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13화 (113/263)

113. 난 정말 좋은 팀을 만났구나.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감독님. 조심해서 가세요.”

우감독과 회의를 마친 한록.

회의가 끝날 때까지 우감독의 태도는 똑같았다. 우감독은 계속 <도착지>가 대상을 탈 수 있단 사실을 믿지 못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 사람이 그 이한록이구나. 진짜 잘생겼네.’

우감독 역시 한록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다.

충무로에서 소문이 자자한 ‘그’ 이과장.

한록은 생각보다 어려 보였고, 소문보다 훨씬 잘생긴 청년이었다.

‘어떤 영화든 살려준다고 했었나. 망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네.’

우감독이 한록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자기 영화가 대상을 탈 수 있다는 말 자체가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자신은 은퇴를 앞두고 있고, 서감독의 복귀작이 나온 상황.

이런 상황에서 한록의 말처럼 반전이란 게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감독을 위해 로비의 게이트를 열어준 한록.

한록이 우감독의 표정이 여전히 굳어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감독님. 시상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수삼소감 준비해두세요.”

“말씀도..”

한록의 말에 우감독이 멋쩍은 듯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우감독의 표정은 처음 봤을 때보단 많이 나아져 있었다.

“과장님.”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한 우감독이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자리를 떠났다.

우감독의 감사인사를 곱씹는 한록.

내가 잘 될 거라 믿어주는 사람. 그리고 내 작품을 좋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일인가.

한록 역시 회귀 후 많은 사람들에게 배운 감정이었다.

‘잘해보자’

새삼 그런 마음이 다시 들었다.

모두가 안 된다고 하는 도전. 그러나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회귀 후 <삼일의 삶>을 처음 맡았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든다.

가슴부터 아랫배까지 싸늘하게 식는 기분. 불안함과 아주 닮았으나, 조금 다른 이 기분.

‘재밌겠다.’

기대감과 설렘이었다.

*

우감독과의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 온 한록. 텅 빈 사무실엔 최대리만이 남아있었다.

최대리가 한록에게 물었다.

“회의 끝났어요?”

“네. 대리님은 안 가세요?”

“미국 놈들이랑 시차가 있으니까...”

<부산 열차> 때문에 며칠째 야근을 하는 최대리. 그러나 최대리의 얼굴엔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도와드릴 거라도 있나요?”

“아니에요. 금방 끝나요.”

최대리의 거절에 퇴근을 위해 준비하던 한록. 그때 한록에게 최경준의 문자가 도착했다.

[오늘 임원회의에 회장님이 다녀가셨어. 자네 예상이 잘 먹혔군. 고맙네.]

임원회의에 하태준이 왔고, 회의가 잘 끝난 모양이었다.

한록은 문자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고맙다’라는 말. 오늘 우감독이 한 말이었고, 최경준에게서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기분 좋네.’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말.

그리고 이어진 문자는 더욱 기쁜 것이었다.

[곧 타임스퀘어에 <부산 열차>의 광고가 송출될 예정이네. 회장님이 직접 지시하셨어.]

최경준의 짧은 문자에는 엄청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타임스퀘어에서 광고라니. 회귀 전에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다.’

뉴욕의 심장이자 자본주의의 상징인 타임스퀘어. 그 곳에 자신이 만든 광고가 걸린다.

이건 한록 역시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타임스퀘어의 모두가 <부산 열차>의 광고를 바라보고, 사진과 영상을 찍는다. 그리고 자막에 맞춰서 광고를 따라한다.

그런 상상을 하다 보니 등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과장님. 먼저 가시라니까요.”

그리고 눈앞에는 자신보다 이 소식에 더 기뻐할 사람이 있었다.

“최대리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파티션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이요?”

“타임스퀘어에 <부산 열차> 광고가 나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타임스퀘어요? 영등포? 거긴 이미 나오고 있을 텐데.”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던 최대리. 최대리가 잠시 후 한록의 말뜻을 알아듣고 놀란 듯 물었다.

“뉴욕이요?”

“네, 맞습니다.”

회사 사람 모두가 인정하는 한록의 라이벌. 한록을 <부산 열차>에 끌어들인 장본인이자, 누구보다 <부산 열차>가 성공하길 바라는 사람.

그런 최대리의 얼굴에 아주 환한 미소가 걸렸다.

언제나처럼 수상한 미소가 아니라 솔직한 기쁨을 담은 미소. 그 미소를 보며 한록은 생각했다.

한록은 아직도 최대리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사는지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게 하나 있었다.

“진짜 잘됐다. 그쵸.”

바로 최대리는 정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란 것이었다.

“이런 일을 그냥 넘길 순 없죠. 과장님. 5분만 기다리세요.”

