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웃의 대부가 칼을 들었다.
“감독님. 전체 시사회 바로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한록은 곧장 해외팀 사람들과 전체 시사회를 진행했다. 회귀 전 일을 전혀 모르는 해외팀 사람들. 그러나 그들도 <오징어 서바이벌>의 시사회를 보더니 표정이 변했다. ‘이건 대박이다.’ 누구라도 이 영화를 보면 느낄 수 있는 사실이었다.
“감독님. 이거 진짜 역작이네요. 관객수 장난 아닐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그러려고 만든 영환데요.”
현차장의 말에 서감독 역시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서감독의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서감독 역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어쩌면 커리어 최고의 역작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부탁합니다, 팀장님.”
아주 드물게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서감독. 그 모습에 주위 사람들이 모두 놀란 모습을 지었다. 그리고 한록은 기분 좋게 서감독의 손을 잡고 말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한록의 말에서 느껴지는 든든함에 서감독 역시 한록의 손을 꽉 붙잡았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해질 영화. <오징어 서바이벌>.
그 영화를 두고, 두 천재가 짧은 악수를 나눴다.
**
<오징어 서바이벌>의 시사회 다음날. 한록은 하정엽에게 보고를 올렸다.
“사장님. <오징어 서바이벌>의 가편집본이 완성되었습니다.”
“완성까진 얼마나 걸립니까.”
“두 달 정도로 예상합니다.”
“알겠습니다. 너무 늦지 않게 진행하세요.”
그렇게 평범한 얘기가 오가던 와중 한록이 하정엽에게 말했다.
“사장님. 가편집본을 한 번 직접 보시겠습니까.”
한록의 말에 의아하다는 듯 눈을 찌푸리는 하정엽.
“내가 그걸 왜 봅니까.”
“사장님께 보여드릴 만큼 자랑스러운 영화라 그렇습니다.”
그 말을 하는 한록은 꽤나 들떠 보이는 모습이었다. 한록의 제안과, 보기 드문 들뜬 얼굴. 하정엽이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록이 이렇게 말한다면 정말 대단한 걸 준비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한록 팀장이 그렇게 말한다면 한번 보도록 하죠.”
그렇게, 시사회실에서 <오징어 서바이벌>의 가편집본을 확인하는 하정엽. 한록은 하정엽의 옆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록이 하정엽에게 <오징어 서바이벌>을 보게 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하정엽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을 믿어준 사람에게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걸 만들었는지, 앞으로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할 건지 기대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오징어 서바이벌>을 지켜보는 젊은 사장의 눈에선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그 모습을 보니 한록에게도 참을 수 없는 뿌듯함이 몰려왔다.
누구나 납득시킬 수 밖에 없는 대단한 영화. ‘그래. 이거다. 이거라고. 이거야.’ 그런 짜릿함이 온 몸을 채운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두 번째 이유가 따로 있었다.
<오징어 서바이벌>의 가편집본을 모두 본 하정엽이 한록에게 말했다.
“이한록 팀장.”
“네.”
“이건 우리 ck를 최고로 만들어줄 영화입니다.”
“네, 그렇게 될 겁니다.”
“얼마가 들든, 뭘하든 상관없습니다. 할 수 있는 마케팅을 다 해보세요.”
바로 앞으로 진행할 마케팅에서 하정엽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낸 한록이 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사장님. 기대하십시오.”
‘얼마가 들든 상관 없습니다. 할 수 있는 마케팅을 다 해보세요.’
사장의 허락을 받았다.
거기에..
“차장님. 신문사들이랑 협의 끝났습니까.”
“응. 주요 신문사 10곳은 전부 1면 계약했어.”
“유선씨.”
“협의회랑 얘기 끝났습니다!”
“수고 하셨어요.”
유능한 부하들이 발로 뛰어서 모든 준비를 끝내준 상황.
“3개월 뒤. <오징어 서바이벌>을 위해 모든 신문의 1면 광고를 가져올 겁니다.”
“이걸 진짜 해낼 줄이야...”
한록의 보고에 정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국의 모든 신문 1면을 동시에 사겠다. 난생 처음 보는 스케일의 마케팅이었다. 한록이 이걸 계획했다는 것도, 유선과 현차장이 이를 결국 실현시켰다는 것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끝날까.’
영화계에서 30년을 근무한 정부장도 미래를 알 수 없는. 그래서 더욱 기대되는 <오징어 서바이벌>. 하지만 아직 걱정되는 게 하나 남아있었다.
“이거 가능하긴 한 거냐? 빅6가 또 매체 독과점이라고 지랄할 텐데?”
