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유럽의 왕 (2)
레알 마드리드의 지네딘 지단 감독은 오늘 경기에서 반드시 승리가 필요했다.
조별리그 4경기째 결과는 2승 2무,
이미 통과가 유력한 상황이긴 하나 괜히 삐끗해서 조 2위로 내려앉을 수도 있
었으며, 지난 마드리드 더비의 패배로 분노한 팬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선
홈에서 psv를 만나 대승 후 16강 진출을 확정 지어야 했다.
호날두, 벤제마, 모드리치, 라모스.
멤버도 1군 선수들중에 코어들만 내보냈으며, 만약 선발 라인업 중 누군가 부
진하다면 교체 자원으로 베일이나 아센시오 등 리그를 최상위권 선수들이 대
기하고 있었다.
“오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챔피언스리그 16강 기념 사진 찍는다. 무조
건, 무조건 이겨야 해!”
지단 감독의 말에 따라 선수들 역시 굳은 결의를 가지며 오늘 경기 승리를 위
해 홈구장으로 나선다.
***
-PSV 에인트호번 선발 라인업-
[FW ; 에란 자히비, 루크더용, 로자노
MF : 하디 크루거, 구티에레즈, 마르코반힝컬
DF: 필립 막스, 데릭 뤼카센, 마우로주니오르, 둠프리스
GK : 제룬 조엣]
같은 시각 psv의 라커룸에선 코쿠 감독이 선수들에게 전술 지시와 사기 진작
을 위해 마지막까지 열을 올린다.
“구티에레즈가 반힝컬이 더블 볼란치를 서면서 수비를 보호한다. 동시에 역습
할 때는 하디가 드리블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해!”
유럽의 왕과의 대결에서 psv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수비력 뛰어난 수비형 미드필더를 밑으로 내려 수비를 보호하고, 이들이 어떻
게든 팀에 창의력 있는 공격형 미드필더 하디 크루거에게 공을 전달하는 전술
이었다.
후에는 하디가 측면으로 공을 뿌리거나 혹은 메짤라처럼 윙으로 뛰면서 더용
의 포스트 플레이를 이용하는 방법.
강팀을 상대하기에 이만한 전술이 없고, 지금 psv의 전략으로는 지극히 현실
적인 방법이나 선수들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다.
하디 크루거 정도만이 간만에 빅 팀을 상대한다며 흥분해 선수들을 독려하나
별 효과는 없어보인다.
“진!(Jin) 걱정하지마! 기회는 반드시 올거니까!”
괜히 침체된 분위기를 업 시키고, 선발로 들어가지 못한 후배를 응원하기 위
해 괜히 소리치나-
“흐디...그믄흐르그...”
상욱은 별로 반기지 않는 듯 보인다.
첫 데뷔전, 그것도 레알 마드리드 전에서 벤치 멤버라도 앉은 것에 상욱은 대
단히 큰 흥분을 느꼈다.
지금 데용의 안 좋은 폼이면 후반에 기회가 생길 것이라 생각했고, 혹여나 데
용이 잘 한다하더라도 경기에서 밀리면 공격수를 추가 투입할 생각도 할 것이다.
“아직 우리 챔스 안 끝났다! 우리 16강 올라갈 수 있어! 기적을 보여주는 거
야!!!”
감독의 선창과 함께 선수들이 포효하며 경기장으로 나선다.
자신은 없었으나 최선을 다한다.
psv 선수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상기되어 있었다.
[네! 2017-18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4번째 경기가 펼쳐지는, 이곳은 레알 마
드리드의 홈구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입니다!]
[네, 양 팀 모두 분위기가 좋지 않아요. 레알 마드리드는 지난 주 AT 마드리
드에게 리그 경기에서 패배한 적이 있구요. 에인트호번의 경우는 더욱 좋지
않습니다. 지난 시즌 준우승 팀인데, 지금 강등권이에요!]
경기 흐름은 예상했던 대로 레알 마드리드가 주도권을 강하게 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마드리드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라 불리는 크-카-모라인의 중앙에 psv는
제대로 된 공격은커녕 공 한번 잡지 못한 채 압도적으로 밀린다.
[모드리치가 위로 올라갑니다. 현재 컨디션이 가장 좋은 마드리드 선수 중 하
나죠. 그대로 벤제마 쪽으로-]
에레디비시에선 이름 좀 날린다는 반힝컬-쿠티에레즈 중원이 모드리치의 킬패
스 한방에 뚫린다. 패스를 받은 벤제마가 순간 재빠르게 돌파하는 호날두에게
공을 넘기고,
[호날두 그대로 슈웃!!! 아 골대 맞고 나갑니다!]
