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05화 (105/263)

< 105 : 회귀자 특전(3) >

한록과 최대리, 현차장은 퇴근도 미루고 바로 회의에 돌입했다. 안건은 미국 광고의 기획안이었다.

"미국은 좀비 영화 좋아하잖아. 좀비가 메인으로 나오는 광고가 좋지 않을까?"

"아예 3D로 좀비가 튀어나오는 연출도 좋을 것 같아요. 게임 회사 중에 이런 광고를 진행한 곳이 있거든요. 대신 3D까지 거치면 시간 맞추기는 조금 어려울 수 있겠네요."

현차장과 최대리의 다양한 아이디어들. 그러나 그 중 딱 이거다 싶은 건 없었다. 그때 최대리가 말했다.

"아니면, 가족애를 어필하는 내용을 만들어 볼까요?"

회귀 전 <부산 열차>는 지나친 부성애로 한국에서 비판을 받았다.

'신파가 과한 좀비영화' 라는 한국 대중들의 반응.

그러나 미국에선 신파가 오히려 감동적인 장면으로 받아들여졌고, <부산 열차>의 흥행요인이 되었다.

"사람들이 미국보고 개인주의라 하는데, 사실 미국은 엄청 가족 위주 사회거든요. 미국 사람들은 <부산 열차>의 가족애에 대한 부분을 좋아할 거예요."

<부산 열차>의 흥행 포인트를 정확히 알고 있는 최대리. <부산 열차>를 아낀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한록이 최대리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최대리님 의견대로 갑시다. <부산 열차>의 장점을 잘 살려줄 수 있고, 가족애는 어디서나 통하는 코드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가족'을 주요 마케팅 포인트로 잡은 한록.

다음날 한록은 출근 후 바로 스티브에게 메일을 보냈다.

[<부산 열차> 광고 진행사안.]

메일의 내용은 우드 엔터테인먼트 측에게 마케팅 포인트를 대략적으로 알려주는 것이었고, 아직 광고 방안은 담겨 있지 않았다.

한시간 쯤 지나자 스티브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

[확인했습니다.]

"...이게 끝이야?"

현차장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계속 스크롤을 내렸다.

그러나 아무리 스크롤을 내려도 이어지지 않는 메일. 현차장이 기가 막히다는 듯 소리쳤다.

"끝? 진자 끝?"

"그런 것 같습니다."

"잘못 보낸 거 아니고? 이과장이 우드엔터테인먼트 측 의견은 어떤지 물어봤잖아. 왜 답을 안 하지?"

현차장의 말처럼, 메일 마지막에 우드엔터테인먼트의 의견을 참고하겠다고 말한 한록.

그러나 스티브에게선 아무런 답이 없었다.

"제가 전화해보겠습니다."

시계를 보니 다행히 아직 LA도 근무시간이었다. 한록은 곧장 스티브에게 전화를 걸었다.

[CK ENM 이한록입니다.]

<네, 미스터 한.>

언제나 그렇듯 건들거리는 목소리의 스티브. 스티브가 한록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보내주신 메일 확인했습니다. 내용이 없던데 혹시 잘못 보내신 게 아닌가 해서요.]

<그래요? 확인했다고 보냈습니다만.>

[그것뿐입니까?]

<그럼 무슨 말을 더 합니까?>

할 말이 없다는 태도의 스티브. 그리고...

'스티브? 그 인간 인종차별주의자예요.'

스티브와의 첫 통화 전 최대리가 한록에게 해준 말.

'대충 알겠군.'

한록은 스티브가 무슨 의도로 그런 메일을 보냈는지 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우린 헐리웃이야. 감히 네가 우리한테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더 필름의 김준과 비슷한 우월의식. 비단 김준이나 스티브만이 아니라 헐리웃 전체가 다른 나라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개선 방안이나 수정해야 할 부분은 없습니까?]

<글쎄요. 알아서 진행하세요.>

한록이 스티브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보내드린 마케팅 포인트가 마음에 안 드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 진행 중인 마케팅이랑 너무 달라서요. 우린 좀비, 그리고 기차를 강조하는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어요.>

한록이 여러번 묻자 스티브가 그제야 마케팅 포인트에 대한 대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이어진 스티브의 마지막 말.

<어쨌든 해보세요.>

'알아서 만들어 와라. 어차피 통과 안 시킬 거니까.'

그런 태도의 스티브.

대놓고 갑질을 하던 김준과 달리, 스티브는 한록이 어떤 짓을 하든 무시하는 방법을 택한 것 같았다.

"진짜 헐리웃이랑은 일 못하겠네. 이렇게 나올 거면 왜 마케팅을 사 간 거야?"

한록이 전화를 끊자 현차장이 화가 나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정작 스티브와 통화를 한 한록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이과장. 기분 풀어."

"화 안 났습니다."

현차장의 말에 진심으로 답하는 한록.

"정말?"

"네."

"저렇게 나오는데 화가 안 나? 이과장이?"

