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36화 (259/263)

작전이 바뀌었다.

“자네 특기를 보여줄 시간이네. 나 대신 협의회 회의에 다녀오게.”

“네, 알겠습니다.”

최경준 대신 필름포럼 협의회 회의에 참여하게 된 한록. 한록은 작년 CK ENM의 성장과, 신생 회사가 헐리웃에서 진입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 브리핑할 예정이었다.

[이번 발제는 CK라는데?]

[그래. 누구더라. 그...<식물> 탈출 게임 기획한 사람이 온다고 들었어.]

[아, 그 이름 어려운 남자.]

[이한 맞나?]

[어. 맞을 걸. 꽤 유명하던데, 얼굴은 처음 보겠네.]

한록이 협의회 회의에 참여한다는 소식이 돌자...

[그리고 빅6도 온대.]

원래 협의회 회의에는 참여하지 않는 빅6마저 회의에 참여의사를 밝혔다.

[왜?]

[요즘 제롬이랑 CK가 자꾸 빅6를 물고 늘어지잖아. 한번 싸워보겠다 이거지.]

[재밌는 구경하겠네. 나도 회의 참여 신청해야지.]

[사람 엄청 몰리겠는데.]

빅6와 제롬. 그리고 CK가 협의회 회의에서 한판 붙는다. 그런 소문이 헐리웃에 돌았고, 사람들은 곧 다가올 빅 이벤트에 회의에 참여하고자 신청서를 제출하기 시작했다.

“대단한 걸 준비해 가야겠군.”

그 소식에 오히려 ‘바라던 바다’라는 표정을 짓는 최경준. 최경준은 이번 기회에 CK가 무시하지 못할 곳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생각이었으니, 관객은 많을수록 좋았다. 최경준이 자신의 앞에 앉은 한록에게 말했다.

“협의회 회의가 한 달 뒤네. 그 동안 준비가 가능하겠나?”

“충분합니다. 대신, <오징어 서바이벌>의 관리는 현차장과 김유선 주임에게 맡기겠습니다.”

<삼일의 삶> 마케팅과 협의회는 자신이, <오징어 서바이벌>은 잠시 현차장과 유선에게 맡기기로 결정한 한록. 한록의 결정에 최경준이 답했다.

“현차장은 나쁘지 않지. 그런데 김유선이라.”

유선의 이름이 나오기 전 느껴진 묘한 침묵. 최경준이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김유선 주임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

“김유선 주임이면 충분할 겁니다. 현차장과 가장 잘 맞는 사람이고, 본인 능력도 출중합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최경준이 더 이상 반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건 한록의 말에 반대하고 싶지 않아서이지, 유선을 인정하기 때문에 하는 말은 아니었다.

언제나 유선에 대해 기대가 없는 최경준. 최경준은 젠틀한 태도와 다르게 부하들에게 아주 높은 기준을 적용하는 사람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경준에게 실망스러운 부하였다. 그건 유선이 꾸준히 한사람의 몫을 해내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최경준의 마음에 차는 부하는 한록 하나뿐이었다.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보여주게.”

유일하게 자신의 마음에 드는 부하, 한록. 그런 한록을 헐리웃에 보여줄 생각에 묘하게 들뜬 얼굴의 최경준.

그 모습을 보고 한록은 생각했다.

‘유선씨. 우리도 한 번 보여줍시다.’

자신 또한 이 사람에게 유선이란 사람을 보여주고 싶다고.

**

그로부터 일주일 후.

[한! 이게 얼마만이지?]

알렉산드로 감독이 <삼일의 삶>의 광고 촬영을 위해 한국에 방문했다.

[오랜만입니다, 감독님.]

[그렇게 미국을 드나들면서 얼굴 한 번 안 보여주다니. 닉이 한을 보고 와서 얼마나 자랑을 했는지 알아?]

[죄송합니다. 많이 바빴습니다.]

[흠. CK라면 그럴만하지.]

한록과 알렉산드로 감독이 CK의 로비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지하 1층의 시사회실로 향하며 알렉산드로 감독이 한록에게 물었다.

[<삼일의 삶>으로 대단한 걸 준비하고 있던데. 존 패트릭이랑, 니켈스도 전화를 받았다고 들었어.]

유명한 감독들의 이름을 말하는 알렉산드로 감독. 그 말에 한록이 웃으며 말했다.

[네. 하지만 주인공은 감독님일 겁니다.]

[듣기 좋은 말만 하는군.]

한록의 말에 알렉산드로 감독 역시 씩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그 녀석들은 한국에 올 필요 없다며. 나는 왜 여기까지 부른거지?]

[보면 아실 겁니다.]

[그게 무슨...]

그렇게 말하며 시사회실의 문을 연 한록.

[...이런!]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어리둥절해 하던 알렉산드로 감독이 곧 탄성을 내뱉었다.

