손도 대지 않을 정도.
낚시에서 던질 때마다 입질이 온다는 말이 있던가.
이곳은 물이 아니고 산이었지만, 지금 강태한의 상황이 딱 그런 꼴이었다.
‘이 정도면 먹는데도 꽤 걸리겠어.’
산에 오른 지 이제 막 두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여기서 채집을 마쳐도 괜찮을 정도의 양이다.
그래도 한 가지 아쉬움이 남아 있었지만···
“···음?”
방금 막 펼친 기감에서, 강태한은 커다란 공백을 느꼈다.
어느 한 지점에서 아예 기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예사롭지 않은 반응에 강태한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윽고, 강태한은 손에 든 채집물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최소 이십 년은 넘게 묵은 놈이군.”
약초의 대명사, 산의 보물, ‘심봤다’란 말의 주인공.
산삼의 등장에, 강태한의 마지못해 남아있던 아쉬움마저 씻은 듯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