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주말이 지나고 찾아온 월요일 아침.
간단한 업무를 마친 뒤, 담배를 피우기 위해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에 올라오자 몇몇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담배를 피우러 올라온 것이지만, 직원들이 몰려 있기에 자연스레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민 과장님 오셨어요?”
내게 목례를 하며 말하는 이찬호 사원.
나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자연스레 무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임 과장이 제국 정형외과 담당하는 거야?”
지금 화두에 올라와 있는 것은 임 과장이 영업해 온 병원이었다.
“예, 맞습니다!”
임 과장은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입술을 들썩거리며 말했다.
“와. 진짜 대단하십니다. 제국 정형외과를 첫 담당 병원으로 하시다니. 이렇게 실력이 뛰어나셔도 되는 겁니까?”
“크으. 그러니까요. 제국 정형외과면, 진짜 어휴. 임 과장님 올해 더 일 안 하셔도 되겠는데요?”
직원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제국 정형외과라면 그럴 만한 병원이었다.
나 역시 이 이야기에 입을 떡하니 벌렸으니 말이다.
제국 정형외과는 서울에서 제법 큰 병원 중 하나이다.
서울에는 워낙 크고 유명한 병원들이 많아 유명한 병원들을 대자면 손가락으로 꼽기에도 모자라지만, 제국 정형외과는 그중에서도 꽤나 유명한 곳이지.
병원이 오래되어 벌써 리모델링을 두 번이나 했을 정도니 말이다.
그만큼 역사도 있고, 의사들의 경력 또한 엄청난 곳.
당연히 병원 매출은 말할 것도 없지.
그런 제국 정형외과를 임 과장이 해내다니.
과장직에서 제국 정형외과를 따내오는 것으로도 놀라울 일인 것이다.
하지만 직원들이 지금 이렇게까지 놀라는 이유는 그 직원이 바로 임 과장이기 때문이다.
처음 그가 임 사장의 조카라며 뜬금없이 과장직으로 왔을 때 돌던 소문.
그가 경력도 실력도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첫 영업부터 이렇게 엄청난 병원을 따내 왔다?
이 이유만으로 직원들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 것이지.
“하하, 아닙니다. 앞으로도 더 열심히 해야죠.”
“아이, 벌써 이런 성과를 내셨는데 더 열심히 하시면 큰일 나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그래. 임 과장, 벌써 좋은 실적도 내고 충분히 잘하고 있어.”
언제부터 있었는지 김석구 차장이 임 과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차장님.”
임 과장은 갑자기 주머니를 뒤적였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병원에서 전화가 와서 자료 확인하러 먼저 사무실에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는 휴대전화에 전화가 걸려오는 화면을 보이며, 부리나케 사무실로 달려갔다.
임 과장이 사라지고 잠시 뒤.
직원들은 조금 전보다 더 많이, 더 빨리 입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 제국 정형외과는 진짜 대박 아닙니까?”
직원 하나가 입을 열자, 옆에 있던 강 대리는 똥 씹은 표정으로 그를 나무랐다.
“말이 되냐? 아마 임 사장님 백으로 해준 거겠지. 딱 보면 모르냐? 안 그렇습니까, 김 차장님?”
나는 그런 강 대리의 태도에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그렇게 아부를 떨 때는 언제고 임 과장이 사라지자마자 뒷담화를 하는 그.
평생 충성할 것처럼 앞에서 난리를 치더니, 역시 그가 왜 박쥐라고 불리는지 알 정도.
강 대리는 김 차장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구시렁거리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슬쩍 뒤로 한걸음 뺀 뒤 흡연 구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임 과장이 스스로 해냈다거나, 혹은 누군가의 백으로 인해 해냈다거나 어느 쪽에 확신을 두는 것은 아니다.
그저 저렇게 앞에서는 알랑대고, 곧바로 뒤에서는 자신의 편이라는 사람에게 뒷담화를 나누는 게 싫었을 뿐.
임 과장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진짜 홀로 해내온 것이라면 나 역시 리스펙을 할 정도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만큼 제국 정형외과가 어마어마한 병원이기에,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해냈다는 게 의아할 뿐인 것이지.
* * *
“그럼 말씀하신 대로 다음에 올 때는 추가된 제품으로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물건은 다음 주에 오는 건가?”
“예. 혹시 빨리 도착하면, 곧장 가지고 오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행복 정형외과 부원장에게 허리를 접었다.
행복 정형외과에서 빠져나온 나는 차를 타려다 급히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 발길은 김사랑 원장의 진료실로 향할 예정.
김 원장에게 볼일이 있어 가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행복 정형외과에 왔기에, 담당 원장들에게 인사차 가는 것이다.
직장 생활에서 가장 애매한 시간인 3시.
이 시간이면 앉아서 일하는 직원들은 슬슬 목과 허리를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는 시간이다.
