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LA 센트럴 씨어터의 계약권을 가져온 최대리.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사실에 한록이 최대리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분석 데이터를 보냈어요. 제 데이터는 영화계 어느 분야에서든 신뢰 받거든요.”
“그래도 이미 다음 분기까지 상영작이 차 있었을 텐데요.”
“맞아요. 그 중에 한 자리를 뺏어 온 거예요. 아마 유니버설 스튜디오 영화였을 거예요.”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저도 알아봤지만 이미 계약이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미국은 정글이거든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고, 무슨 일이든 당할 수 있죠.”
“그래도-”
“아. 가장 중요한 걸 빼먹었네요.”
여전히 의문을 가진 한록의 모습에 최대리가 가볍게 덧붙였다.
“저도 미국에선 손 꼽히게 유능한 사람이라서요.”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최대리의 모습. 그 모습에 한록이 헛웃음을 지었다. 한록이 엄청난 일을 해올 때면 사람들이 보내던 반응이었다. 이제는 그 사람들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정도로 해왔으면 말을 할 수 밖에 없겠네요. 무슨 영화인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좋아요. 지금 말고, 술 마시면서 제대로 말해줘요. 무슨 영화고, 왜 좋아하고, 그걸 왜 마케팅하고 싶은지 전부요.”
“그렇게까지...”
“해야하지 않을까요? LA 센트럴 씨어터를 가져왔는데.”
“해야겠네요.”
최대리의 말에 한록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최대리가 말했다.
“가볼게요. 이따 미팅 때 봐요.”
그렇게 말하며, 사무실을 나서는 최대리. 그가 문을 나서기 직전 한록에게 말했다.
“기대할게요.”
*
최대리 나가고 혼자 남은 한록. 한록이 최대리가 가져온 보고서를 보며 한 번 더 헛웃음을 흘렸다.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군.’
최대리는 자신의 본진인 미국에 가니 말 그대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한록은 그런 최대리에 대해 새삼스레 감탄했다. 그리고...
‘이걸 말하는 날도 오는구나.’
최대리의 요구 조건에 대해 생각했다.
아주 오랫동안 품어왔던 영화. 그리고 꿈. 아무한테도 해본 적 없는 말들.
그걸 말해야하는 상황이 왔다. 하지만 떨리거나, 두렵거나, 비웃음을 당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최대리님은 그 얘기를 듣고 뭐라고 말하려나.’
오히려 최대리의 답변이 궁금해졌다.
긴장보다 앞서는 호기심과, 두려움보다 앞서는 설렘.
그때서야 한록은 자신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이제 정말 준비가 된 거야.’
자신이 꿈을 이룰 준비가 되었다고.
한록이 최대리의 보고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
이제는 꿈을 말하고, 실현시킬 준비가 됐다는 설렘.
그러나 그 설렘은 오래가지 못했다.
“팀장님.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네.”
헐리웃의 빅5 회사 중 하나이자, 업계 2순위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걸려온 전화.
“LA 센트럴 씨어터를 돌려주지 않으면 보복을 가하겠대요.”
그곳에서 한록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었다.
그때 한록의 머리 속에 방금 전 최대리와의 대화가 스치고 지나갔다. 최대리가 의미심장하게 하던 말.
‘미국은 정글이거든요.’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당할 수 있죠.’
정말로, 큰일이 났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긴급회의를 소집해.”
이 상황을 바로 최경준에게 전달한 한록. 최경준이 한록의 말을 듣자마자 장비서에게 말했다.
“법무팀 강필준 팀장. 판권부 오창혁 부장. 해외팀 최윤일 대리한테 지금 당장 회의실로 오라고 해. 나는 사장님께 전화하겠네.”
“사장님은 지금 계열사 회의 중이신...”
“장비서.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 같군.”
최경준이 장비서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다시는 미국에서 CK란 이름을 꺼내지 못할 수도 있어.”
그리고 바로 하정엽에게 전화를 걸었다.
*
30분만에 소집 된 긴급회의. 최경준과 한록. 최대리. 법무팀의 강필준 팀장과, 판권부 오창혁 부장.
“사장님.”
“앉으세요.”
그리고 하정엽이 모인 회의였다.
“발언권 신경쓰지 말고, 각자 알고 있는 건 전부 얘기하세요.”
