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06화 (106/263)

106. 회귀자 특전(4)

한록은 CK 내부 컨펌 후 스티브에게 아이디어를 전달했다.

<이것 때문에 시간을 달라고 말한겁니까?>

CK 모두가 동의한 광고. 그러나 스티브는 여전히 비꼬는 듯한 태도였다.

‘정말 같이 일하기 싫은 타입이군.’

계속 심기를 거스르는 스티브의 태도. 그러나 그보다 더 신경쓰이는 게 있었다.

‘광고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될 수도 있겠는데.’

바로 기껏 만들어둔 광고가 어떤 식으로 전달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상식적으로, 거래처에서 잘 만들어온 광고를 누락할 가능성은 많지 않겠지만...

<아빠를 부른다라. 그것 참 미국인들이 좋아하겠네요.>

인종차별주의자들한테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한록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 번 잡고 갈까.’

김준처럼 한 번 화를 낼까 생각하는 한록.

그러나 스티브를 상대로 괜히 힘을 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티브. 제롬에게 제게 연락 달라고 요청 해주시겠습니까.]

굳이 한록이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해결해 줄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통화 중 나온 제롬의 이름에 스티브의 목소리가 변한다.

<제롬이요?>

[네. 제롬 앤더슨 대표 말입니다. 광고 때문에 통화가 필요합니다.]

<당신이 뭔데 제롬을 바꿔달라 말하죠?>

자신의 보스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스티브가 사납게 말하기 시작한다.

그 보스가 한록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고, 그래서 동시에 이 프로젝트 역시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스티브.

[일단 연락해 보시면 알 겁니다.]

<헛소리 그만하세요. 끊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스티브는 다짜고짜 전화를 끊어버렸다. 옆에서 통화를 엿듣고 있던 최대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불쌍한 스티브. 죄명이 하나 추가 됐네요.”

“그러게요.”

그리고 바로 제롬에게 전화를 거는 한록.

제롬이 나눠준 명함에 있던 제롬의 개인 번호였다.

잠시 후 제롬이 전화를 받았다. 한록이 제롬에게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제롬. <부산 열차> 광고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

<좋습니다.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한록의 광고 아이디어를 듣고 제롬이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그 어떤 질문, 요구 사항도 없다. 한록의 방안을 완전히 수용하기로 결정한 제롬. 제롬은 한록의 광고가 아주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됐습니다.

옆에 있던 최대리에게 입모양으로 말하는 한록.

스티브가 중간에서 무슨 짓을 하든, 광고는 통과됐다. 한록이 전화를 건 목적은 달성한 상황.

그러나 최대리는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통화를 듣고 있었다.

<가족을 강조한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드는군요. 미국적 정서죠.>

그리고 제롬이 마케팅 포인트에 대한 언급을 했을 때. 최대리가 한록에게 종이에 글을 써서 내밀었다.

-타도 스티브.

‘가족애’라는 주제 자체를 퇴짜 놓으려던 스티브. 그 부분을 얘기하자는 것이었다.

최대리의 글씨 밑에 글을 적는 한록.

-굳이 싸움을?

-얄밉잖아요.

-그런 걸로는 안 됩니다.

-또 이럴 놈이라는 건요?

‘맞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한록이 최대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제롬에게 말했다.

[사실 마케팅 포인트가 바뀔 뻔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드 엔터테인먼트 측에서 마케팅 포인트 변경을 요청했습니다. 이 광고 역시 반응이 좋지 않았습니다. 상부에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전화 드린 겁니다.]

<이유가 뭐였습니까.>

[기존의 마케팅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까. 제 개인번호로 전화를 한 이유가 있었군요. 메일을 보낸 것도 같은 이유겠고요.>

‘누군가 중간에서 멋대로 프로젝트를 좌지우지하려 했다.’

전후사정을 모두 눈치 챈 제롬이 한록에게 말했다,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한.>

감사 인사를 전하는 제롬의 목소리는 아주 차가웠다.