한록이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어차피 제 말을 듣게 될 테니까요."

결국 승자는 자신이 될 것이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

그날 밤. '가족애'에 맞는 광고 기획을 짜기 위해 퇴근도 미루고 회사에 남은 한록과 최대리, 그리고 현차장.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회의를 했지만 쓸만한 아이디어는 없었다.

"과장님. 마케팅 포인트 다시 생각해볼까요?"

최대리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스티브 말이 맞을 수도 있어요. 우린 한국인인데, 미국인들을 상대로 광고를 만든다는 게 난이도가 좀 있잖아요. 스티브 말대로 기차나 좀비 위주의 광고로 바꾸는 게 더 결과가 나을 수도 있겠네요."

자신이 제시한 '가족애'라는 주제를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자는 최대리. 언제나처럼 현실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한록은 최대리의 말에 단호하게 반대했다.

"대리님. 대리님은 기차와 좀비가 더 좋은 포인트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뇨. 영화관에서 현장감을 줄 때는 좋지만, 지금 광고는 일단 파급력이 제일 중요하니까요."

"그럼 바꾸면 안 됩니다. 이대로 가야해요."

"그래도 너무 진전이 없잖아요. 마케팅 포인트가 아무리 좋아도 광고를 제대로 못 만들면 아무 쓸모 없어요. 스티브가 위쪽에 보고도 안 할 걸요."

"어차피 결정은 제롬이 하는 겁니다.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과장님. 이대로 진행하면 그냥 어중간한 광고가 나오게 될 거예요. 포기할 건 포기해야죠."

마케팅 포인트를 바꿀 것인가, 말 것인가. 방향성에 대한 얘기가 오가는 회의실.

한록과 최대리의 의견차는 시간이 지나도 좁혀지지 않았다.

"잠깐."

그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현차장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록과 최대리가 말을 멈추고 현차장을 바라보았다.

"나 진지하게 할 말이 있다."

"무슨..."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연 현차장. 그가 한 말은-

"커피 마시고 하자."

휴식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회사 1층 카페로 내려 온 한록과 최대리, 그리고 현차장.

"회의하다 막히면 좀 쉬어가면서 해야지. 거기 죽자고 앉아있어 봤자 아이디어 안 나와."

"네, 맞습니다. 이제 좀 생각이 정리가 되네요."

"오."

현차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한록. 최대리가 이때를 틈타 물었다.

"그럼 마케팅 포인트 바꾸나요?"

"아뇨."

"진짜 너무하네!"

"최대리님은 생각이 좀 바뀌셨습니까?"

"저도 아니죠."

"둘 다 똑같아. 커피나 마셔."

한치의 양보도 없는 한록과 최대리. 현차장의 말에 한록과 최대리가 입을 다물고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가족. 음성 광고. 미국. 한국광고와의 연계.'

한록은 커피를 마시며 미국 광고에 들어가야 할 요소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많긴 하군.'

확실히 최대리의 말처럼 자신이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생각에 잠긴 한록. 그리고 똑같이 말이 없는 최대리.

"안 돼. 일 생각 금지."

현차장이 한록과 최대리의 앞에 손을 흔들면서 둘의 생각을 방해했다.

"여긴 쉬라고 데려온 거야. 한 5분만 쓸데  없는 얘기 하다가 가자."

"네, 알겠습니다."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고, 최대리 역시 일 생각은 접고 현차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차장님. 집에 안 가도 괜찮으세요?"

"응. 오늘은 은서한테 허락 받았어."

"그게 과연 진짜 허락일까요?"

"왜 무서운 소리를 하고 그래?!"

최대리의 말에 현차장이 기겁해서 소리를 질렀다. 카페의 사람들이 현차장을 바라보았고, 그 중 누군가 현차장을 알아보았다.

"어, 현차장. 이과장이랑 최대리도 아직 안 갔네."

"박과장!"

같은 부서의 박과장이었다.

카운터에서 막 커피 두 잔을 받아 든 박과장. 박과장이 현차장에게 물었다.

"<부산 열차> 때문에 있는 거야?"

"응. 오늘은 집에 못 갈 거 같아."

"어이구. 난 와이프하고 딸내미랑 영화 보러 가기로 했는데."

박과장이 보란 듯 커피잔 두 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 모습에 현차장이 발끈해서 물었다.

"지금 자랑하는 거야?!"

"당연하지. 아, 이과장, 우리 <퀸> 보러 간다. 잘 보고 올게."

"당장 나가, 당장!"

"심지어 싱어롱 상영이야. 좋겠지?"

"나가!"

박과장은 끝까지 현차장을 놀리며 카페를 나섰다. 박과장의 모습을 지켜보던 현차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자. 빨리 끝내고 은서 자기 전에 돌아가는 거야."

마케팅 부서 사람들은 커피를 들고 카페 밖으로 향했다. 카페에서 나오자, 로비 끝에서 박과장이 커피를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잡은 현차장이 로비에 선 박과장을 보고 물었다.

