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시곗바늘이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나는 서둘러 약속 장소에 가기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며칠 전, 배우 진희성에게 연락이 왔고.
제품에 대해 언급해 준 그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말의 답을 전해 왔다.
그리고 다가온 약속 당일.
연예인과 독대하는 것, 아니 연예인과 식사 자리가 생긴 것 자체가 내 인생에 처음이었다.
신기하고 설레는 마음은 가득했지만, 그렇다고 너무 부담스럽거나 긴장이 되어 가기 싫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워낙 연예계에 문외한일 정도로 관심이 없었던 터라, 사실 직원들인 신소율과 문지음이 내게 진희성의 이야기를 자세히 해 주기 전까지는 크게 알지 못했었다.
물론 간혹가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적은 있으나, 그가 내 생각보다 한국에서 이렇게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던 것이지.
그래서인지 오히려 그런 점이 내게는 진희성과의 독대가 장점으로 다가왔다.
진희성 또한 내가 자신의 광적인 팬이거나, 자신을 싫어하는 안티팬이었다면 나를 만나기가 불편했겠지.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은 마음을 가득 안은 채, 약속 장소에 도착했고.
나는 미리 예약해 둔 룸으로 발길을 옮겼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이동한 뒤, 문이 열렸고.
스르륵.
커다랗고 밝은 식당 룸 안에는 그때 보았던 후광을 내던 외모의 남성.
배우 진희성이 웃으며 나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민 대표님.”
“네, 안녕하세요. 희성 배우님. 이렇게 또 뵙네요.”
“그러게요. 얼른 앉으시죠.”
그는 자신의 앞자리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고.
나는 미소로 화답하며 자리에 착석했다.
“언제 도착하셨습니까?”
내 말에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저도 방금 막 도착했습니다. 아직 5분도 안 됐어요. 하하.”
“다행입니다. 저도 일찍 나온다고 했는데, 퇴근길이라 차가 좀 막히더라고요.”
그는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휴. 아직 저희 약속한 시간도 안 됐는데요, 뭘.”
대화를 나누던 그때.
미리 예약해 둔 음식이 한 상 차려지고.
나는 한 상 깔린 음식과 진희성의 표정을 번갈아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나름 괜찮은 집으로 고른다고 했는데, 괜찮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유명하신 분이라, 최대한 프라이빗한 곳으로 골라 봤거든요.”
내 말에 진희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저도 이 식당, 주변에서 추천받아서 알고는 있었습니다. 워낙 프라이빗한 곳이라, 주변 연예인 친구들도 자주 온다고 하더라고요.”
“정말요?”
“네. 저는 아직 한 번도 와 보지 못했는데, 민 대표님 덕분에 와 보게 됐네요. 하하.”
나는 그의 말에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저희 사업하는 사람들도 프라이빗한 곳을 좋아하거든요. 생각보다 업계가 좁은 곳이라서요.”
그는 탄성을 내지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의사분들이나 병원 관계자, 사업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 않으시니까요.”
우리는 이야기와 함께 술잔을 채웠고.
챙—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술잔을 함께 부딪쳤다.
크으.
차디찬 알코올이 텅 비어 있는 식도를 지나 속을 싸하게 적셨다.
한 잔을 털어 부은 진희성은 조금의 어색함이 풀렸는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사실 이런 식으로 만남을 가지게 된 게, 처음이라 조금 긴장했습니다. 어색할까 봐서요.”
“아, 그러셨습니까?”
“만남… 이라는 단어를 쓰니까 조금 어색하기는 한데, 제가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쉽게 다른 분들과 만나는 게 불편하고 꺼려졌었거든요.”
나는 그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신 말씀이죠. 배우, 연예인이 공인이라 조심하실 것도 많고 워낙 보는 시선이 많으실 테니까요.”
“네. 그래서 어색할까 걱정했는데, 민 대표님께서 역시나 회사 대표님이시고 영업도 오래 하셨던 분이라 분위기를 잘 이끌어 주셔서 다행입니다.”
그의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어? 제가 영업직을 했던 것도 말씀드렸었나요?”
진희성과의 첫 만남이자 바로 직전 만남은 KTS 방송국이었고.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보니, 그와의 이야기는 길지가 않았었다.
내가 파우더 스플린트를 만든 JH 메디컬 대표라는 것과 감사하다는 이야기뿐.
그런데 내가 영업직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고.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 답했다.
“저 이달의 메디컬 봤거든요. 대표님이 인터뷰하신 거.”
“헐, 그걸 보셨습니까?”
내 말에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요. 저 언급해 주신 것도 보고, 제가 메디컬 잡지에까지 진출하다니 영광입니다.”
그는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고.
나는 서둘러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유, 아닙니다. 제 제품이 잘 된 게 희성 배우님 덕분인데요. 제가 영광이죠.”
우리는 훈훈한 분위기 속에 대화를 이어 갔다.