아마 자세한 내용이 밝혀진다면 스티브는 한록에게 함부로 굴었던 것에 대해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 분명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있다면 내게 알려주기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마무리 된 전화.

“역시 우리 과장님, 아주 든든해요.”

최대리가 한록에게 윙크를 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한편 전화를 끊은 제롬은 한록과의 통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아까운 광고를 놓칠 뻔했군.’

만약 한록이 스티브의 반응 때문에 광고를 바꿨다면, 지금의 광고는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광고 기한을 연장해달라는 한록의 메일을 보건데, 아마 스케쥴 조정부터 문제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내 회사에서 이런 짓을 하다니,’

짧게 생각한 제롬이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조세핀에게 물었다.

[조세핀. <부산 열차> 담당자가 누굽니까.]

*

몇시간 후. 우드 엔터테인먼트 측에서 광고내용을 확정했다는 메일이 도착했다.

“이제 광고만 나오면 되네요.”

최대리의 말처럼 이제 남은 것은 광고 제작을 기다리는 것. 그리고 제작이 끝나면 미국과 동시에 송출하는 것 뿐이었다.

그로부터 2주 후. 날짜는 벌써 10월 초가 되었고, <부산 열차>의 개봉도 얼마 남지 않았다.

“최대리님. <부산 열차> 광고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오늘 촬영 들어간다고 합니다.”

“하대리님. <러빙 고흐>는요?”

“오늘 더 서울이랑 일정 조율하러 다녀오겠습니다.”

차근차근 진행되는 <부산 열차>의 광고와 마케팅.

“우리 광고 콘티 나온 것 좀 봐. 이러다가 진짜 올해 관객 1위 하는 거 아니야?”

광고 제작은 잘 진행되고 있었고, ‘더 서울’과의 협업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부산 열차>의 광고 공개가 일주일 남은 상황.

“과장님. 본부장님이 급히 찾으십니다.”

한록에게 최경준의 갑작스러운 호출이 도착했다.

*

“어제 임원회의에 다녀왔네. 오랜만에 회장님이 참석하셨지.”

본부장실에 도착한 한록. 최경준은 한록에게 임원 회의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회장님이 <부산 열차> 얘기를 듣고 기뻐하시더군. 헐리웃은 회장님의 꿈 중 하나셨으니 말이야. 잘하고 있다고 하셨어.”

“네, 감사합니다.”

한록과 <부산 열차>에 대해 칭찬하는 최경준.

그러나 최경준의 목적은 <부산 열차>가 아닌 것 같았다. 한록은 잠자코 최경준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러빙 고흐>에 대한 얘기가 나옸지. 회장님은 더 서울 개방을 탐탁치 않아 하시더군.”

‘역시.’

역시나 한록의 생각이 맞았다. 아마 <러빙 고흐>야말로 최경준이 오늘 한록을 부른 본론인 듯 했다.

“더 서울은 회장님이 소장한 작품들로 만들어진 곳이야. 회장님은 ‘더 서울’을 상당히 아끼고 계시네. 그런데 영화 하나 때문에 ‘더 서울’을 사용한다는 게 마음에 안 드시는 듯 했어.”

“그래서 마케팅 방안을 바꾸라는 말씀이십니까?”

과거 하태준으로 인해 <퀸>을 뺏길뻔 했던 한록. 한록의 질문에 최경준이 고개를 저었다.

“하하...그런 일은 없을거네. 사장님이 이대로 진행할 거라고 못을 박으셨거든.”

다행히 하정엽의 반응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다만 회장님이 이 문제는 다시 한 번 얘기해보자고 하셨어. 사장님이 자세한 진행 내용을 보고하라고 하실 테니 준비해두게.”

하태준의 반대에 미리 대비를 해두라는 최경준의 말. 그 말에 한록은 몇 주전 일을 떠올렸다.

더 서울을 개방해달란 자신의 요청. 그걸 듣고 ‘이럴 땐 사장을 만나게 해달라는 거다’라고 말하던 최경준.