[레알 마드리드의 강력한 역습! 알고도 당했습니다!]
극적으로 골대에 맞아서 다행이지, 사실은 실점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전반 20분,
한 번의 공격찬스도 만들지 못한 psv. 이스코의 압박을 뚫어낸 오른쪽 풀백
막스가 중앙라인까지 빠르게 돌파해 루크 더용에게 크로스를 올린다.
[패널티 라인까지 크로스 길게- 들어옵니다!]
[더 용 있습니다!...만 라모스에게 깔끔하게 뺏기고 맙니다]
더 용은 좋은 선수이며, 유럽 내에서도 꽤나 인정받은 공격수다. 그러나 상대
는 스페인 역대 최고라 평가받는 수비수, 세르히오 라모스였다.
그는 단 한 번의 클러치로 공을 탈취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대로 길게 롱
패스하여 역습 찬스까지 만든다.
에레디비시에서도 빠르기로 소문난 뤼카센과 강력한 피지컬을 가진 마우로 주
니오가 빠르게 커버하나-
이번에도 상대가 좋지 않았다.
[라모스의 롱 패스! 호날두가 받아냅니다!]
유럽을 넘어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평가받는 크리스티아누 호날
두가 패널티 라인 근처에서 공을 잡은 뒤 질주한다.
[간단하게 수비 제칩니다! 그대로 슈우우웃!!!!]
[들어갑니다! 올 시즌 20호골! 챔피언스리그 4호골! 오늘도 호날두가 만들어
냅니다!]
호날두의 오른발이 따라오는 psv 골키퍼가 나옴과 동시에 움직이고, 공은 순
식간에 오른쪽 상단으로 빠르게 솟구친다.
빠른 역습에 의한 득점. 월드클래스 수비수와 공격수의 환상적인 팀 워크에
한 순간에 당한 psv.
이 모든 플레이가 단 몇 초 만에 벌어진 일에 psv 선수들은 조금도 대비하지
못했다.
전반 35분,
여전히 경기는 암울하게 흘러간다.
아직 한 골밖에 실점하지 않은 것이 기적일 정도로 마드리드는 끊임없이 상대
의 수비를 두드린다.
[막아냈습니다! 데릭 뤼카센! 하다하다 얼굴로 그대로 공을 들이 박습니다!]
[얼굴에서 피가 납니다! 지금 에인토호번 선수들도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
로 경기하고 있어요!]
이번 경기에서도 지면 챔피언스 리그 탈락은 물론이고, 존경하는 팀 레전드
감독의 자리가 위태로울 수 있다.
시즌이 중반까지 온 시점에서 이미 우승은 물 건너 간 리그는 고사하고, 챔스
까지 이렇게 무기력하게 패배한다면 남은 시즌은 이대로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선수들이 죽을 힘을 다해 뛰고 있는 것이다. 16강 진출 희망을
조금이라도 불 태워보려고 말이다.
다만-
그 상대가 너무 강할 뿐이지.
“하아....”
경기를 지켜보던 코쿠 감독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터져 나온다.
“자식들..평소에 좀 저렇게 하란 말야”
오늘 경기 psv의 수비력은 올 시즌 경기 중 가장 훌륭하다. 부상을 마다않는
육탄 수비와 열정이 과하다 못해 처절할 정도의 끈기는 보는 이들로부터 탄성
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그러나 수비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공격진은 그 어떤 위협도 마드리드에게 보
이지 못했다.
[간만에 공 잡은 하디 크루거가 앞으로 전진합니다. 아, 빨라요! 길게 패널티
라인 안으로!]
전반 막바지,
겨우 공을 잡은 하디. 무기력한 팀에 독이 오를 때로 오른 그는 개인 능력만
으로 레알의 미들진을 뚫어내더니 거침 없이 전진하기 시작한다.
이번 경기 처음으로 보이는 psv의 위협적인 모습에 레알 수비진 역시 다소 당
황한 눈치.
[길게 패스 넣어주고! 자하비와 더용 들어오는데요!!!]
패널티라인 안으로 뿌리는 킬 패스에 공격수들이 패스를 받기위해 뛰어 들어
오나 이미 레알의 골키퍼가 나와서 처리한 이후였다.
[오늘 경기 나바스가 공 잡는 모습을 처음 본 것 같네요]
[그럼에도 깔끔하게 처리해내고 길게 롱볼 연결하는 모습은 가히 월드-클래스
라 표현할 만합니다]
보통의 상위권 팀이 그렇다.