"안 가고 뭐해?"

"와이프가 데리러 온 댔어."

"에이씨. 괜히 물어봤네."

현차장이 박과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박과장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가자."

최대리와 현차장이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이제 한록만 남은 상황.

"사모님 오셨네요."

그때 박과장의 아내가 로비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빠!"

동시에 로비에 울려퍼지는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 그리고-

"어?"

무심코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는 현차장.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려 로비를 바라본 현차장. 거기선 박과장의 딸이 박과장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현차장이 아쉬운 듯 말했다.

"깜짝이야. 은서인 줄 알았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순간 한록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아빠.'

누군가의 외침에 뒤를 돌아보는 현차장. 그가 뒤를 돌아본 이유.

"은서 낳은 뒤로 아빠란 말만 들으면 그냥 돌아보게 된다니까."

자식이 있다면 저절로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그 말.

"이과장. 안 타?"

현차장이 엘리베이터 앞에 선 한록에게 물었다. 그러나 한록은 생각에 잠겨 아무런 답이 없었다.

가족.

음성 광고.

미국.

한국광고와의 연계.

그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광고.

"현차장님."

"응?"

"이제 집에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거다.'

한록이 드디어 그 답을 찾아냈다.

*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정부장을 찾은 한록.

"부장님. <부산 열차> 미국 광고입니다."

한록은 정부장이 앉으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의자에 앉아 얘기를 시작했다.

"광고 컨셉은 '가족'입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산 열차>에 나오는 가족애를 강조할 수 있는 광고가 될 겁니다."

"그건 최대리한테 들었어. 근데 아직 아이디어가 없다며?"

"아뇨, 있습니다."

"...하루 만에 아이디어를 만들었다고?"

"네."

"또 무슨..."

정부장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한록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정부장의 상식을 무너뜨리는 한록.

그러나 한록을 믿어주겠다고 생각한 게 바로 어제다. 정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해봐."

그 말에 한록이 설명을 시작했다.

"저는 <부산 열차>의 한국 광고를 미국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생각했습니다. 이름을 불러서 주의를 집중시키는 방법 말입니다. 문제는, 미국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사람들이 섞여 산다는 점 입니다. 쓰는 이름이 다양하다보니 한국만큼 이름 광고는 파급력이 크지 않을 겁니다."

"그래. 그래서 제롬도 광고를 다듬겠다고 한 거고."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한국만큼의 효과를 볼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한 제롬. 그래서 미국 광고에 기차역이 함께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제 한국만큼의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게 뭔데?"

그리고 어제 한록이 박과장의 딸, 아니 현차장을 보고 떠올린 아이디어. 그건 바로-

"이름이 아니라 호칭으로 광고를 시작하는 것이다."

미국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이 살든, 얼마나 많은 이름이 있든, 한록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부모라면 누구라도 뒤를 돌아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말이 있으니까.

'아빠.' 그리고 '엄마.'

"광고가 시작할 때 어린 아이의 목소리로 부모를 부르는 내용을 넣을 겁니다."

정부장은 한록의 말에 어떤 광경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10월의 어느 날. 계절은 초가을.

가을 코트를 입은 뉴요커들이 뉴욕 타임스퀘어 앞을 바쁘게 지나간다.

변호사. 엔지니어. 노숙자. 회사원. 화가. 마트 캐셔.

다양한 인종. 다양한 직업.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살아온 뉴욕의 사람들.

'아빠.' '엄마!'

'도망쳐!'

그들 사이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고개를 든 누군가.

혹시 내 아들이, 내 딸이 나를 부르는 것일까 봐 무심코 돌아본 사람들.

바로-

변호사. 엔지니어. 노숙자. 회사원. 화가. 마트 캐셔. 선생님. 식당 사장. 우버 운전사. 운동 선수.

그 거리에 있는 모든 부모.

*

"부장님. 부장님이시라면 그 광고를 무시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들이 교통사고가 나서 응급실에 입원을 한 날, 평소처럼 회사에 출근해 하루를 보낸 정부장.

"아니."

그가 한록의 말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출근길. 점심시간. 혹은 퇴근길.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 들려오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

'엄마.'

'아빠.'

"자식이 있으면 어떻게 그러겠냐."

그 목소리에 돌아보지 않을 부모는 없었다.

정부장은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알아.

고부장의 악의 섞인 비판.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광고는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통할 광고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루만에 강력한 광고를 만들어 온 한록.

'봤냐. 내 말이 맞았다.'

그렇게 생각한 정부장이 한록에게 말했다.

"이한록."

"네."

"우드 쪽에 바로 연락해. 나도 지금 본부장님께 보고 드릴 거다."

"검토는..."

"필요 없어."

검토 같은 건 필요 없다. '이 광고는 세계 어딜 가든 통할 광고.' 한록의 그 말은 허세가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정부장에게 드는 생각은, 그저...

"빨리 움직여."

하루빨리 사람들에게 이 광고를 보여주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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