그렇게 술잔이 몇 잔 넘어가며 대화 주제는 휙휙 변해 갔고.
“그럼 저보다 형이시네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진희성의 말에 나는 코를 찡긋하며 답했다.
“아… 제가 말을 잘 놓지 못하는 스타일이라, 슬슬 놓아 보겠습니다. 하하.”
항상 의사들과 메디컬 대표들을 만나 대화하는 게 일상인 나였기에.
늘 내가 어린 나이에 속하는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말을 놓는 것보다 상대방이 내게 말을 놓는 경우가 많았었지.
더군다나 말을 놓게 되고,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상대방에게 편함을 느껴, 실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만난 진희성에게 혹여나 실수를 하게 될까 걱정이 됐기에, 나는 그의 제안을 미뤄 두었지.
“네, 편하실 때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그럼 대표님은 서울에서부터 영업을 하신 거예요?”
진희성은 계속해서 내게 메디컬에 대한 질문을 늘어놓았다.
연예계 말고 다른 쪽에는 큰 흥미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메디컬 쪽에 관심이 많은 모양.
흥미로운 얼굴로 내게 질문을 계속해서 던졌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
“아니요. 저는 광주에서 시작했어요.”
내 말에 진희성은 화들짝 놀라며 손뼉을 부딪쳤다.
“광주광역시 말씀하시는 거예요?”
놀란 표정의 그를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네, 와 보신 적 있으세요?”
내 답에 진희성은 머리를 위아래로 세차게 흔들며 외쳤다.
“당연하죠. 가보다 마다요. 저 고향이 광주예요. 신기하다.”
“정말요?”
“예. 물론 연예계 데뷔를 일찍 해서 서울로 올라오기는 했지만요.”
서울에 올라와 여러 지역의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아직까지 만나지 못한 동향 사람.
광주라는 지역 하나만으로도 괜스레 그와 조금 더 친밀감이 생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진희성은 신이 난 목소리로 내게 말을 이어 갔다.
“형은 그럼 상무지구 자주 가셨어요?”
그는 내게 말을 내뱉자마자 입을 떡 벌린 채 눈썹을 치켜들었다.
“아… 죄송해요. 제가 형이라고 해 버렸네요, 대표님.”
술이 한두 잔 들어가니, 내게 편함이 느껴졌는지 형이라는 호칭이 튀어나온 듯 보였고.
나는 활짝 웃으며 손을 허공에 휘이 저었다.
“형이라고 해도 되죠. 내가 나이도 많고, 선배도 아닌데. 편하게 불러요.”
“그래도 될까요… 형?”
“그럼요.”
챙—
술잔을 기울이며 조금씩 몸을 앞으로 당겼고.
몸이 가까워지고 있는 만큼, 우리의 심적인 사이도 가까워짐을 느끼고 있었다.
생각보다 진희성과 대화가 잘 통했고, 연예인도 사람이었구나 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있었다.
대화가 점점 길어지고, 식당에 온 지 두 시간이 되어 갈 무렵.
나는 진희성을 보며 재차 감사 인사를 표했다.
“맞다, 그리고 희성 씨 덕분에 제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교정용 스플린트 만들었다고 한 거 기억나요?”
그는 내 말을 듣고 단번에 입을 열었다.
“당연하죠. 제품 나왔어요? 저 그 제품 기다리고 있는데.”
“네. 샘플 작업도 들어갔고, 오래 걸리지 않아서 곧 출시될 것 같아요. 홍보에, 아이디어까지 진짜 고마워요.”
“그래서 제가 오늘 좋은 밥 얻어먹잖습니까. 좋은 형도 생기고요. 하하.”
그는 헤실거리며 나를 바라보았고.
누가 봐도 잘생긴 외모 탓에 그의 미소를 보면 나 역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가 제품 나오자마자 희성 씨한테 하나 보낼게요.”
“어휴. 아니에요. 내돈내산 해야죠.”
“덕분에 좋은 제품 만들게 됐는데, 희성 씨 돈 주고 사지 말고 제가 첫 제품 보내 줄게요. 절대 홍보 안 해도 되고, 그냥 선물이에요.”
그는 내 말에 어깨를 들썩이며 답했다.
“그럼 제가 한 번 써 볼게요. 감사해요.”
나는 진희성의 팔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번에 다친 팔이 왼쪽이었던가요?”
“네, 맞아요.”
“그쪽으로 보내 줄게요. 근데 희성 씨 팔이 다 나았을 시기일 텐데, 그때도 계속 스플린트를 교정한다면서 차고 있길래 놀랐어요.”
보통 팔이 부러지거나, 금이 가서 스플린트를 차는 경우.
꽤 불편함을 느끼기에, 다들 회복이 되자마자 스플린트를 던져 버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데 교정이 되기를 바라며 계속 스플린트를 하는 그를 보며 나는 의문을 가졌었지.
내 궁금증을 풀어 주듯 진희성은 자신의 팔을 주무르며 말했다.
