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66화 (147/263)

아주 미친놈이구만.

“저는 지금 증명했습니다.”

서감독에게 보내는 한록의 말.

“3번 카메라. 이한록 과장님 잡으세요!”

송pd는 그걸 전부 방송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반응은, 당연히...

[이건 영화다]

[간 지 폭 풍]

[아니 이거 진짜 대박인 듯 무슨 예선전이 영화보다 재밌냐 ㅋㅋ]

[CK 요즘 대박이네...]

엄청나게 좋았다.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인터넷 반응을 살피는 송PD. 오디션의 여왕이라 불리는 그녀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번 예선전과 <도착지>가 만든 드라마에 열광하고 있었다.

[저 잘생긴 사람 이름이 뭐라고요??배우라고 했죠?]

[아오 CK 직원이라고 몇 번 말해야 알아들음?]

그리고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당연히 한록이었다.

“마지막 투표 들어가겠습니다.”

송PD가 사회자의 이어폰으로 연결된 마이크에 말했다.

“자, 이제 방송을 마무리할 시간이네요. <수면>과 <도착지>팀 전부는 무대로 올라와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말에 <수면>과 <도착지>의 팀이 모두 다시 무대로 올라왔고, 자리에 앉았다.

한록은 여전히 빨간 불빛이 넘실거리고 있는 객석을 바라보았다.

‘최종 투표도 이렇게 나오진 않을 거다.’

<수면>의 GV 후에는 <수면>에 몰표가 됐고, <도착지>의 GV 후에는 모든 사람이 <도착지>에 투표를 했다.

다시 말해, ‘진짜 결과’는 아직 알 수 없는 상황.

“최종 투표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과 함께, 객석에 있는 모든 패널의 불이 꺼졌으며-

“...헉.”

동시에 무대의 불도 꺼졌다.

“참가자 여러분은 안대로 눈을 가려주시기 바랍니다.”

안대로 눈을 가린 한록. 이제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어둠 뿐이었다.

“관객분들은 5초 안에 선택을 마쳐주시기 바랍니다.”

어두워진 무대에서 들리는 사회자의 목소리.

“5.”

그 카운트 다운을 들으며 서감독은 생각했다.

“4.”

‘아직도 이한록의 말이 진실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3.”

‘아직도 <수면>이 <도착지>보다 대단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2.”

‘그러니 시상식에선 내가 승리할 거다.’

“1.”

‘하지만.’

“투표 종료합니다.”

‘그렇지만.’

“결과 공개합니다. 참가자 여러분은 안대를 풀어주세요.”

사회자의 말과 함께, 서감독이 안대를 내렸다. 그리고 객석에 있는 패널에선 한꺼번에 불이 들어왔다.

[도착지!]

[저는 도착지요]

[도착지 이겨라~~]

객석을 물들인 붉은 불빛.

‘그래.’

반짝거리는 붉은 불빛을 보고 웃는 한록. 한록을 보며, 서감독은 깨달았다.

여전히 서감독은 자신이 대상을 받을거라고 생각하고, <수면>이 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졌다.’

도착지를.

“수고하셨습니다, 감독님.”

그리고 자신에게 웃으며 말하는 이 남자를.

*

“최종투표 결과, 160대 140으로 도착지의 승리입니다!”

잠시후, 사회자가 결과를 집계했다.

“이과장!”

“선생님, 이과장님!”

결과가 나오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록을 끌어안은 이연옥. 그러자 우감독도 덩달아 둘을 끌어안았다.

“태우야. 고맙다.”

우감독과 이연옥에게 안긴채, 겨우 손을 뻗어 태우의 어깨를 두드리는 한록.

“...나도!”

그 감동적인 모습을 지켜보던 현차장이 결국 차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포옹에 합류했다.

“<도착지>팀. 동료애는 나중에 나누시고, 예선전의 승자가 된 소감을 말씀해주시겠어요? 이연옥 선생님?”

“어머, 네.”

사회자의 말에 이연옥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마이크를 집었다. 그리고 우감독은 이연옥의 곁에 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GV팀과 함께 무대 아래로 내려온 한록.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 시상식에서 상을 탄 것보다 이게 더 기쁜 순간이 될 것 같아요.”

한록은 흐뭇한 얼굴로 이연옥과 우감독의 수상소감을 지켜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실제 영화의 수상은 심사위원이 결정하는 일이었고, 한록이 심사위원단의 평가에 개입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한록은 <도착지>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역량을 끌어냈고, 이제는 시상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기다리는 일만이 남아있었다.

‘내 역할은 끝났다. 이제 늘 그렇듯 뒤에서 스포트라이트를 지켜보는 일만 남았어.’

그러나 그건 한록만의 생각이었다.

“그리고...마지막 타자가 남아있죠.”

이연옥에 이어 수상소감을 마친 우감독. 그가 무대 아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들 기다려요.”

