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유럽의 왕 (1)
리그에서 죽 쑤고 있는 에인트호번이 유럽대항전에 나가면 드라마틱하게 달라
지리라는 법은 없었다.
2011-12시즌 리그 6위, 승률 50%대로 최악의 시즌을 보냈으나 선수들의 단결
로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거머쥔 첼시를 기억하는 코쿠는 지금 있는 선수들을
활용해 챔스나 유로파에서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성적을 얻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현 리그 14위의 스쿼드가 박살 나 있는 psv가 유럽 최상위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고, 4경기를 치룬 지금 남은 경기가 레알
마드리드와 인테르인 이상 본선 넉아웃 스테이지로의 진출은 어려워 보인다.
Group D
[1위. 레알 마드리드 2승 2무 승점 8점
2위. 인테르 2승 1무 1패 7점
3위. PSV 에인트호번 1승 2무 1패 5점
4위. 브뤼허kv 1승 3패 3점 ]
psv에게 만만한 팀은 없었다. 4위 브뤼허조차 벨기에리그 최고 명문으로 이미
1승 1패를 거뒀으며, 2위 인테르는 이탈리아 리그 최상위권 클럽, 호날두가
버티고 있는 ‘유럽의 왕’ 레알 마드리드는 psv가 도저히 비빌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기적적으로 홈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인테르에게 각각 2무씩 거두긴 했으나,
조별 예선이 2경기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16강 진출을 결정짓기 위해 레알
과 인테르 두 거함들은 최상의 전력으로 psv 전에 나설 것이다.
“루크! 더 빨리 움직여!! 에릭! 반 박자 빠르게!”
훈련을 하고 있는 코쿠 감독의 표정이 갈수록 어두워진진다.
생각했던 것보다 선수들의 폼이 올라오지 않았던 것이다. 팀 득점의 절반을
책임질 데용은 프로 데뷔 이후 최악을 보내고 있으며, 그의 백업 역시 부진의
연속이다.
“그렇다고 저놈을....”
가장 열심히 훈련 중인 저 17살짜리 어린 선수를 선발로 내세울 수도 없는 노
릇이다.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이자 유럽의 왕으로 불리는 레알 마드리드가 아닌가.
전상욱은 구단 자체 내에서 케어하는 유망주다.
귀하게 키워야할 선수를 괜히 1군 데뷔전부터 미친 최강팀과의 경기에 내보내
서 기죽이게 하고 싶진 않았으며, 아무런 준비도 안 된 17세 선수를 내보낼
자신이 없었다.
희박하긴 하지만 아직 16강 진출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잖는가.
“루크”
코쿠 감독이 헤더 경합에 실패한 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루크 더용에게 다
가간다.
“네 감독님”
“난 널 아끼지만....”
감독이 말을 흐리자 더용이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히 표정
은 좋지 않지만.
“레알 전에선 뭔가 보여줘야 해. 너나 나나 위태로운 상황 아니냐. 이대로 또
무기력하게 패배하면-”
“감독님, 설마 저 동양인 꼬마한테 주전을 내주란 말씀은 아니죠?”
데용의 걱정과 원망 섞인 물음에 짜증스럽게 대꾸하는 코쿠.
“제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루크, 좀 잘하란 말야”
“젠장, 노력하고 있어요. 그런데...”
짜증스러우나 슬픈 눈을 하고있는 절박한 공격수의 모습에 괜히 마음 쓰이는
감독이 그를 위로한다.
“그래그래,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평소대로 한번 가보자고”
지난 시즌까지 psv 에이스는 누가 뭐래도 데용이었다.
강력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포스트 플레이를 제대로 하며, 클러치 능력도 있어
서 중요한 순간마다 구해내는 에이스.
코쿠 감독은 아예 이번 시즌부터 루크더용을 중심으로 전술을 짰다. 민첩성이
부족한 더용을 위해 양쪽 윙포워드로 발 빠른 선수를 배치하고, 중앙 미들진
을 늘리는 4321 전략을 만들었으나,
결과는 처절한 실패.
덕분에 코쿠감독은 팬들로부터 1군 감독으로서 기량이 부족하다며 비판받았
고, 이런 비판을 이겨내기 위해선 방법은 한가지.
자신이 고안한 전술로 이기는 수밖에 없었다.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에서 탈락할 수도 있는 매우 중요한 경기에 상대는 유
럽최강 팀 레알 마드리드.
코쿠 감독은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다해서 다음 경기를 준비할 생각이었다.
팀을 위해서도,
물론 자신을 위해서도
***
“1군은 어떠냐”
“뭐, 별거 아냐”
오전 훈련이 끝나고 하디의 집에서 함께 점심을 먹는다.
집에서 쉬면서 개인 트레이닝 하고 싶다는 날 굳이 끌고와 피가 뚝뚝 떨어지
는 레어 스테이크를 씹어대며 중얼거린다.
