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어? 안녕하세요, 한 과장님. 어떻게 여기서 뵙네요.”
김사랑과 데이트하던 도중 한민아 과장을 마주치다니.
한 과장은 내 인사에, 자신의 등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여기 뒤가 사무실이에요. 이제 퇴근하고 나오는 길이라서요. 하하.”
그녀의 말에 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퇴근 시간을 지나 7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야근하셨나 보네요.”
“네. 오늘 업무가 좀 있어서 늦었어요. 그런데 누구…….”
그녀는 김사랑을 바라보며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내 손은 김사랑 원장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고, 그녀는 내 손을 빼내려 하고 있었다.
나는 더욱 잘 보이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며, 한 과장을 향해 답했다.
“제 여자 친구예요.”
한 과장은 내 말에 적잖이 놀란 듯했다.
놀라서 커진 눈으로 나와 김사랑을 번갈아 쳐다보며 재차 되물었다.
“정말요? 여자 친구분이요?”
“네. 만난 지는 좀 됐어요. 하핫. 이렇게 보여드리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리고 이내 손뼉을 부딪치는 한 과장.
“정말 축하드려요!”
나는 그녀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하하하.”
“어? 그럼 그때 말씀하셨던, 좋아하시는 분 있다는 게…….”
작년, 한 과장과 독대하는 식사 자리에서 나는 그녀의 마음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날 일을 이야기하는 모양이다.
“네, 맞아요. 그때 좋아한다고 했던 분이에요. 성공했죠?”
“쟁취해 내셨네요? 역시 민 과장님.”
그녀는 내게 엄지를 치켜들었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김사랑은 궁금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같은 회사 동료분……?”
나는 서둘러 한 과장을 바라보며 김사랑에게 말했다.
“아! 소개가 늦었네. 거대 메디컬이라고 알지?”
“거대 메디컬? 모를 수가 있나. 알지!”
“응. 거기에 한민아 과장님이셔.”
“반가워요. 한 과장님.”
김사랑은 그녀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했다.
그러자 한 과장은 그녀와 손을 맞잡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반갑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뵌 분 같은데…….”
“저요? 병원에서 보셨나? 저는 행복 정형…….”
김사랑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한 과장이 큰 목소리로 답했다.
“아! 행복 정형외과! 맞으시구나! 어쩐지 어디서 뵌 것 같더라니.”
“어머! 저를 아세요?”
“그럼요. 모를 수가 없죠. 메디컬에서 일하면서 행복 정형외과를 모를 수가 있나요? 아니, 서울만 살아도 다 알걸요? 하핫. 작년에 새로 여자 원장님 오셨다고 들었거든요. 병원 사이트 사진으로만 뵀지만요.”
“그러셨구나. 저는 영업 오셔서 만났던 분인가 했어요.”
그녀들은 서로 웃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오히려 내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아니에요. 제가 가고 싶었는데, 저희 회사에서 다른 담당자분이 행복 정형외과 가셔서 저는 못 가봤어요. 다음에 행복 정형외과 가게 되면 인사드리러 갈게요.”
“좋아요! 저도 메디컬 영업하시는 분 중 여자분을 많이 못 뵀었는데, 반가워요.”
“다음에 꼭 갈게요! 아, 제가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았네요. 데이트하시던 중이셨을 텐데, 어서 가보세요! 그럼, 두 분 데이트 즐겁게 하세요.”
한 과장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며 나에게 입을 열었다.
“민 과장님, 능력이 너무 좋은 신 거 아녜요? 하핫. 다음에 또 봬요.”
한 과장은 그 말을 끝으로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김사랑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내 손은 제자리를 찾아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영화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지훈이 너 뭐야?”
“응? 뭐가?”
“지훈이 너… 나 좋아하는 거, 저 과장님도 알고 있던 거야?”
“아… 그게…….”
내가 입을 열어 답하기도 전에 그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아! 생각났다! 저 한민아 과장님, 저번에 우리 술 마실 때 전화했었던 그 사람이잖아? 맞지?”
내가 김사랑과 만남을 가지기 전, 그러니까 우리가 친구였던 시절, 그녀와 와인바에 갔을 때 한민아 과장에게 전화가 왔던 적이 있다.
저녁 늦은 시간이었기에 김사랑은 그 전화에 질투하는 모습을 보였었지.