그리고 지금. 아마 <러빙 고흐>에 대해 불안함을 느끼고 있을 하정엽.

한록이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 사장님께 면담을 요청합니다.”

“사장님을?”

“네. 서면으로 보고 드리는 것보다는 직접 말씀드리는 게 더 전달이 쉬울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겠지. 하지만 자네가 이런 요청을 하는 건 의외군.”

한록의 말에 놀랐다는 듯 말하는 최경준. 그러자 한록이 씩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럴 땐 사장님을 만나야하는 거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하.”

그 말에 최경준이 한방 먹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네는 성장이 너무 빨라서 탈이야.”

“칭찬으로 알겠습니다.”

“당연히 칭찬이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최경준. 그가 수화기를 들고 말했다.

“좋아, 지금 말씀드리겠네. 바로 준비하게.”

*

그리고 30분 후. 한록은 하정엽의 호출에 사장실로 향했다.

‘이렇게 바로 부르다니. 마음이 급하신 것 같군.’

언제나 일정이 꽉 차 있는 하정엽. 아마 면담을 요청해도 일주일은 걸리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빨리 호출이 들어왔다.

비서가 문을 열어주자 하정엽이 바로 말을 걸었다.

“날 보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네. <러빙 고흐> 진행방안에 대해 설명을 드리고 싶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회장님이 방문할 예정입니다. 시간이 없으니 짧게 끝내세요.”

‘어쩐지. 호출이 빠른 이유가 있었군.’

아무래도 하정엽은 오늘 하태준과 결판을 낼 생각인 모양이었다.

한록이 하정엽에게 말했다.

“‘더 서울’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논란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더 서울’이란 말에 하정엽의 눈썹이 꿈틀 거린다. 어지간히도 ‘더 서울’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네. 말해보세요.”

‘그래도 바꾸란 말은 없군. 장족의 발전이다.’

과거에는 하태준의 말 한 마디에 한록의 프로젝트를 바꾸려 했던 하정엽.

그러나 이제는 하태준의 반대에도 ‘더 서울’을 지키려 한다. 나름의 발전이 돋보이는 모습이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과연 <러빙 고흐>가 ‘더 서울’을 활용할만한 영화이냐. 그리고 과연 팬덤 마케팅이 기대하는 것만큼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느냐에 대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제 임원회의에서 나왔던 지적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한록. 하정엽이 말했다.

“본인도 알고 있군요.”

“네. 그리고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지적이라 생각합니다.”

한록이 하정엽에게 다가가 파일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러빙 고흐>의 해외성적입니다.”

한록의 말에 파일을 넘겨보는 하정엽.

한록이 가져온 파일에는 러빙고흐의 주차별 관객수가 적혀 있었다.

특이하게도 <러빙 고흐>는 1,2주차는 성적이 미진했다.

그러다가 3주차 이후부터 관객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형식.

“보통은 개봉 첫 주에 관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데, 특이한 유형이군요.”

“다회차 관람과 입소문 덕분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러빙 고흐>는 해외에서도 팬덤이 적극적으로 영화의 홍보를 도왔습니다. 그 결과 개봉 후반부부터 관객이 증가했습니다.”

하정엽이 한록의 말을 들으며 주의깊게 파일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마 오늘 하태준에게 할 말을 고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개봉 후까지 기다려보란 겁니까. 문제는 이런 팬덤이 한국에서도 생길 수 있을지, 그리고 과연 얼마나 파급력이 있을지 일텐데요.”

그리고 이 부분이야말로 한록이 하정엽에게 보여주고 싶은 내용이었다.

“네, 맞습니다. 다음 페이지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하정엽이 페이지를 넘겼다.

“<러빙 고흐>의 해외 개봉 당시 국내 반응입니다. CKV에 <러빙 고흐>의 수입을 요청하는 건의가 32건 접수되었습니다.”