계열사 미팅을 중단하고 온 하정엽. 하정엽은 평소 격식을 차리는 것과 달리 의자에 앉자마자 얘기를 꺼냈다.
하정엽의 급한 태도와 사장의 등장에 잔뜩 긴장해서 허리를 펴는 오창혁 부장. 그 두가지는 지금 이 사태가 어떤 일인지 자세히 말해주고 있었다.
‘진짜 큰 일이 난 거다.’
영화사업본부, 아니 CK ENM에는 희대의 위기가 닥쳐 있었다.
하정엽이 말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LA 센트럴의 자리를 뺏긴 것에 대해 보복을 할 거라 말했다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정확히 어떤 보복을 할 것 같습니까.”
세계 2위 영화사는 어떤 식으로 CK를 무릎 꿇릴 것인가. 그 질문에 최대리가 답했다.
“직접 전화가 왔다면 어중간한 방해를 하는 선에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직접적인 타격을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 겁니까.”
“유니버설 스튜디오 정도의 회사라면, 아마...”
최대리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영화 상영 자체를 막아버릴 겁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하정엽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영화 상영 자체를 막아버린다.’ 한국 영화계에선 이해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영화관들에게 압박을 줄 겁니다. 지금 상영중인 CK의 영화를 다 내려라,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 자기들 영화를 배급하지 않겠다고 말하겠죠.”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배급을 중단하면 영화관들도 타격이 클텐데.”
“그러니 영화관들도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거대 기업들이 경쟁자를 죽이거나 보복을 하려고 가끔 사용하는 수법입니다.”
하정엽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최대리. 그러나 최대리의 얼굴엔 의문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견제가 되는 회사나, 큰 트러블이 있는 회사에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 정도 안건에 도입할 방법은 아니에요.”
“그건 우리가 CK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에 답한 것은 최경준이었다.
“한국 영화. 한국 제작사. 한국 배급사.”
하태준이 미국 진출을 결국 포기했던 이유. 바로.
“우리한테 줄 자리는 없다는 거지.”
아예 헐리웃이라는 업계 자체로 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
최경준의 말에 아무런 답이 없는 최대리. 최대리만이 아니라, 이곳의 모두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그럼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엄청난 막막함이었다.
“지금 <수면>과 계약이 완료된 상영관이 있나?”
법무팀 강팀장에게 묻는 최경준. 최경준의 말에 강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전부 논의 단계입니다. 그리고...논의 중인 영화관 중에 UP 씨어터의 비중이 큽니다.”
“UP 씨어터면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자회사지.”
“네, 맞습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말을 따라 분명 계약을 취소할 겁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최대리가 말했다.
“이렇게 되면 정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예 상영을 못하게 될 수도 있어요. 지금은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최대리의 단호한 말. 그 말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한록이 입을 열었다.
“LA센트럴을 포기하잔 말입니까.”
한록은 5년 후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평론가, 그리고 수준 높은 관객을 통해 선정되는 LA센트럴의 기대작.
독립 영화관인 LA센트럴이 가진 명성은 점점 높아지고, 앞으로 1년 후면 ‘LA센트럴의 인정을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가 영화를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가 된다. 그리고...
“네, 맞습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편을 들어주자는 건 LA센트럴을 포기하잔 것과 같은 말이었다.
“LA 센트럴도 자존심이 세기로 유명한데요. 우리가 갑자기 상영을 포기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 같습니까?”
“아마 불만을 가지겠죠. 사정이 어떻든, 앞으로 CK 영화는 받지 않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앞으로 LA 센트럴에 진입할 기회를 영영 놓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사실상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LA센트럴을 포기하자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편이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적으로 돌리는 것보단 나으니까요.”
LA센트럴이냐, 유니버설 스튜디오냐. 한록과 최대리는 앞에 까마득한 상사들이 있다는 것도 잊은채 치열하게 대화를 주고 받았다.
“조용.”
그리고 둘의 말을 멈추게 한 것은 하정엽이었다.
-까득.
의자의 팔걸이를 검지손가락으로 두드리는 하정엽. 하정엽이 생각에 잠겼을 때 하는 버릇이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다리세요.”
생각에 잠긴 하정엽과, 숨 막히는 정적만이 흐르는 회의실.
“사장님.”
그때 한록이 입을 열었다.