[이것 때문이었군. 그래, 그럼 와야지!]

그리고 아주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

광고 촬영을 마친 알렉산드로 감독. 생각보다도 더 짧은 촬영에 알렉산드로 감독은 신이 난 얼굴이었다.

[말해준 대로 빨리 끝났군. 이제 더 할 건 없는 건가?]

[네, 맞습니다.]

[그럼 부탁이 있는데. <삼일의 삶>을 한번 더 보고 싶어.]

[네, 알겠습니다.]

알렉산드로 감독이 한국까지 와서 선택한 것은 <삼일의 삶>을 보는 것이었다. 한록과 해외팀만큼이나 <삼일의 삶>에 애착이 있는 알렉산드로 감독. 시사회실에서 혼자 <삼일의 삶>을 감상하는 알렉산드로 감독의 얼굴에는 아주 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일, 꿈, 젊음과 추억.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담은 영화 <삼일의 삶>.

‘좋은 영화다.’

<삼일의 삶>은 알렉산드로 감독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 중에 하나였고, 아주 훌륭한 영화였다. 하지만 이 영화가 헐리웃에서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생긴 의문이 하나 있었다.

‘과연 이 영화가 헐리웃에서도 성공할까?’

한국의 어부와 회사원의 삶을 다룬 영화 <삼일의 삶>. 미국인들에게는 너무나 낯선 소재였다. 매니아와 시상식에서 좋은 평가를 받겠지만 흥행은 아마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CK가 이렇게 성공가도를 달리는 상황에서 한록이 <삼일의 삶>을 그저 좋은 영화로 끝낼 리는 없었다. 한록은 분명 <삼일의 삶>으로도 새로운 마케팅을 시도할 거고, 미국인들을 사로잡으려고 할 것이다.

‘과연 이 영화가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과연 CK가 다시 한번 자신을 증명할 수 있을까?’

‘과연 이한록이 이번에도 성공할까?

끝없이 드는 호기심. 그리고 기대. 여러 가지 감정 속에서 알렉산드로 감독은 생각했다.

만약 이번에도 한록이 성공한다면.

‘제롬. 우리는 이 광고를 찍은 걸 후회할지도 몰라.’

그때 CK는 정말 무서운 상대가 되어있을 것이라고.

**

알렉산드로 감독을 보내고, 사무실로 돌아온 한록.

‘미국 프레젠테이션은 한국과는 다르지.’

한록은 곧 있을 협의회 회의를 생각하고 있었다.

최경준. 빅6. 알렉산드로. 헐리웃. 모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 이번에도 모두를 압도할 프레젠테이션을 보여줘야 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미국인들이다.

스피치 문화의 본고장인 미국. 한국과 달리 미국은 좀 더 유쾌하고 감성적인 프레젠테이션을 선호했다. 대표적인게 바로 스티브잡스의 애플 제품 소개 프레젠테이션들이었다. 한마디로...

‘내가 해오던 발표와는 많이 다르겠지.’

평소 한록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발표를 해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곤란하지는 않았다.

‘이걸 잘 아는 사람이 있지.’

왜냐면 한록의 주위에는 너무나 멋진 동료가 있으니까.

생각을 마친 한록이 ‘멋진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과장님. 잘 지내십니까. 여쭤볼게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미국에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한국보다 미국 문화에 익숙한 유학파 출신 최과장. 최과장은 이런 일에 가장 좋은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최과장이 한록의 전화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 팀장님. 사적인 연락인가요? 아니면 일 얘기?]

“일 얘기요.”

[차단할게요. 그간 즐거웠어요.]

“연락하라면서요.”

[농담이에요.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필름포럼 협의회 회의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제가 발표를 해야하는데, 미국식 프레젠테이션은 어떤건지 최과장님한테 조언을 받고 싶어서요.”

[아...]

한록의 말에 알 수 없는 감탄사를 말하는 최과장. 최과장이 한록에게 물었다.

[제가 정리한 자료가 있는데 보내드릴까요?]

“보내주셔도 되는 겁니까? 개인적인 내용일 텐데요.”

[괜찮아요. 이미 누가 받아갔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최과장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최과장이 따뜻한 목소리로 진실을 밝혔다.

[어제 현차장님이 저한테 똑같은 거 물어보셨어요.]

“...현차장님이요?”

한록의 질문에 최과장이 답했다.

[네. 미국식 프레젠테이션에 대해서 공부를 좀 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협의회에서 발표를 해야하는 한록. 현차장은 그런 한록을 돕기 위해 최과장에게 자료를 요청한 것이다.

“현차장님이, 저보다 먼저...”

그것도 한록보다도 먼저. 이건 현차장이 한록만큼이나 프레젠테이션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있단 뜻이었다.