“수입 요청은 흔한 일이 아닐텐데요.”

“네, 그렇습니다. <러빙 고흐> 해외 개봉 당시 미술계에서 나름의 이슈가 됐었습니다. 미술 커뮤니티에서 한국 개봉을 추진하자는 얘기도 있었던 걸로 확인됩니다. 그래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단체로 개봉을 요청했던 겁니다.”

파일을 천천히 읽어보는 하정엽.

[이거 한국에 안 들어올 것 같네요..]

[그렇겠죠 휴ㅠㅠ]

[CKV 아트무비에서 이런 영화 가끔 개봉해요! CKV에 문의해봅시다!]

[<러빙 고흐> 개봉 요청 서식 공유합니다. 이대로 복사해서 올리기만 하면 돼요~]

[ㄴ어디에 쓰면 되는거죠?]

[ㄴ인스타그램에 달면 되나요?]

<러빙 고흐>의 개봉을 위해 의견을 공유하는 사람들.

방법도 어설프고, 많은 인원이 모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팬덤 마케팅이군요.”

한록이 말하던 팬덤 마케팅이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맞습니다.”

한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개봉후까지 기다릴 필요 없습니다, 사장님. <러빙 고흐>의 팬덤은 이미 만들어져있습니다.”

한록의 말에 하정엽이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답이 없던 하정엽. 그리고 하정엽은...

“이미 팬덤이 형성됐다라. 좋은 말이군요.”

한록이 처음 보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할 말을 찾았다.’

오늘 자신을 찾아올 하태준에게 뭐라 말해야할까. 하정엽은 드디어 그 답을 찾았다.

“이제 됐습니다. 나가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하정엽이 짧은 미소를 지우고 말했고, 한록은 인사를 하고는 사장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닫힌 문을 보고 생각했다.

‘사장님이 웃기도 하는구나.’

*

그리고 한 시간 후.

“회장님 보실만한 곳 빨리 청소해주세요.”

“회장님 가실 때까지 다들 자리비우지 말고 계속 앉아있어라.”

회장을 맞이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임원들.

[근데 진짜 왜 오셨대?]

[모르겠어요. 회장님 업무시간에 오시는 건 첨 보네요..]

[올때마다 이래야 하나..이게 뭔 짓이야ㅡㅡ]

그리고 약간의 불만과 호기심을 가지고 메시지를 나누는 직원들까지.

“회장님 도착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 하태준이 ENM에 도착했다.

하정엽과 함께 사장실로 올라간 하태준. 그가 사장실의 의자에 앉자마자 하정엽에게 물었다.

“할 말이 있을텐데?”

“‘더 서울’ 개방일정은 바꾸지 않을 겁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하정엽을 보고 하태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더 서울’을 어떻게 만든 건진 알고 있겠지? 내가 평생에 걸쳐서 모은 작품들이 있는 곳이야.”

하태준은 고작 영화의 마케팅 수단으로 ‘더 서울’을 사용한다는 것이 불만인 모양이었다.

“최본부장이 할 짓은 아니지. 나를 아니까. 저번에 얘기한 그 놈이냐?”

한록에 대해 얘기하는 하태준. 하정엽이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고작 과장 얘기를 듣고 ‘더 서울’을 열었다니. 네 사람을 만들란 건 네가 이용할 사람을 만들란 거였지, 거기에 휘둘리란 게 아니었다.”

“제가 휘둘린 건지, 좋은 기획안이 있어서 추진한 건지는 결과를 보고 얘기하시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말대꾸를 하는군.”

“맞는 말을 하는 것 뿐입니다.”

하태준의 질타에도 해야할 말을 하는 하정엽.

“회사끼리 좋은 프로젝트로 협업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양측 모두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더 서울’과 <러빙 고흐>의 협업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나도 협업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냐. 다만 그 영화가 그 정도의 가치가 없다는 거다. <부산 열차>나 <수면>이면 모를까. 정말 <러빙 고흐>에 네가 말한 팬덤이 붙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생각보다 강경한 하정엽의 모습에 하태준의 태도가 살짝 누그러졌다.