한록에게 말한 최대리가 무서운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5분이 지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한록에게 물었다.

“과장님. 여자친구 없으시죠?”

“그건 왜요?”

“오늘 늦게 들어가실 거니까요.”

그렇게 말한 최대리가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술 마시러 갑시다.”

*

“제가 삽니다. 원하는 거 다 시키세요.”

회사 근처 바로 한록을 데려온 최대리. 한록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제가 상사인데요.”

“술은 고마운 사람이 사는 거죠. 약속대로 <부산 열차> 성공시켜주셨으니까 제가 삽니다.”

“됐습니다. 저도 고마운 게 있거든요.”

최대리의 말에 한록이 며칠 전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

“과장님. 무슨 생각해요?”

부산 열차 개봉 일주일 전. 모니터를 보고 생각에 잠겨 있는 한록을 보고 최대리가 했던 질문이었다.

한록이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

“<부산 열차> 개봉 때 새로운 걸 해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뭔데요?”

“지금 기획은 안내방송이 상영이 끝나고 나오는 형식입니다. 그런데 상영 전에 안내 방송이 나오면 영화에 훨씬 몰입이 될 것 같습니다.”

관객들이 <부산 열차>에 크게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안내방송. 그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아, 그게 낫겠네요. 해외 배급사들한테 그렇게 전달할게요.”

“네. 그리고, 서울은 지명이 좀 더 구체적으로 나왔으면 좋겠는데...”

“지금도 나오잖아요. 더 구체적으로요?”

“관객 수가 많이 들어올 법한 영화관은 동네를 직접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용산이나, 영등포 같은 식으로요.”

“음...확실히 더 몰입이 될 것 같긴 하네요. 이것도 같이 전달할까요?”

“그런데 시간이 너무 부족하네요.”

지금은 개봉까지 일주일 밖에 남지 않은 상황.

비록 안내방송이 조금 바뀌는 거라고 하지만, 세계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기획이다 보니 거쳐야 할 절차가 너무 많았다.

“결재 받고, 해외 배급사랑 의견 조율하고, 녹음 검수 하면...빠듯하긴 하네요. 그래도 하려면 할 순 있을 것 같아요.”

최대리의 말처럼 밀어붙이면 가능은 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주일째 야근 중인 현차장을 보고 있자니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을 하나 더 만들면...다들 너무 힘들 거야.’

그렇게 생각한 한록이 최대리에게 말했다.

“이건 제가 알아서 해볼게요. 다른 사람들한텐 말하지 마세요.”

“과장님 혼자 하긴 어려울 것 같은데요.”

“그래도요. 다른 사람 고생시키는 것보단 제가 좀 더 고생하는 게 낫죠.”

언제나 최고의 성과를 노리는 한록이지만, 회귀 후에는 조금 생각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 말에 최대리가 의외란 표정으로 한록을 바라보았다. 최대리가 잠깐의 생각 후 한록에게 말했다.

“이거 그냥 제가 가져갈게요. 제가 책임지고 끝낼 테니까 걱정 마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요즘 최대리 역시 언제나처럼 멋지게 꾸미고 오는 게 아니라 간신히 출근만 하는 상황이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닙니까?”

걱정이 담긴 한록의 질문에 최대리가 솔직하게 말했다.

“솔직히 엄청 무리죠. 근데 제가 과장님을 <부산 열차>에 끌어들인 거니까 이 정도는 해야죠. 그리고...”

“그리고?”

“방금 그 말이 도와주고 싶게 만들었어요.”

한록은 그 말에 얼마 전 정부장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잘해라. 믿고 있다.’

유선. 현차장과 정부장. 그리고 최대리까지. 언제나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

‘난 정말 좋은 팀을 만났구나.’

회귀 전. 한록의 목적은 언제나 일이 성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과장님 하고 싶은 거 다 해봐요, 제가 도울 게요.”

이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 역시 일을 하는 보람 중 하나라는 것을.

*

“그때 정말 고마웠습니다.”

“뭐 그런 걸 가지고. 다 영화 잘되자고 하는 거잖아요.”

“그 점이 제일 고맙죠.”

다른 어떤 이유도 없이, 그저 함께 하는 일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을 돕는 사람.

최대리는 한록이 언제나 바라오던 동료였다.

“뭐, 저도 과장님이랑 일하는 거 재밌었어요.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그건 최대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록의 기억 상 최대리는 이제 몇 개월 후면 CK기획으로 돌아가게 된다.

‘최대리님이랑 일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아, 물론 <부산 열차>가 먼저고요.”

“네. 일단 <부산 열차>부터 잘 끝내봅시다,”

“그래요.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최대리의 말에 한록은 새삼스럽게 시간이 정말 빠르다는 생각을 했다.

