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내가 생각했던 대로 파우더 스플린트의 반응이 꽤 좋은 편이었다.
아직 많은 시장에 깔리지 않았지만.
샘플을 병원에 주고, 하나둘 판매가 시작되면서 의사들에게 좋은 피드백이 오고는 했었지.
기존에 사용하던 스플린트의 재고가 동이 나면, 내 제품으로 전부 바꾸겠다는 의사들까지 있었다.
성공적인 스타트를 하는 것만 같은 느낌에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미소를 참아 냈다.
좋은 시작을 한 것이지, 완벽한 성공을 이뤄 낸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직 기쁨을 만끽하기에는 너무나도 이를 터.
나는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며, 대표실 의자에 몸을 기대앉았다.
그리고 오전에 내게 물건 납품에 대해 물었던 병원이 떠오르며, 나는 황급히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물건 출고가 어디까지 진행됐으려나…….”
나는 추후 물건 출고 일정에 대해 묻기 위해, OEM 제조사인 블루 메디컬 최 대표에게 연락하려고 휴대전화를 열었다.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전화번호부를 확인하던 그때.
지이잉.
들고 있던 휴대전화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인 : 에어 메디컬 박충진 사장]
나는 발신인을 확인할 새도 없이,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손에 의해 수신 버튼이 클릭되었고.
- 여보세요?
들려오는 박 사장의 목소리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네, 여보세요.”
- 아이고, 우리 민 대표님. 잘 지내셨습니까?
“예, 그럼요.”
사실 박 사장과의 통화가 달갑지는 않았다.
에어 메디컬에 파우더 스플린트 제조 OEM을 맡기려고 했었고.
샘플 진행까지 갔지만, 최종 계약에서 좋지 않은 마무리를 지었었으니까.
내가 박 사장과 안부를 주고받으며 통화를 할 사이는 아니었었지.
나는 굳이 돌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에게 전화를 건 이유에 대해 곧바로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를 주셨을까요?”
내 물음에 그는 멋쩍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라니요. 그냥 안부차 전화 드렸죠.
“아… 네.”
- 근데 민 대표님 저번에 OEM 주신 파우더 스플린트는 어떻게 되셨을까요?
“예?”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이미 나는 그에게 계약을 보류하고, 이후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이야기를 나눴었고.
그 이후 블루 메디컬과 새로 일을 시작한 것이니까.
- 보류만 하셔 놓고, 다른 곳이랑 계약하신 것 같길래. 서운해서 연락드렸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사장님께 저번에 계약은 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만.”
당시 내가 그에게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 저는 보류하셨길래, 다시 회사로 오시는 줄 알고 기다렸죠. 너무 서운하네요, 민 대표님.
“저는 분명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뭐, 그게 어찌 됐든 샘플 작업까지 해 주셨는데, 결과가 좋지는 않아 아쉽게 됐습니다. 다음에 좋은 기회가 있으면…….”
박 사장은 내 말을 잘라 내며 다짜고짜 서운하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 다음에 좋은 기회가 어디 있습니까. 첫 스타트부터 이렇게 시작하면, 저희가 인연을 이어 가기가……. 이렇게 된 게 너무 서운하고, 속상해서 전화 드린 겁니다. 제품을 저희한테 다시 맡겨 주시면…….
“저… 박 사장님.”
- 네, 민 대표님.
“이건 사업이고 이런 거에 서운해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물론 계약을 못 하고 끝내게 된 게 죄송하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 그럼 저희 에어 메디컬과 작업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OEM을 맡기는 입장에서 당연히 질 좋고 값싼 물건을 찾는 게 사업이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계약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했던 거고요.”
- 민 대표님은 환자를 위해 일하시는 분이라고 들었는데, 값싼 물건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 환자를 위하는 건데, 값싼! 물건만 찾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모순이지 않나 싶네요.
그의 말에 나는 미간이 찌푸려졌고.
삐딱한 태도로 나를 대하는 박 사장에게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지?
“좋은 제품을 찾는 건 당연한 거죠. 거기에 값이 더 저렴해야 많은 환자들이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거고요.”
- 그래도 금액이 비싼 건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저도 환자들을 위해 오래 일하려면, 당연히 돈은 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장님께서 갑자기 단가를 올리시니까, 제가 그렇게 맞춰서 진행을 할 수가 없었던 거고요.”
- 어휴. 너무 속상하네요. 샘플 작업 다 하셔 놓고, 이렇게 팽 당하니 기분이 좀 그래서 연락 드렸어요.
나는 점점 도를 넘기 시작한 박 사장의 말에 눈을 꽉 감아 버렸다.
계약 직전, 단가를 올렸던 박 사장의 만행.