그때를 틈타 하정엽이 하태준에게 한록의 파일을 내밀었다.

“그건 이 파일을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파일을 읽어가는 하태준.

<러빙 고흐>에 대한 호평. 그리고 팬들의 수입 요청.

“미술계에서 수입을 요청했다라.”

“네, 맞습니다. 판권 부서는 수입을 결정한 것 자체가 미술계의 요청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정엽은 아까 전 한록이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러빙 고흐>의 팬덤은 이미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 말에 하태준이 하정엽을 바라보았다.

‘더 서울을 개방한 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좋은 협업은 양측 모두의 브랜드 가치를 높인다’는 하정엽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하정엽 녀석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군.’

언제나 기업의 성장을 중요시하는 하태준. 그의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팬덤이 이미 만들어져 있다’는 말.

하정엽의 도전이 아주 허황된 것만은 아니란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넌 이게 잘 될 거라 생각하는 거냐.”

파일을 모두 읽은 하태준이 하정엽에게 물었다.

-하정엽. 네가 감히 ‘더 서울’을 쓰겠다고?

하태준의 태도는 이미 어제에 비해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하정엽은 오늘 한록이 사장실을 나가기 전 한 말을 떠올렸다.

-사장님. <러빙 고흐>와 팬덤 마케팅에 대해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직접 영화와 마케팅을 경험하기만 한다면, 그 의문은 사라질 거라 생각합니다.

마치 지금 하태준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한 한록의 말.

하정엽이 그 말을 생각하며 답했다.

“네, 확신합니다.”

“어떻게 확신하지?”

“그건...”

그리고 하태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하정엽.

“직접 ‘더 서울’에 와보시면 아실 겁니다.”

확신이 담긴 하정엽의 말. 그 말에 하태준이 코웃음을 치다가...

“그래. 한 번 가봐야 알겠군.”

고개를 끄덕였다.

*

하정엽과의 대화를 마치고 ENM을 떠나는 하태준. 그가 차 안에서 오늘의 대화를 떠올렸다.

-한번 가 보시면 알 겁니다.

자신만만하고, 확신에 차 있는 하정엽의 말.

언제나 신중한 하정엽이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면...이한록이란 놈 짓이겠군.’

오늘 자신을 만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 온 하정엽. 그리고 그걸 보좌했을 한록.

‘제법 잘 크고 있군.’

그 두 조합이 꽤나 마음에 든단 생각이 들었다.

*

그리고 일주일 후. <부산 열차>의 첫 광고 송출날.

“퇴근하겠습니다.”

오후 한시 반이 되자 한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언제나 야근을 일삼는 한록의 반차. 그 모습에 하대리가 깜짝 놀라 물었다.

“과장님. 무슨 일있으세요?”

“광고 반응 보러 갑니다.”

짧게 답하고는 바람처럼 한록.

한록이 도착한 곳은 한 대형쇼핑몰이었다.

“과장님도 오셨네요.”

그리고 저 멀리서 반갑게 손을 흔드는 사람, 최대리. 최대리 역시 한록처럼 첫 광고를 지켜보러 온 것이었다.

한록과 최대리는 광고가 나오는 대형 스크린 앞에 자리했다.

“2시에 송출이니까 5분 남았습니다.”

손목시계를 본 최대리가 말했고, 둘은 조용히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과장님.”

“네.”

2시 1분 전. 한록에게 말을 건 최대리.

“재밌었어요.”

그 말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저도요.”

한록의 말과 함께 스크린의 화면이 바뀌었다.

아무 영상도 없이 그저 검은 화면만 송출하는 스크린.

[오후 두시. <부산행> 열차가 출발합니다.]

스크린에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으나,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저 무심히 스크린을 지나치는 수 많은 사람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광고.

그리고 이어진 음성.

[아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아빠들이 순간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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