“유스 선수가 처음 올라오면 나 같은 스타들이 챙겨 줘야하는 법이지. 맛있
지? 독일산 최고급 소고기야”
하디는 내가 퍽 맘에 든 모양이다.
훈련할 때부터 혼자 있는 날 괜히 자기 옆으로 오게해서 함께 뛴다거나 휴식
때는 다른 선수들에게 굳이 날 인사 시킨다거나 나를 어떻게든 챙겨주기 위해
난리다.
뭐 그 마음이 갸륵하긴하나...별로 고맙진 않다.
팀 적응이야 1군에 뛰면서 자연스럽게 하게 될 텐데 굳이 뛰는 선수들에게 다
가가,
‘날 능가할 유망주’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될 재능’
이런 말을 해대니 꽤나 부담스럽다.
“아 맞다. 너 훈련 때 제 실력 안 내더라? 달리기도 그렇고, 돌파도 그렇고”
입에 핏기를 가득 묻힌 채 중얼거리는 하디. 안 그래도 소름끼치도록 차갑고
잘생긴 얼굴에 피가 가득하니 괜스레 오싹하다.
“원래 진짜 에이스들은 힘을 숨기는 법이지”
“오....그렇구나”
오 같은 소리하네.
쯧-
사실 힘들어서 그렇다. 생각해보니 지금껏 너무 빨리 달려왔다. 대건고부터
psv 유스, 리저브, 1군까지. 제대로 된 휴식 없이 미친 듯 페달을 밟다보니
지친 것이다.
뭐 신체 능력이나 실력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스텝업 하긴 했으나 피
로감이 올라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부진하다고 해도 에레디비시 최고 명문 팀의 1군 멤버다.
함께 훈련하는 팀원들 수준은 10대 후반-20대 초반의 리저브 선수들이 아닌
20대 초부터 30대 중반까지 있는 진짜 프로팀이다.
“체력도, 벌크업도...더 해야 해”
혼자서 중얼거리다 문득 생각이나 혼자 중얼거린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루크 더용 때문에”
말 그대로다.
1군에 새로운 유망주가 그것도 동 포지션의 10살 이상 차이나는 선수가 올라
오면 당연히 주전 포지션에 있는 선수가 챙겨주고, 역량강화를 위한 팁을 주
는 것이 관례다.
아무리 개인의식이 강한 유럽이라고 할지언정 그래도 유럽 내 이름 꽤 알려진
데용 정도가 이리 냉정하다-
주전이 흔들리는 선수가 불안해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것을 보는 건 익숙
한 일이나 더용 같은 일류 선수가 이렇게 까칠할 줄이야.
파포스트 플레이의 교과서라 불리는 루크 더용 밑에서 반니처럼 배우고 싶었
는데 젠장, 저렇게 소통을 차단해버리니 무슨 말을 못 걸겠다.
“그 놈, 불안해서 그런 거 아냐?”
“알고 있어”
이미 점심부터 와인을 2잔 째 때려 박는 하디가 이죽거리는 소리에 곧바로 대
꾸한다.
“거 내가 에이스이자 선배로서 한 마디 해줄까?! 어이- 너보다 훨씬 나은 공
격수가 될 사내라고 말야!”
그래도 지가 선배라고 챙겨주려는 모습이 고마우면서도 웃기다. 당장 몇 주
전까지 저 놈과 죽이니 살리니 멱살 잡은 것도 우습고.
“하디, 이건 나랑 루크의 관계야. 내가 알아서 해”
“루크 그 자식, 너 때문에 불안감 많이 느낄 거야”
그럴 만도 하다.
이번 시즌 내내 넣은 골이 PK 1골인 공격수가 아무리 이름값 있더라도 불안해
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리저브 리그에서 4경기에 10골씩 쑤셔 박은 공격수가 나왔는데 지가 걱정 안
하고 배기겠어?”
“똑바로 말해, 4경기 11골 1도움이니까”
“어쨌든”
내 말에 이미 반쯤 술에 취한 듯 떠들어대는 하디 크루거.
“아무리 리저브라고 해도 같은 프로에선 비상식적인 기록이지”
그러더니 3잔 째 와인을 담는 하디가 최대한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무명으로 입단한 십대 선수가 4개월 만에 챔피언스리그 본선 진출 팀 1군에
들어가는 건 보통 일이 아니야”
이건 하디의 말이 맞다.
너무 자연스레 유스부터 리저브까지 올라오다보니 내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
지 새삼스레 잊게 된다.
나를 제외하고 팀 내 최고 유망주라는 코디 가포와 조던 테저가 이제야 리저
브 팀으로 올라간 걸 보면 그래 내 재능이 보통이 아니긴 하지- 싶다.
“고작 17살짜리 유망주가, 무려 챔스 경기를 앞두고 1군으로 올린 이유가 뭐
겠어?”