물론 그 연락이 사적인 통화가 아니라 업무로 인한 통화였었지만 말이다.
“뭐야, 이제 기억난 거야? 하하. 나는 아까부터 알고 있는 줄 알았네.”
“나는 그때 지훈이 너한테 혹시 다른 여자 생길까 봐 조마조마했었거든.”
나는 그녀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럼 사랑이가 나 먼저 좋아한 거 아니야?”
내 익살스러운 표정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닌데? 지훈이 네가 오히려 나 광주에서부터 좋아했던 거 아니야?”
그녀와 나는 여느 커플처럼 유치한 사랑싸움을 나누며, 그렇게 걸어갔다.
* * *
“그게 사실이야?”
호통을 칠 거라 예상했으나, 오히려 차분한 임정준 사장의 목소리에 그의 맞은편에 있는 상대는 주눅이 들었다.
“아… 사장님,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백승민 이사는 임 사장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말끝을 흐렸다.
“하. 네가 이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진짠가 보네. 승민아. 우선 자리에 앉아봐.”
임 사장은 자신의 책상에서 일어나 소파로 걸어갔다.
책상 앞에 서 있던 백 이사도 임 사장을 따라 자리를 옮겼다.
“네, 사장님.”
그들은 자리를 옮겨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백 이사, 아니 승민아. 내가 너를 가족같이 생각하고 아끼는 거 너도 알고 있지 않냐. 네가 나한테 이래도 되는 거냐?”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백 이사는 임 사장을 향해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임 사장은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너를 친동생처럼 생각해서 조카까지 맡기려고 한 건데, 이건 아니지. 대체 왜 그런 거야? 솔직하게 말 좀 해봐라.”
잠시 둘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고, 이내 백 이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돈… 때문에 그랬습니다.”
“뭐? 돈?”
임 사장은 허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재차 되물었다.
“예……. 죄송합니다.”
“인마. 돈이 필요하면 말을 하면 될 거 아니냐. 내가 돈을 적게 주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임 사장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커다란 사장실 안에는 임 사장의 한숨 소리로 가득 찬 듯했다. 그리고 그 가득한 한숨을 뚫고 임 사장이 입을 열었다.
“하긴. 돈이라는 게 뭐 얼마를 받아야 충분한 게 있겠냐. 그저 많을수록 좋은 거고, 항상 부족한 게 돈이지. 그래서 정말 단순히 돈 때문에만 그랬다는 거야?”
“네……. 제가 그거 아니면 왜 그런 짓을 했겠습니까. 다른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형님, 아니 사장님.”
백 이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접었다.
“정말 제가 형님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회사 그만두라는 이야기만 하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뭐든 다 하겠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 처자식도 있고, 이번에 우리 애 대학도 가는 거.”
또다시 둘 사이에 정적이 찾아왔지만, 이번엔 아까보다 더욱 차가운 분위기였다.
똑딱똑딱.
사장실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벽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뿐, 임 사장과 백 이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않은 채 각자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그리고 잠시 뒤 임 사장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승민아.”
“예, 사장님.”
“다시는 그러지 마라.”
“네?”
용서하는 듯한 말투에 백 이사는 놀란 듯 임 사장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긴 숨을 내쉬며 답했다.
“내가 널 알게 된 지가 뭐 하루 이틀이냐? 우리 벌써 10년도 넘은 사이잖냐.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실수 한 번, 잘못 한 번 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이 일로 너를 내치겠어.”
“…죄송합니다. 정말.”
백 이사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리고 그는 아직 소파 옆에 일어나 있는 상태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앞으로 돈이 필요하면 말을 해. 이런 식으로 하지 말고. 내가 너 돈 필요하다는데 무시할 사람으로 보였냐?”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죄송하면, 승재 좀 옆에 두고 잘 키워봐라.”
그의 말에 백 이사는 고개를 들고 임 사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임 과장 말씀하시는 거죠?”
“어. 그놈이 포부는 큰데, 알잖아. 아직 실력이 부족한 거. 그러니까 백 이사 너한테 내가 큰 거래처 주라고 하면서까지 맡아보게 한 거.”
“예. 제가 열심히 가르쳐 보겠습니다.”
“그리고…….”