<오징어 서바이벌>이 개봉하는 시기, 거의 모든 광고 매체를 싹쓸이한 한록. 그런데 헐리웃에는 아직 빅6에게 광고 매체를 몰아주는 관행이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정부장은 기껏 다 만들어놓은 프로젝트가 빅6 때문에 어그러질까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문제없습니다. 곧 해결될 겁니다.”
“네가? 그건 또 언제 한 거야? 너 무슨 초능력자냐?”
“저 대신 본부장님이 움직여 주셨습니다.”
“최근에 바쁘신 게 이것 때문이었어?”
“네.”
“허...”
한록의 말에 정부장이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본부장님을 부릴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너 뿐일 거다. 대체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그 말에 한록은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지금 이 회의실에서 정부장과 나눴던 대화.
-크게 봐라. 그리고 높이 봐.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해줬던 정부장. 과연 지금 그는 어떤 생각을 할까.
“부장님이 제게 크게, 높이 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한록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정부장 역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그게 내 탓이라고?”
“부장님 영향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죠.”
“실 없는 소리 말고 나가.”
“네, 알겠습니다.”
한록은 별말 없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혼자 남은 정부장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강남 한복판의 높은 고층빌딩. 모두가 야망과 꿈을 찾아 달려나가는 이곳. 그리고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종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무너지는 이곳.
이곳에서 정부장은 한록의 가능성을 보았고, 한록이 무너지지 않길 바라면서 조언을 했다. 그리고 지금. 한록은 이 빌딩에서 누구보다 성공한 남자가 되었다.
‘내 탓이긴, 무슨. 넌 원래 그럴 놈이었다.’
정부장은 한록의 말에 피식 미소를 지었다. 정부장은 자신의 조언이 한록을 바꾸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이 그렇게 대단하지도, 이한록이 남의 말을 들을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만약. 정말 만약, 자신의 조언이 지금 한록에게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쳤다면...
“...기분은 좋네.”
그렇다면, 조금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
그로부터 일주일 후. 한록이 정부장에게 말한 계획이 하나씩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단계.
[스튜디오B, 신작 영화 개봉 예정.]
제롬의 회사가 준비한 영화가 개봉한 것이었다.
[제롬 앤더슨은 신작의 개봉 소식을 알리며, 빅6 위주로 움직이는 헐리웃 체제에 대해 비판했다.]
[이 영화가 개봉하면 빅6란 말은 옛말이 될 겁니다. 앞으로 헐리웃을 논할 때 스튜디오B를 빼놓을 순 없게 될 테니까요. 빅7. 이제 그 말이 현실이 되겠죠.]
제롬의 의미심장한 경고. 그리고-
[만약 이 영화가 실패한다면, 나는 영화계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선전포고.
[빅 세븐이라. 제롬 앤더슨이 꿈을 꾸고 있군.]
[무슨 영화인지는 몰라도 큰 코 다칠 거야.]
[저 말을 어떻게 감당하려 그러지? 투자자들도 다 보고 있을텐데.]
제롬의 계획을 비웃는 빅6.
[아니. 제롬 앤더슨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반면 몇몇 영화사들은 제롬이 가져올 새로운 영화를 기대하고 있었다.
제롬 앤더슨이 영화계에서 사라질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정말 빅7라는 위치를 가져갈 것인가. 어느 쪽이든 이번 영화의 개봉이 많은 것을 바꾸리라고 생각하는 상황.
그 상황에서...
[스튜디오 B의 영화, ‘림보’가 3월 14일 개봉합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 꿈에 대한 영화, ‘림보’가 개봉 날짜를 공개했다.
언론 시사회로 ‘림보’를 미리 보고 온 정부장. 그가 영화가 어땠냐고 묻는 팀원들에게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올해는 정말 스튜디오B가 먹을 수도 있겠는데.”
“그 정도예요?”
“어. 여기에 판도라2까지 나오면...그러면 우리가 이길 가능성이 크지 않다.”
정부장의 말에 팀원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한록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정부장이 한록에게 물었다.
“이한록. 괜찮겠지?”
“네, ‘림보’가 그 정도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팀원들과 달리, 미래를 알고 있는 한록. 한록은 제롬이 ‘림보’를 제작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많은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림보’는 과거처럼 희대의 명작 영화가 될 것이고 스튜디오B라는 이름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제롬은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제롬은 칼을 갈고 있을 것이다.
올해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했을 제롬. 하지만 이 상황을 오히려 이용할 계획은 이미 다 만들어두었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이 되지 않았다. 한록이 신경쓰고 있는 것은 오직 ‘림보’의 마케팅이었다.
‘닉이 어떤 방식으로 이 영화를 사람들한테 선보일까.’