‘...차장님이 달라지셨다.’

몇주 전, 한록과의 대화 이후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현차장. 현차장은 이제 명령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록이 지시하기도 전에 먼저 움직이며 한록에게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감상에 젖어있는 한록에게 최과장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팀장님. 현차장님한테 퇴사한 사람 너무 괴롭히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최과장의 말에 한록 역시 웃으며 답했다. 최과장의 말이 진심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메일 보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한국 오시면 같이 술 한잔 해요.”

[그래요. 비싼 곳에서 사주세요.]

“당연하죠.”

그리고 한록이 전화를 끊기 전 최과장이 말했다.

-과연 현주훈이 최윤일을 대신할 수 있을까?

CK ENM 모두가 하는 생각. 그러나 최과장은 알고 있었다.

[차장님한테 부탁하길 잘했네요.]

현차장은 역시,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최과장의 말에 한록이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

이틀 뒤. 해외팀의 정기회의.

“필름포럼 협의회에서 발표할 자료가 필요합니다. <시험>, <수면>, <마지막 공연>, <식물>의 데이터 중 주목할만한 부분이 있는지 확인해주세요. 긍정적인 내용이면 뭐든 좋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 외에 의견 말하고 싶은 분 계십니까.”

“나.”

한록의 말에 현차장이 번쩍 손을 들고 말했다.

“요새 미국식 프레젠테이션을 좀 공부해봤는데, 유머랑 농담이 많이 들어가더라고. 이팀장이 발표할 때도 이런게 좀 반영됐으면 좋겠어. 이팀장은 발표하느라 바쁠테니까 이 부분은 내가 한 번 짜볼게.”

최과장과 얘기했던 부분을 말하는 현차장. 그 말에 한록이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헐리웃 모두가 지켜보는 협의회 회의에 참석한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최과장이 빠진 후의 해외팀을 증명해야한다.

해외팀이 각종 시험대에 오른 이 상황.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네, 그 부분은 차장님께 맡기겠습니다.”

아무것도 불안하지 않았다.

**

그리고 다시 한 달이 지나 7월.

“유선씨. 이쪽이에요.”

한록과 현차장. 그리고 유선은 필름 포럼 협의회의 회의장에 도착해있었다.

2년 전 해외팀이 출범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날. 해외팀 모두는 사무실 벽면에 걸린 TV로 필름포럼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TV로만 바라보던 곳에 해외팀이 도착했고,

[CK ENM. 입장확인했습니다.]

그 일원으로 당당히 회의장에 발을 올렸다.

[디즈니! 여기 좀 봐주세요!]

[오늘 왜 협의회 회의에 참여한 거죠?]

원래 협의회 회의에는 참여하지 않는 빅6의 등장에 몰려든 기자들. 그리고-

[얘기해볼 안건이 올라와서요.]

싸늘한 눈빛으로 한록을 바라보는 빅6의 임원들.

‘드디어 이 녀석들 얼굴을 보는군.’

CK를 노려보는 빅6의 임원들.

‘빅6가 협의회 회의에 나타났다.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날 거야. 특종이다!’

회의장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

‘이 시기에 <삼일의 삶>이라니. CK는 무슨 생각이지?’

빅6와 제롬, 그리고 CK의 싸움을 지켜보는 소규모 영화사들.

모두가 각자의 궁금증을 가진 채로 회의실에 입장했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회의 전에 얘기할게 있습니다.]

[진. 디즈니의 차례는 2부에서...]

[아뇨. 그 전에 해야 할 말입니다. CK, 그리고 협의회 전체에 묻겠습니다. 올해 필름포럼의 스크린을 전부 CK ENM이 가져갔더군요. 왜 협의회가 CK ENM의 편의를 봐주고 있는 거죠?]

[진.]

[협의회 임원진과 CK ENM 사이에 유착이 있는 게 아닌가요?]

빅6는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당황한 표정의 협의회 사람들과 한록을 바라보는 제롬. 제롬의 시선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해결하겠다.’

라는 의미였다.

-좋습니다.

그런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는 제롬. 제롬의 반응을 확인한 한록이 옆자리에 앉은 현차장에게 속삭였다.

“차장님.”

“응, 이팀장.”

“프레젠테이션 파트를 둘로 나누겠습니다. 이 파트는 차장님이 맡아주세요.”

현차장과 함께 준비한 ‘미국식 프레젠테이션’의 파트를 현차장에게 넘긴 한록. 한록의 말에 현차장이 놀라서 물었다.

“...내가? 이팀장은?”

“저는...”

작전이 바뀌었다.

유쾌하고, 감성적인 프레젠테이션. 유머가 섞인 설득. 그런 것은...

“일단 저 쪽을 먼저 죽여놔야 할 것 같아서요.”

상대를 꺾어놓은 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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