최대리의 말처럼 <부산 열차>의 마케팅이 끝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음이 맞는 동료. 그리고 훌륭한 영화. 이 나날들이 끝날 날이 곧 다가온다.

이제 아마 <수면>에 투입될 최대리. 그리고 자신.

어쩐지...

“그때까지 잘해봅시다.”

아쉽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

그리고 다음날.

“이과장. 표정이 왜 그래?”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현차장의 질문에 한록은 울렁거리는 속을 붙잡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10분 후. 최대리가 한록처럼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바로 한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다음부턴 술 마실 때 영화 얘기 금지해요 ㅡㅡ]

어젯밤 술을 마시다가 나온 <도착지>에 대한 얘기.

‘과장님. 이번에 <도착지> 맡으신다고 하셨죠? 저 우감독님 만나게 해주세요. 그 분 영화 좋아해요.’

‘어떤 영화를 제일 좋아하십니까?’

‘당연히 <우리집>이죠.’

‘저도 그걸 제일 좋아합니다.’

‘어, 진짜요?’

그렇게 시작된 둘의 영화 얘기.

워낙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보니 차가 끊길 때까지 술을 마셨고, 그 결과가 오늘 아침이었다.

최대리의 메시지에 피식 웃은 한록.

그러나 잠깐 웃은 것 만으로도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한록이 겨우 최대리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럽시다.]

그러나 한록과 최대리 둘 모두 알고 있었다. 이건 어차피 지켜지지 않을 약속이란 사실을.

“다 왔네.”

그때 정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모두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우리 목표는 연말 시상식이다. 시상식은 우리 CK 영화가 전부 가져가야 해.”

정부장이 말하는 건 한록이 최경준에게 제시했던 목표였다.

연말 시상식을 가져간다.

이제 그건 한록만이 아니라 CK 전체의 목표가 되어있었다.

“송과장. 언론 대응해. 박과장은 지금 맡은 <용의자> 그대로 가져가고. 현차장은 이과장이랑 <삼일의 삶>, <지구 특공대>, 다시 시작하고.”

정부장이 연말 시상식을 위한 새로운 임무를 배정하기 시작했다.

“이한록.”

그리고 한록을 바라보던 정부장이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기어코 이걸 하는구나. <도착지> 가져가라. 목표는 대상이다.”

“네, 알겠습니다.”

정부장의 말에 한록이 당당하게 답했다.

정부장의 한숨의 이유는 뻔했다. <도착지>가 <수면>을 이기고 대상을 받으리란 게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뻔했다.

하지만 한록은 <도착지>를 올해 최고의 영화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모두에게 돌아간 각자의 임무. 한록이 맡은 <도착지>. 그리고 혼자 남은 최대리.

정부장이 최대리를 바라보았고, 한록은 정부장의 뒷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윤일. <수면> 맡아라.”

<수면>. 천재 감독의 복귀작이며 이제 최대리의 손에 떨어진 영화.

“이쪽도 목표는 대상이다.”

그리고 회귀 전 올해의 영화 중 대상을 탔던 영화다.

“네, 알겠습니다. 반드시 수상하겠습니다.”

정부장의 말에 잠시 놀란 듯한 얼굴이던 최대리가 이내 씩씩하게 말했다.

“일해. 올해는 우리가 먹는다.”

정부장의 선전포고에 마케팅 부서 사람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연말, 그리고 시상식.

새롭게 생긴 목표 때문인지 마케팅 부서에는 긴장감이 흐르는 시작했다.

“아, 네, 피디님. CK ENM 송과장입니다.”

“<용의자> 기사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윤감독님. 현차장입니다. 오랜만입니다.”

바로 전투태세에 돌입한 마케팅 부서 사람들. 그 사람들 사이로 한록과 최대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회사에서 늘 라이벌로 불리는 한록과 최대리.

그 둘이 이제는 대상이라는 목표를 두고 다른 팀에 배정 되었다.

한록과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최대리가 늘 그렇듯 수상한 미소를 지으며 한록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는 라이벌이네요.”

최대리는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듯한 얼굴이었다.

어제까지 한 목표를 위해 달리던 사람. 그리고 한록이 이뤄보지 못했던 성과를 이루게 해 준 사람.

이제 그 사람과 한 목표를 두고 경쟁할 순간이 왔다.

그 사실을 즐기는 듯한 최대리의 태도.

그 모습에 어제까지 아쉽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한록도 다른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심장이 차가워지는 기분과 불안함. 그리고 그 뒤에 느껴지는 짜릿한 흥분.

이건 바로-

“좋습니다. 이것도 잘해봅시다.”

기다리던 승부를 앞뒀을 때의 설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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