“제가 이쪽 팔을 자주 다쳤거든요.”
“혹시 왼손잡이예요?”
사람들이 다치는 팔의 비율을 굳이 따지자면, 왼쪽보다는 오른쪽 팔이 월등히 많은 편이다.
왼손잡이보다 오른손잡이가 많기 때문이지.
그런데 왼팔을 자주 다쳤다는 그의 말에 나는 그를 향해 물었고.
젓가락을 오른손에 쥐고 있던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근데 일이 좀 있었거든요.”
“일이라면 무슨…….”
혹시나 내게 말하지 못할 사정일까 싶어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고.
진희성은 입술을 말아 넣은 채 시선을 회피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팔을 뚫어져라 보는 그의 모습.
“몇 년 전이었죠. 그때 의사가… 아, 아닙니다.”
그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여전히 자신의 팔을 보고 있는 진희성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아련한 느낌이 흐르고 있었다.
뭐지?
더욱 나를 궁금하게 만드는 진희성의 팔.
“네?”
“이미 오래 지난 일이라… 뭐.”
그는 술잔을 채워 허공 높이 들었고.
“술이나 한 잔 할까요?”
“아… 네.”
나는 서둘러 그의 잔에 술잔을 부딪쳤다.
어딘가 찜찜한 그의 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굳이 내게 말을 하고 싶지 않음이 느껴졌으니까.
어떤 이유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분명한 건 내가 이 업계 사람이라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저 그가 겪었던 어떤 일에 대해 운을 띄우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일 뿐.
모든 건 내 추측이지만.
내가 그의 표정을 보며 그렇게 느껴졌다.
그는 술잔을 한입에 털어 부었고.
나 또한 술잔을 입술에 붙여 천천히 마시며, 시선 끝에는 진희성을 두었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생각하던 중.
그때.
진희성의 속마음 소리가 내게로 들어왔다.
[그때 그 의사 새끼가 제대로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런 자식이 의사를 하면 안 되는 거지…….]
그의 속마음 소리.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진희성이 오른팔을 자주 다치는 이유인 게 분명했다.
자꾸만 팔을 다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다른 것도 아닌, ‘의사’ 때문이라니.
더욱 그의 사연에 의문이 들었지만.
진희성에게 직접적으로 물을 수는 없을 터.
나는 그저 형으로서, 그리고 그가 알게 된 메디컬 업계의 지인으로서.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희성 씨, 혹시…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다면 뭐든 말해 줘요.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물심양면으로 도와줄게요.”
내 말에 그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형.”
그의 눈빛에는 씁쓸함과 후회 등의 감정이 뒤엉켜 있는 듯 보였다.
대체 어떤 의사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 *
교정용 스플린트가 세상에 드러나기 직전인 요즘.
그 전에 병원 의사들을 만나 제품에 대한 이야기와 피드백도 받을 겸, 겸사겸사 병원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친한 병원들부터 돌아다니던 터라, 오늘은 왕십리 종합병원에 다녀온 후.
강 원장이 있는 리본 종합병원에 도착했다.
“민 대표!”
병원 로비에서 강 원장의 진료실로 향하던 나는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발길을 멈췄고.
강 원장이 내게로 다가와 손을 흔들었다.
“강 원장님, 왜 여기에 계십니까?”
“나 오후 진료 없잖아.”
“네, 원장님 스케줄 확인하고 그래서 오후에 뵈러 왔는데. 혹시 어디 가십니까?”
그는 의사 가운 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채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잠깐 차트 좀 보러 나왔어. 그럼 내 진료실 가고 있던 거야?”
“그럼요.”
내 말에 강 원장은 눈짓으로 병원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오전에 너무 바빠서 지금 또 진료실 안 들어가고 싶은데, 앞에 카페나 갈까?”
그의 제안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죠.”
병원 앞에 위치한 체인점 카페.
나와 강 원장은 카운터 앞에 서서 메뉴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원장님, 뭐 드시겠습니까?”
강 원장의 얼굴은 그의 말대로 쉴 새 없는 진료가 이어졌었는지, 꽤나 지쳐 보였고.
퀭한 얼굴의 그에게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커피… 로 드시겠습니까?”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아이스 아메리카노.”
“예, 제가 주문하고 가겠습니다.”
그는 몸을 돌려 테이블로 향하다 다시 나를 바라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아, 그 위에 에스프레소 휘핑 좀 올려 줘.”
“네?”
강 원장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그에게 되물었고.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아메리카노 위에 에스프레소 휘핑 올려 달라고 주문하면 돼.”
“아… 네. 알겠습니다.”
강 원장은 그대로 테이블로 향했고.
나는 멀뚱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에스프레소 휘핑을 올려 달라는 그의 주문.
이런 레시피의 커피 주문은 흔한 게 아니었다, 분명히.
그리고 나는 이 레시피의 주문을 처음 듣는 것이 아니었다.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이 커피 주문.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멍하니 강 원장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