우감독이 바라보고 있는 곳. 그리고 무대 위의 모두가 바라보는 한 사람.

“이과장님.”

바로 한록 자신이었다.

“이과장, 빨리!”

한록은 현차장의 손에 이끌려서 무대 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한록이 오늘 중 유일하게 예상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제가 수상소감이요?”

“<도착지>를 우승자로 만들어주신 분이잖아요. 과장님이 아니면 누가 합니까!”

우감독이 한록의 말에 시원하게 답했고, 한록은 얼떨결에 마이크를 받아들었다.

이 업계에서 일한지 10년. 하지만 수상소감을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원래 마케팅이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영화를 지원하는 일이니까.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는구나. 내 소감을 궁금해하는구나. 내가 영화에 바친 노력을 알아주는구나.’

이상한 감각이 몸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귀가 뜨겁고, 목덜미가 간지러운 기분. 그러니까-

‘나도 이 영화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생각해주는구나.’

아주 짜릿한 설렘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낯선 기분에 한록이 흥분 속에서 겨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그러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말이 나가기 시작했다.

“<도착지>가 우승을 한 건...저 혼자 한 게 아닙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여러분한테 정말 감사하단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생각보다 겸손한 구석이 있네. 방송이라 이미지 관리하나?’

언제나 엄청난 자신감을 보이는 한록의 색다른 모습에 피식 미소를 지은 송PD.

그러나 이어진 한록의 말에 송PD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저한테도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무심코 말을 뱉은 한록. 한록은 스스로의 말에 놀란 얼굴이었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지금 정말로 하고싶은 말. 해야하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한록이 정면의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도착지>에게. GV팀에게. 우감독과 이연옥에게. 이 방송을 보는 사람들에게.

“포기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자신의 10년의 세월에게 말했다.

“우리 모두 정말 잘했어요.”

그리고 아주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한록씨. 이 순진한 사람아.’

송PD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 세상 어떤 영화보다도 강렬한 장면을 보여준 한록. 그가 보이는 아주 솔직한 미소와 소감.

[ㅠㅠㅠ너무 감동적 어디 나오는 배우예요?]

[진짜 사람 빡치게 만드네 배우 아니고 CK 직원이라고]

[멋있다. 나도 저런 사람이랑 일하고 싶다.]

[이거 예선전이 아니라 CK 바이럴 마케팅 같은데? 그게 아니고서야 내가 남의 회사 직원한테 반할 리가 없는데?]

[하......나도 저런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싶다]

[정말 멋진 청년이네요.]

‘명장면은 아까 거기가 아니야.’

‘바로 여기라고!’

사람들에게 앞으로 가장 화자될 명장면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

“피디님.”

한록의 수상소감이 끝나고 잠시 후. 스텝 한명이 송PD에게 다가와 말했다.

“방금 수상소감, 분당 시청률 나왔습니다.”

“몇이에요?”

송PD의 말에 스텝이 말했다.

“32퍼센트요.”

32%. 국장의 요구사항을 한참 뛰어넘는 동시에, KBC가 5년 동안 내지 못하던 기록.

스텝이 말에 송PD가 가지고 있던 대본을 하늘로 던지며 말했다.

“이한록씨. 나 승진입니다!!!”

*

분당 최고 시청률 32%.

[방금 누구 승진했다는데 ㅋㅋㅋㅋ]

[생방송 중에 PD가 좋아서 욕한 예선전.JPG]

[이 사람 배우 아니고 그냥 CK직원이라고 얼마나 말해야 아냐 제발 글 좀 봐라]

[<도착지>가 <수면> 이겼다!]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과-

[CK 예선전, 파격적 결말...접전 끝에 <도착지>의 승리.]

[서감독, ‘나는 타인의 인정 같은 건 필요없다’고 말해...]

[타임지가 인정한 영화 <수면>. 그리고 관객이 인정한 영화, <도착지>.]

뉴스란을 가득 채운 기사들까지.

[오늘부로 두달간의 여정을 거쳐온 CK 예선전이 종료되었다.]

[<도착지>는 강력한 우승 후보인 <수면>을 꺾고 예선전에서 승리했다.]

[이번 예선전을 통해 <도착지>는 한국영화대상의 유력한 대상후보로 발돋움 했다.]

한동안 한국 영화계, 아니 한국 연예계 전반을 뒤집어 놓은 CK 예선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한록씨! 지금 당장 내후년 방송도 계약해요! 앞으로 CK 예선전은 계속 KBC에서 진행합시다! 내가 국장돼서 팍팍 밀어줄게요!”

“이과장님. 정말 고마워요. 정말이요.”

“저, 이한록씨 맞죠? 저 사인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이과장. 바쁜 거 같으니 이따가 얘기하자.”

그러나 촬영장의 열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상황. 한록의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모두 잠시 물러나주세요. 회장님이 오십니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가라앉힌 건 바로 하태준의 등장이었다.