긴장. 그리고 그만큼의 기대에 마음이 두근거린다. 그리고-
'...이래서 이 사람이 천재란거구나.'
한록의 우상이자 천재 마케터 닉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인셉션의 개봉 전날. LA에는 60M짜리의 초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었다.
빌딩 20층 높이의 스크린은 도로를 통제하고 그 한복판에 설치되었으며, 도로 곳곳에 놓인 카메라로 도로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었다.
한 마디로 도시 중간에 초대형 거울이 설치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은 ‘림보’의 명장면인 L자로 접혀버린 도시를 그대로 재현했다. 사람들은 닉의 스크린 안에서 접혀버린 도로를 발견했고, 그 안에서 하늘을 향해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림보’를 예매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인터넷을 발칵 뒤집어 놓은 닉의 마케팅. 한록이 사람들이 올린 영상들을 보며 감탄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개봉 첫날부터 1위할 겁니다. 그것도 압도적으로요.”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뉴욕이 아니라 한국이라서 아쉬울 정도의 마케팅. 실제로 오로지 그 스크린을 보기 위해 뉴욕으로 여행을 가는 사람들마저 있을 정도였다.
[‘림보’ 3월 2주차 스크린 점유율 40%.]
아니나다를까. 한록의 예상처럼 ‘림보’는 엄청난 기세로 모든 영화관의 예매율 1위를 탈환했다.
그리고 드디어 제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림보’, 3주째 예매율 1위의 자리를 지켜...]
4월 중순. 이제는 모두가 ‘림보’란 영화를 알게 되었을 때. 제롬이 보낸 메일 하나가 협의회의 모두에게 도착했다.
[발신인:제롬 앤더슨]
[필름포럼 가입 요청서]
제롬이 빅6에 가입을 요청한 것이다.
**
미국의 모든 영화 정책을 결정하는 곳. 빅6 영화사들로 이루어진 집단, ‘필름 포럼’.
그리고 필름포럼에 올라갈 안건을 결정하는 미국 유력 영화사들의 모임, 필름포럼 협의회.
헐리웃을 대표하는 기관은 필름포럼 협의회지만, 실제로 안건의 결정권을 가진 곳은 필름포럼이다. 마치 UN회원국과 UN 상임이사국의 관계라고 볼 수 있는 두 단체의 관계.
그런데 제롬 앤더슨이 이제 스튜디오 B도 상임이사국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헐리웃은 빅6가 아니라 빅7의 시대가 될 거라고.]
필름포럼 가입에 대해 묻는 기자. 그의 질문에 제롬은 여유롭게 웃으며 답했다.
[스튜디오 B가 빅6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면, 필름포럼 가입은 당연한 차례라고 봅니다.]
40년간 단 한 번도 신규 회원을 받지 않은 필름포럼. 그리고 여태 아무도 넘본 적 없던 필름포럼과 빅6의 아성에 도전하는 제롬. 제롬의 발언에 빅 6는 불안함을 느꼈고, 긴급
임원회의를 소집했다.
[우리는 규정대로 처리하면 됩니다. 그럼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믿고 있는 구석이 있는 빅6. 그들이 말하는 것은 바로 협의회 규정이었다.
‘협의회 회원 3분의 1 이상이 동의하면 필름 포럼에 가입에 대한 회의를 개최해야 한다.’ 라는 규정.
[아무도 찬성하지 않을 겁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나설 필요도 없어요. 필름포럼에 가입한다는 건 스튜디오 B에 엄청난 발언권이 생긴다는 거니까요.]
[모두 반대하겠죠.]
[네.]
[누가 다른 회사가 권력을 잡는 걸 보고 싶겠습니까.]
빅6의 의견은 같았다. ‘아무도 다른 회사가 잘 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이번엔 스튜디오 B가 틀렸다.’
[제롬 앤더슨의 도전은 실패할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족스러운 결론을 내렸을 때. 누군가 회의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회의가 열리는 파라마운트 픽쳐스의 언론 담당자였다.
[아론. 지금은 회의중-]
[매니저. 꼭 들으셔야 하는 얘기입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상사의 말을 가로막는 파라마운트의 직원 아론. 빅6 모두는 그의 표정에서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읽었다. 아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메일이 왔어요. 협의회 회원중 32곳이 제롬의 필름 포럼 가입에 동의를 발표했습니다.]
[뭐라고요?]
[언제 말입니까?]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아론의 말에 충격을 받은 빅6의 간부들. 파라마운트의 매니저가 다급하게 아론에게 되물었다.
[누가 보낸 메일이야. 대표자가 누구지?]
[발신인은...]
제롬 앤더슨. 헐리웃의 대부가 칼을 갈았다.
[CK ENM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한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