나름 퀴즈랍시고 떠들어대는 하디의 질문에 곧장 대답해준다.
“경쟁시키겠다는 거지”
너두 단호히 중얼거리니 살짝 당황한 듯한 하디.
“그.그...렇지”
에이스에 대한 믿음의 기간은 끝났다. 이제 조금만 부진하면 바로 내게 기회
가 올 것이다.
“물론 레알 전 같이 중요한 경기에선 내보내지 않겠지”
말을 줄이던 그는 남은 와인을 모두 털어버린 뒤 유쾌하게 떠들어댄다.
“세계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중 하나인 이 몸은 선발로 출전하겠지만!”
그래 임마,
너 잘났다.
***
레알전 D-2,
거함과의 대결을 앞둔 에인트호번 선수들은 다소 경직되고, 긴장된 모습으로
훈련에 임했다.
비록 레알과의 1차전에서 0:0으로 무승부를 기록하긴 했으나 이는 주말 엘클
라시코를 대비한 주전 선수들 대부분이 빠진 상태로 얻은 결과였으며, 그 경
기조차 골키퍼 조엣의 신들린 선방이 없었다면 3점 이상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경기였다.
베일-벤제마-호날두로 대표되는 BBC라인,
크로스-카세미루-모드리치가 뛰는 유럽 최우수 미들진,
마르셀루와 라모스가 지키는 수비벽까지 레알 마드리드는 전력상으로 psv가
비빌 수 있는 팀이 아니었다.
“이봐 아시안! 태클이 깊었잖아!”
vs 레알전을 앞둔 훈련장.
간단한 미니게임 중 루크 더용을 마크하던 중 태클로 공을 뺏긴 더용이 순간
짜증스럽게 외친다.
“깊었다고? 난 공만 잡아 뺀 거야!”
억울함에 절로 목소리가 높아지나 더용은 오히려 위협적인 표정으로 내게 다
가온다.
“왜 나 보내면 선발로 나서기라도 할 것 같아?”
“지랄하네. 누가 봐도 반칙 아니었는데..,”
“진정해 하디, 흥분하지 마”
뒤에서 지켜보던 하디 크루거가 짜증스럽게 다가오나, 순간 손짓으로 제지한
다음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상욱.
긴장되고 초조한 표정의 더용. 주전을 뺏길까, 아시아에서 온 유망주에게 자
리를 내줄까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루크, 오해하지마. 난 너한테 배울게 많아. 일부러 부상 시키려고 했다니...
당치도 않아”
사실 상욱 역시 더용의 이상 행동에 당혹스럽고 짜증이 차올랐으나 최대한 감
정을 추스렸다. 하디 때와 마찬가지로 먼저 흥분된 감정을 비치는 것보다 멍
청한 건 또 없을테니까.
“조심해 아시안, 난 쉽게 물러나지 않아”
“그럼, 기대할게”
이젠 익숙해진 네덜란드 어로 예의바르게 대답하던 상욱은 이내 선수들이 사
라졌을 때 모국어로 조용히 속삭인다.
“미친 새끼, 넌 뒤졌다”
조용히 읊조리고 있을 때 하디가 다가와 괜스레 상욱의 어깨를 잡으며 더용을
노려본다.
“저 자식, 좀 패줄까? 너한테만 괜히- 새끼, 인종차별 하는 거 아냐?”
“응 인종 차별하는 거 아냐”
동시에 하디의 등을 살짝 두드린 뒤 다시 훈련장으로 들어가는 상욱.
“하디, 도와주려는 건 고마운데- 이건 내 문제야. 내가 알아서 할게”
“고.고맙긴! 까불지마 코리안 놈아!”
괜히 부끄러워 소리치는 하디이나 따로 누구도 듣지 않는다.
***
vs 레알 마드리드전 D-day
[FW: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카림 벤제마
MF : 이스코, 토니 크로스, 모드리치, 카세미루
DF : 마르셀루, 바란, 라모스, 카르바할
GK : 케일러 나바스]
“크리스티아누, 카림, 이스코가 오늘 공격 선발이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레알 마드리드 라커룸에 있는 지단 감독이 선수들에게
경기 브리핑을 시작한다.
“이스코는 중앙에서 위로 전진 패스하고, 3선까지 내려와서 수비커버 가담해.
카림은 호날두 쪽으로 연계와 막혀있으면 바로 슈팅 시도하고”
선수들에게 하나씩 개인 임무와 전술을 설명하던 그는 문득 잘생긴 구릿빛 피
부의 키 큰 남성 앞에서 말을 멈춘다.
“크리스티아누”
감독의 말에 조용히 귀 기울이는 남성을 보며 슬쩍 미소 흘리는 지네딘 지단.
“오늘 3골 넣어라. 그게 네 임무다"
psv 에인트호번의 올 시즌 운명을 결정지을 경기가 막 시작됐다.
유럽의 왕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