단가가 맞지 않으면, 샘플이 나왔어도 작업을 진행할 수 없다던 사람이 누구인데.
이제 와 내 탓을 하는 그의 말에 나는 분노 게이지가 차오르고 있었다.
박 사장은 와중에 능글거리는 말투로 내게 말을 이어 갔다.
- 이럴 게 아니라, 지금 어디십니까? 만나서 이야기하시죠. 제가 JH 메디컬로 가면 되겠습니까?
샘플 작업 당시, 단 한 번도 우리 회사로 찾아온 적이 없었던 그가 이제 와 오겠다는 것 역시 우스웠다.
굳이 화를 내며, 적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분노를 겨우 삼켜 내며 그에게 답했다.
“아닙니다. 바쁘신데 오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 아이고, 갈게요. 가서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 나누면…….
“박 사장님. 죄송한데, 오셔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그의 행동은 너무나도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다른 회사를 통해 제작한 파우더 스플린트.
그 제품이 점점 병원에서 판매가 되기 시작한 것과.
최소 발주량이 1,000개였던 것을 생각하니 이제야 배가 아픈 모양.
예전 샘플 작업을 할 때만 하더라도, 샘플 자체 작업도 귀찮아했던 에어 메디컬.
그래서 내가 그를 연신 찾아가며 사정사정해서 진행한 게 샘플 작업이었다.
거기에 말도 되지 않는 최소 발주량 1,000개를 불렀고.
결국, 내가 그 발주량을 맞추니 그다음에 하는 행동이 단가 인상 계약이었지.
계속해서 말이 바뀌는 박 사장의 태도에.
그와 인연을 좋게만 이어 간다고 해서 내게 득이 될 게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그래도 직접 만나서 말씀을 드리면 계약을 진행할…….
“오셔도 계약은 다시 성사되지 않을 겁니다, 박 사장님.”
내 말에 박 사장은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아니, 민 대표님. 그런 식으로 장사하는 거 아닙니다. 제조업으로 새로 시작하셨다길래, 내가 바쁜데, 없는 시간 쪼개서 샘플 작업도 해 주고. 게다가 단가도 신생 회사라 저렴하게 해 준다고 한 건데.
그는 분노에 차오른 듯 언성을 높여 갔다.
- 이렇게 사람 성의를 무시하면 안 되지. 보류한다고 해 놓고, 다른 회사랑 쏙 작업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젊은 양반이 사업한다고 해서 내가 동생 같아 잘 해 주려고 한 건데!
결국, 그는 내가 겨우 눌러 놨던 화를 터트리고 말았다.
“박 사장님. 말은 제대로 하셔야죠. 없는 시간 쪼개서 샘플 작업이요? 제가 뭐 무료 봉사로 해 달라고 한 겁니까?”
-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정당한 금액을 지불하고, 샘플 요청을 드린 겁니다. 그걸 수락하셔서 작업하신 거잖습니까.”
나는 한숨을 삼켜 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1,000개의 최소 발주량을 던져 주실 때는 언제고. 수량 맞춰 오니 그제야 단가 인상이라니요. 동생 같다면서, 그렇게 하신 겁니까?”
- 흠흠……. 그건 진공 포장이 금액이 다르니까 그런거고.
그는 헛기침을 하며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
“네, 말씀 잘하셨네요. 저도 진공 포장 이중으로 요청 드리니까, 귀찮다고 하셔서 단가 인상되더라도. 좋게 좋게 가려고 했습니다.”
내 말에 그는 다시 적반하장의 태도로 입을 열었다.
- 그래. 그 포장을 이중으로 한다는 게 여간 귀찮고, 힘든 작업이 아니에요.
“사장님. 포장 단가 차이 없는 거, 저도 알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좋게 좋게 가려고 사장님께 맞추려고 했을 뿐이에요.”
나는 결국 한숨을 쏟아 내며 말했다.
“갑자기 포장 핑계로 급하게 단가 올리려고 하는 거, 정말 제가 모를 줄 아셨습니까?”
- 그게… 사업이라는 게, 서로 윈윈하면서…….
“근데 너무 터무니없는 금액을 부르셨는데, 제가 모든 걸 알고도 응해야 하는 게, 사장님이 말씀하신 사업인가요?”
- 내가 언제 모든 걸 응해야 한다고 했나, 그런 게 아니고.
“아니요. 서로 윈윈하는 사업이라는 걸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윈윈이라는 건, 상부상조예요. 각자 원하는 걸 얻는 거. 근데 박 사장님은 본인이 원하는 것만 항상 일방적으로 얻으려고 하시잖아요. 제 말이 틀립니까?”