한 명의 월드클래스 선수가 있고, 2~3명의 리그 베스트 활약을 보이는 선수,
나머지 8~9명은 이들을 보조해주는 굿 플레이어들이 있는 것이 보통 빅리그에
서 챔피언스리그를 나가는 최상위권 팀이다.
그러나 지금의 레알 마드리드는 아니다.
선발 라인업 전원이 월드클래스, 서브 멤버가 리그 베스트급의 활약을 하는
선수들이다.
[실점 했는데도 수비라인을 내리는 psv입니다. 추가 득점을 위한 레알의 기세
가 너무 매섭네요!]
[이러면 미들진에 기회가 생기죠, 크로스가 달려들면서 중거리- 아! 놓치고
맙니다!]
왼쪽 골문 끝을 노리는 토니 크로스의 강력한 슈팅이 제룬 조엣의 환상적인
선방에 막힌다.
[이건 조엣 골키퍼가 한 골 넣었다고 봐도 될 정도입니다! 오늘 경기 양팀 최
고의 선수는 호날두도, 라모스도 아닌 제룬 조엣이네요!]
곧 무기력한 전반이 끝나고, 더욱 무기력해진 선수들이 고개를 푹 숙이며 라
커룸 안으로 들어온다.
“....잘했다”
코쿠 감독은 무기력하게 지는 와중에도 선수들을 칭찬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중앙이나 공격에서 그 어떤 위협도 주지 못해 박한 평가를 내리려고 하나 머
리에 붕대까지 달면서 뛰어다니는 수비진을 보면 도저히 뭐라 할 수 없는게
지금 현실이다.
“후반전엔 조금 더 빨리 움직인다. 루크, 골 넣으라는 요구까진 하지 않을 테
니까 어떻게든 패널티 라인에서 공 따내”
psv가 할 수 있는 전략은 많지 않았다.
최대한 수비하면서 크로스를 올려 루크 더용이 제공권을 확보해줘서 공을 주
면 슈팅하는 것이 전부.
코쿠 감독은 왼쪽 윙포워드 자하비와 포르투칼 윙어 브루마를 교체하여 빠른
역습을 노린다.
브루마는 좋은 선수다.
슈팅 능력이나 연계가 결코 좋은 편이라 할 순 없으나 드리블과 스피드는 리
그 내 최상위 권이라는 평가를 받는 선수이나....
[아 마르셀루에게 꼼짝도 못하고 막힙니다]
[수비도, 스피드도 지금의 마르셀루가 브루마 선수보다 3수는 위에 있어보이
네요]
이번엔 마드리드의 월드 클래스 풀백 마르셀루에게 처절하게 막힌다.
70분,
끊임없이 psv의 수비진을 두드린 마드리드이나 압도적인 경기력에 비해 여전
히 스코어는 1:0.
홈 팬들은 이런 경기력에도 고작 1골 차로 이기고 있는 것에 불만이었으나 일
단 16강에 진출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끝까지 응원을 잃지 않는다.
반면에 원정팀 psv의 암울하기 그지없다.
[아 psv 서포터들이 상당히 침울해 보이네요. 그래도 아직 1점차 밖에 나지
않는데요]
[스코어는 1점차라도 이미 경기는 뒤집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psv 조엣 골
키퍼가 없었으면 이미 4골, 5골은 더 들어가는 상황이었어요]
75분, 76분을 지나가고 있을 때 레알 벤치에서는 후보 선수 투입을 준비한다.
“경기 끝났다”
지단 감독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아니, 현역시절부터 감독까지 할 수 있는 메이저 대회는 모두 우승해 본 사람
이 어리석다는 것도 웃긴 얘기다.
그런 그가 확신할 정도로 경기가 기울었다. psv의 선수 중 경기장 안에 있는
선수는 물론이고, 벤치를 포함해도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선수는 없었다.
주관적인 생각이 아닌 객관적인 지표가 그렇다. 이 경기는 레알 마드리드의
승리다.
“뭐야 저건?”
벤치에서 키 큰 동양인 선수 하나가 몸을 풀고 있음에도 지단은 신경쓰지 않
았다.
그저 psv의 마지막 발악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
“뭐든지 해도 좋아”
코쿠 감독이 한껏 상기된 표정의 상욱의 옆에서 담백하게 말한다.
“가서 경기 좀 뒤집어 봐”
그러곤 천천히 그라운드 밖으로 나가는 상욱을 보며 외친다.
“네가 메시보다 뛰어나다는 걸 증명해 봐”
남은 시간 14분.
아직 경기 안 끝났다.
별의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