임 사장은 긴히 할 말이 있는지, 손짓으로 백 이사에게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조 차장 말이야. 어떻게 하는 게 편할까 생각 중인데…….”
백 이사 역시 조 차장이 자신의 이야기를 임 사장에게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백 이사는 그로 인해 조 차장에게 화를 내거나 따질 생각은 없었다.
명백하게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저 꼬리가 길어 재수 없게 걸렸다,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임 사장이 먼저 조 차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임 사장은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어 갔다.
“조 차장, 저번 등급 평가 때 민 과장 일도 있고, 앞으로 회사에서 목소리를 크게 낼 사람 같아. 민 과장이야 실적도 잘 나오고 매출에 큰 도움이 되기는 하니까 오히려 도움이 되는 직원이지만 말이야.”
백 이사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한쪽 눈을 작게 찡긋거리며 말했다.
“사장님. 그럼 이건 어떠실까요?”
* * *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시작되는 회의에 다들 부은 눈으로 회의실에 모였다.
직원들끼리 잡담을 주고받기 시작한 지 5분이 채 되지 않아 회의가 시작됐다.
임 사장은 참여하지 않고 백 이사까지만 참여한 회의로 늘 그렇듯 일주일간의 영업 보고와 이번 주 영업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오늘은 무슨 이야기인지, 중대 발표 사안이 있다고 한 회의였다.
회의 시작 전, 직원들끼리 주고받던 대화의 주제 역시 이 중대 발표가 무엇일까에 관한 것이었다.
결론은 그 중대 발표가 어떤 것일지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한 명씩 발표가 끝나고 마지막 백 이사의 평가 시간.
즉, 직원들에게 칭찬과 질책을 할 시간이 왔다는 것이지.
“다들 고생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백 이사의 짧은 한마디에 직원들은 모두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칭찬과 질책의 시간은 오버를 조금 보태자면, 거의 직원들 발표 시간과 맞먹었었다.
그런데 ‘다들 고생했다’라는 한마디로 끝나버리다니.
무슨 일이지?
혹시 중대 발표가 있다는데, 백 이사가 회사를 그만두기라도 하는 건가?
지난 주말이 찾아오기 전, 조 차장이 내게 말을 해주었었다.
자신이 임 사장에게 백 이사의 만행에 대해 다 털어놓았다는 것을 말이다.
조 차장과 내 예상으로는 분명, 임 사장이 백 이사에게 회사 내에서 징계를 내리거나, 심할 경우 퇴사 처리까지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오늘 중대 발표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도 있다.
백 이사가 회사를 그만두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회사를 그만 다니게 하고 싶어서 그 이야기를 회사에 알린 건 아니었으니까.
그저 잘못된 일, 회사 물품을 횡령한 것에 대한 처벌을 기대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내가 오늘 할 말 있다고 했던 거 기억나지?”
“예,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일인 겁니까?”
직원들은 백 이사를 향해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 조 차장 역시, 백 이사의 입을 바라보며 그가 무슨 말을 할지 한껏 집중했다.
“우리 부산에 있는 지사에 실적이 많이 부족해. 그래서 인원 충원으로 한 명을 보내야 하는데…….”
백 이사의 말에 직원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조성철 차장이 부산 지사로 가게 됐다. 다들 박수!”
부산 지사로 내려가는 것을 이렇게 갑자기 통보하다니.
사실을 알 리 없는 직원들은 그저 백 이사의 말에 얼떨결에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탁.
“제가 왜 갑자기 부산으로 가야 하는 겁니까? 갑자기 저한테 왜 그러시는 건데요!”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세게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치는 조 차장.
그는 이번 발령을 자신이 백 이사에 대한 만행을 이야기해 일어난 결과라고 확신했다.
조 차장의 말에 회의실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리고 백 이사는 예상했다는 듯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부산 지사도 우리 회사야. 당장 성과 낼 수 있는 직원이 필요한 것뿐이고. 그러려면 경력도 있고, 실력이 출중한 직원을 보내야 해. 회사 입장에서 조 차장이 그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거고.”
“정말… 이유가 그것뿐인 겁니까?”
“그럼. 이유가 없는 것은 없어. 다 생각하고 회사에서 좋은 방향으로 선택하는 거지.”
그의 말에 조 차장은 말문이 막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