- 아… 내가 지금 바쁜데, 전화를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네.
“단가를 그렇게 터무니없이 올리시고, 신생 회사를 무시하시면 안 되는 거죠!”
- 미안해요, 내가 지금 급해서 전화를 좀 끊어야겠네.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
급히 꼬리를 내리고, 전화를 끊은 박 사장.
나는 끊긴 전화를 보며, 가쁜 숨을 몰아 내쉬었다.
그리고 텅 빈 화면을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내 모든 말을 쏟아 냈지만,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내가 파우더 스플린트로 장사가 되기 시작하니까 이렇게 다시 계약을 하자 붙잡는 박 사장의 태도가 어이가 없었다.
이번에는 그에게 조목조목 따지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뱉었지만.
내가 앞으로도 다른 기존의 회사들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무조건 제조업 회사로 더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들이 초반에 나를 얕보는 건, 내가 이름 없는 신생 회사이기 때문일 터.
이 업계에서 빠르게 성장해야만 한다.
…반드시.
* * *
며칠의 시간이 흐르며, 계속해서 파우더 스플린트는 제조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그렇게 주말이 지난 월요일 아침.
산뜻한 기분으로 JH 메디컬의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커피를 양손에 들고 신소율과 문지음을 향해 말했고.
그녀들은 내가 온 것도 보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네, 여보세요? 맞습니다.”
“여보세요, 네, JH 메디컬입니다. 예, 파우더 스플린트 단가표요?”
계속해서 전화를 받고 있는 그녀들을 보며, 나는 살며시 커피를 각자의 책상에 올렸고.
신소율과 문지음은 나를 흘긋 바라보며 눈인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나는 잠시 그들의 통화를 들었고.
통화 내용은 전부 파우더 스플린트와 관련 있는 대화 내용이었다.
뭐지, 갑자기 이렇게 발주가 몰린다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쁜 사무실을 뒤로하고 대표실로 향했다.
내가 거기에 있는다고 해서 도울 일이 없었으니까.
전화기는 그들 앞에 한 대씩.
내가 대신 전화를 받아 줄 수도 없을 터.
“지난 주말에 병원들에서 동시에 스플린트 재고가 떨어졌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 앉았고.
그때.
지이잉—
내 휴대전화 역시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네,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여기 서울에 있는 플랭 병원이라고 하는데요.
“예, 안녕하세요.”
- 저희가 명함을 하나 받게 돼서 연락드려요. 파우더 스플린트 제품이 좋다고…….
내게 전화가 온 것 역시 파우더 스플린트 관련 얘기였고.
나는 짧은 응대 후 전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자마자 휴대전화에서는 다시금 진동이 세차게 울렸다.
지이잉—
그렇게 오전 내내 내 전화는 파우더 스플린트에 관한 문의로 폭주하고 있었고.
전화로 사무실에 발이 묶여 버린 나는 정신없는 오전을 보내야만 했다.
“주문이 들어오니까 좋기는 한데, 내가 영업을 따로 한 적도 없고… 무슨 일이지?”
그리고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달력을 가리켰다.
“아, 지난 학회에서 만났던 원장님들 병원에서, 입소문으로 이제 발주가 터지기 시작하는 건가?”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어느새 시간은 점심시간인 12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대표실 문을 열고 나가, 사무실 직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소율 씨, 지음 씨. 오늘은 좀 일찍 나가서 같이 식사할…….”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울리는 사무실의 전화.
“대표님, 잠시만요.”
신소율은 자신의 앞에 놓인 전화를 받았고.
“네, JH 메디컬입니다. 아, 파우더 스플린트요?”
또다시 파우더 스플린트에 관한 통화인 것을 확인한 뒤.
나는 문지음에게 다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음 씨.”
“네, 대표님.”
“오늘 오전에 파우더 스플린트 전화 온 거죠, 전부?”
그녀는 지친 기색으로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출근하자마자 병원 공급실에서 발주랑 문의 전화가 완전 폭발했어요.”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에게 물었다.
“뭐지, 갑자기 주말이 지나자마자 문의 폭주라…….”
내가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기자, 문지음은 고개를 모니터에 고정한 채 타이핑을 하기 시작했다.
타닥 타닥—
그렇게 무언가 한참을 찾던 그녀는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를 바라보았다.
탁—!
“대표님.”
“네, 지음 씨.”
“헐, 빨리 이것 좀 보세요!”
그녀의 큰 목소리에 전화를 끊은 신소율까지 자리에서 일어났고.
허공에서 눈이 마주친 신소율과 나.
“무슨 일인데 그래요?”
“얼른 이것 좀 보셔야겠는데요?”
신소율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지음의 모니터 앞으로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