“다들 수고했어.”

이번 예선전이 아주 마음에 들었음을 보여주는 하태준의 말. 하태준의 말에 정부장이 주먹을 움켜쥐고 조용히 포효했다.

“ENM이 아주 잘하고 있군. 내 기대이상이야.”

하태준의 말에 숨은 속 뜻. 오늘 예선전으로 인해 하태준의 안에서 CK ENM의 가치가 몇배는 상승했다는 것이었다.

“이한록 과장 덕분이겠지.”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록이 있다.

회장이 직접 누군가를 집어서 성과를 칭찬한다. 과연, 이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회장은 어떤 보답을 내릴 것인가.

“이한록 과장은...”

모두의 궁금증 속에 하태준이 말했다.

“회사를 믿고 맡겨도 될 사람 같군.”

그 말에 한록은 직감했다.

‘하정엽과 한록의 활약에 따라, 해외팀에 대한 지원을 결정하겠다’던 하태준. 그는 지금 마음을 바꿨고.

“하고 싶은 건 전부 해보게.”

한록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지원이 들어올게 분명했다.

-재벌가 회장의 지원.

영화 제작. 해외 진출. 해외 유명 대기업들과의 협업.

하태준의 말 그대로, ‘앞으로 원하는 건 전부 해볼 수 있는’ 파워. 그게 지금 한록의 손에 떨어졌다.

하태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정엽이 한록에게 말했다.

“얘기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자리가 정리되면 바로 내 사무실로 오세요.”

지금 당장 CK ENM의 미래를 논해보자는 듯한 하정엽의 태도.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던 한록이 답했다.

‘이 정돈 해도 될 것 같은데?’

여태 자신과 하정엽의 관계. 그리고, 오늘의 성과를 봤을 때 한록이 꼭 하고 싶은 말.

“사장님.”

“네.”

“오늘은 피곤하니, 내일 방문 드려도 되겠습니까.”

‘바쁜 거 아니면 내일 얘기하자’ 였다.

사장의 부름을 직원이 거절했다.

하태준이 이게 말이 되냐는 듯한 표정으로 하정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하정엽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렇게 하세요.”

그러자 한록이 미소를 짓고, 고개를 숙인 뒤 말했다.

“네, 내일 뵙겠습니다.”

*

“이게 뭐하는 짓이냐.”

“이한록 과장은 원래 저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좋은 부하를 두려면 이 정도는 참아야 하는 법입니다.”

GV팀에게로 돌아가는 한록과, 그런 한록의 뒷모습을 여전히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 하태준. 그러나 정작 하정엽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이제는 한록의 당당한 태도에 익숙해진 것이었다.

“저 놈...”

언제나 재벌가 자제 그 자체이던 아들. 그런 아들을 변화시킨, 사장보다 더 당당해보이는 한록의 태도. 그 모습에 하태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주 미친놈이구만.”

그 말에 하정엽이 아주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다음 날. 한록이 하정엽의 사무실을 찾았다.

“시상식 준비는 잘 되고 계십니까. 회장님께서 시상식을 크게 기대하고 계십니다.”

“네,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록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하태준.

과연 회장의 지원이 들어온 CK ENM은, 그리고 자신은 어디까지 해볼 수 있는가.

그걸 처음으로 활용해볼 곳이 바로 2주 뒤 있을 시상식이었다.

해외팀의 출범을 알리고, 문오석을 제거하고, 헐리웃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할 그 곳. 한국에서의 마지막 여정.

“시상식도 반드시 성공적으로 끝내겠습니다.”

“그렇다면 줄 게 있습니다.”

전의를 다지는 한록을 바라보던 하정엽. 그가 마침내 결심한듯 한록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하정엽이 한록에게 건넨 것은 빈 종이 한 장.

“ENM에서는 최경준 본부장, 그리고 문오석 본부장만 작성한 계약서입니다.”

백지계약서는 일반적인 계약서가 아니라, 하태준이 정말로 놓치기 아까운 인재에게 제시하는 일종의 ‘조건’이었다.

“내 조건을 먼저 제시하겠습니다.”

하정엽이 다시 종이를 가져갔고, 거기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정엽이 쓴 것은 단 한 줄.

[CK ENM을 세계 최고의 영화회사로 만들 것.]

다시 말해, 자신을 CK 그룹의 후계자로 만들라는 뜻이었다.

하정엽이 한록에게 계약서를 내밀며 말했다.

“이한록 과장도 본인이 원하는 걸 적으세요. 이 계약서에 작성한 조건은 무엇이든 들어주겠습니다.”

사장이 제시한 단 하나의 조건.

그럼 자신은, 대체 무엇을 걸어야 하는가.

-라는 고민 같은 건 들지 않았다.

“사장님.”

“예.”

한록이 펜을 집어들고 하정엽에게 말했다.

“몇 개까지 적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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