“기다리라고 했을텐데요.”
날카롭게 말하는 하정엽.
“아뇨, 기다릴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하정엽보다 더 날카롭게 대단하는 한록.
“이한록 팀장!”
강필준 팀장이 깜짝 놀라 한록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하정엽은 차가운 눈으로 한록을 노려보았으며-
“뭡니까.”
한록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사장님. 선택지는 하나뿐입니다. LA 센트럴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유니버설과의 관계는 신경쓰지 않는 겁니까.”
“아뇨, 신경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록의 엄청난 발언이 이어졌다.
“CK는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적으로 돌려야 합니다.”
세계 2위의 영화회사이자, 전화 한 통으로 CK를 박살낼 수도 있는 대기업. 유니버설 스튜디오.
그런 곳을 적으로 돌려야 한다는 한록의 말.
그 말에 강필석 팀장과 오부장이 크게 반대했다.
“이한록 팀장. 지금 장난 합니까?”
“이팀장! 그게 무슨 말입니까.”
“조용히 하라고 했을텐데요.”
그리고 하정엽이 그들의 말을 막았다.
강팀장과 오부장의 말을 중단시키고 한록을 바라보는 하정엽. 하정엽은 ‘어디 더 해 봐라’ 라는 얼굴이었다. 한록이 이렇게 나올때마다 무언가 큰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정엽의 허락에 한록이 입을 열었다.
“사장님. 지금은 유니버설을 적으로 돌리고, 싸울 때입니다. 만약 여기서 유니버설의 말을 듣는 모습을 보이면...”
한록이 말하는 것은 단순히 유니버설 스튜디오나 LA 센트럴 씨어터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앞으로 헐리웃의 모든 회사가 CK를 이렇게 대우하게 될 겁니다.”
헐리웃 전체에 대한 얘기였다.
-지금. 싸워서 이겨야 한다.
“여기서 물러나면, CK는 싸워보지도 않고 영영 패배자가 될 겁니다.”
-살아남을 방법은 그것 뿐이다.
한록의 말에 하정엽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최경준에게 말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앞으로도 계속 상영을 방해할 수도 있는 겁니까.”
“그걸 방지하기 위해 영화관들과 장기 계약을 추진 중입니다. 장기 계약을 맺으면 최소 스크린 수가 보장됩니다. 다만, 한국과 달리 조건이 있었습니다.”
“어떤 조건입니까.”
“CK의 영화에 충분한 관객이 들 거라는 점을 증명하라고 했습니다. 그 대상이 <시험>과 <수면>, 그리고 서감독의 신작이었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관객수로 증명하라.”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방해로, 아예 상영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는 <수면>. 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을 막으려면 <수면>에 충분한 관객이 들어온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영화관이 없는 상태에서.
-놀라울 만큼의 관객수를 모아라.
-싸워서 이기려면 그래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전제 조건이었고...
“이한록 팀장. 할 수 있겠습니까.”
하정엽은 그런 일을 늘 해내는 사람을 한명 알고 있었다.
“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이번에도 같은 대답을 건네주었다.
한록의 말에 하정엽이 결정을 내렸다.
“이한록 팀장의 말대로 진행합니다.”
그리고 한록을 보며 말했다.
“우리를 건드려선 안 된다는 걸 보여주고 오세요.”
*
그렇게,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대항하기로 결정한 CK.
[LA 센트럴은 그대로 진행합니다.]
CK가 유니버설 스튜디오에게 의사를 전달했고.
“팀장님. UP 씨어터 마이애미에서 상영 취소되었습니다.”
“뉴욕에서 <수면>을 상영할 수 없다고 합니다.”
“텍사스 UP 씨어터에서 계약 취소 했습니다.”
“워싱턴 모든 UP 씨어터에서 상영 취소 한다고 합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소속의 영화관들이 즉시 <수면>의 상영을 취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롬. 오랜만이에요. 윤일입니다.]
[CK ENM의 최경준 본부장입니다. AM 씨어터 플래닝 디렉터와 연결 부탁합니다.]
[CK ENM 이한록 팀장입니다. 뉴욕 영화협동조합의 번호를 알고 싶습니다.]
[네. 제롬의 도움이 필요해서요.]
[AM씨어터에 전할 용무는...]
[아, 용건이요.]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CK의 사람들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