지루하고 피곤하다는 뜻이지.
나는 김 원장의 진료실로 향하기 전, 병원 앞에 있는 카페에 들러 그녀가 좋아하는 아이스 바닐라라떼를 주문했다.
똑똑.
“원장님!”
문을 열자, 역시나 그녀는 앉은 자리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목을 젖히고 있었다.
피곤이 쌓여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참인가 보다.
“어? 민 과장님!”
“피곤하시죠? 그럴 줄 알고 커피 사 왔어요.”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 커피를 건네자 그녀는 눈썹 끝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감동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나 안 그래도 방금 커피 마시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고마워, 민 과장님.”
“그러실 것 같았어요.”
“역시 민 과장님은 나를 잘 안다니까?”
환하게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그녀.
“맞다. 그날은 진짜 고마웠어.”
“네? 어떤 거 말씀이세요?”
“그때, 병원장님 도와줬던 거 말이야. 무슨 영화 속에 나오는 히어로 같았어.”
“아닙니다. 원장님 따라 입원실 올라갔다가 우연히 환자와 발이 엉킨 건데요, 뭐.”
병원에서 환자가 병원장에게 칼을 들고 난동을 피우려고 했던 사건.
그때 도와준 일로 계속해서 고맙다는 그녀.
“에이, 엉키기는. 보니까 일부러 민 과장님이 발 뻗는 거 다 봤는데? 아무튼, 정말 대단했어.”
“그렇게 고마우세요?”
김 원장은 내 말에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럼 진짜 고맙다니까?”
“고마우면 다음에 술 사주세요.”
“당연하지! 언제 시간 돼?”
김 원장은 내 말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약속을 잡으려 했다.
“저야 퇴근하고 남는 게 시간이죠. 원장님 되시는 날로 할까요? 언제 가능하세요?”
“그럼… 오늘 어때? 퇴근하고 바로?”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좋아요.”
* * *
얼마 전 그녀와 왔던 와인바.
분위기도 좋고 와인과 안주도 마음에 들었던 터라 다시 한번 이곳을 찾았다.
챙.
나와 와인 잔을 부딪치는 김 원장.
그녀는 와인을 살짝 입에 댄 후에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민 과장님이 나한테 먼저 술 마시자고 한 거 처음이다?”
몰랐다.
그녀와 그렇게 많은 술자리를 가졌음에도 내가 먼저 제안하는 것이 처음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많은 술자리들은 모두 그녀가 먼저 제안했던 거라니.
괜스레 미안해지는 마음.
내 표정을 보고 눈치챘는지 김 원장이 재차 입을 열었다.
“미안해하라는 거 아니야. 오늘 민 과장님이 먼저 먹자고 해줘서 고맙다고, 아니 좋다고 하는 거야.”
“앞으로는 제가 먼저 말해야겠네요.”
술자리를 좋아하는 그녀, 그리고 나.
우리는 덕분에 항상 저녁에 술을 곁들여 마시고는 했다.
그래서인지 처음부터 그녀와 금방 급속도로 친해진 것도 있겠지.
지금이 그녀와 몇 번째 술자리인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우리는 많이 만났다.
그것뿐이겠는가.
카페, 술이 없는 식사 자리, 그리고 영화까지.
그만큼 우리는 수차례 사적인 만남을 가졌고, 가까워졌다.
“좋아!”
한창 대화를 나누다 정적이 흐르는 지금.
이 정적마저도 어색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그녀와 서로 아무 말을 하고 있지 않아도 편한 사람.
나도 모르게 그녀는 내게 그런 존재가 되어 있었다.
흘러나오는 재즈에 홀린 듯 빠져 있던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보며 눈꼬리를 아래로 내려뜨리면서 씨익 입꼬리를 올리는 그녀.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친구 된 지도 오래됐는데, 말 놓을까…요?”
김 원장은 광주에서부터 내게 말을 놨었다.
나에게도 말을 편하게 하라고 했었지만, 나는 그녀와 사적보다는 공적인 친분이 크고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끝까지 놓지 않았었지.
그 덕에 그녀도 내게 항상 ‘민 과장’이 아닌, ‘민 과장님’이라는 호칭을 불렀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비즈니스 관계를 떠나, 진정한 친구가 됐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그 생각이 든 것은 아니지만, 요즘 그리고 지금에서야 비로소 한 번 더 깨달은 것이지.
그녀는 나와 생각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기에 조심스레 물었지만, 돌아오는 그녀의 반응은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진짜? 드디어 민 과장님도 말 놓는 거야? 나야, 좋지! 나도 그게 더 편해.”
“정말요?”
“응. 내가 빠른 연생이잖아? 그래서 뭐, 사실 사회에서는 아래 연생들이랑 친구도 많이 먹었거든. 그래야 한 살 더 어린 거 같잖아? 하핫.”
해맑게 웃는 그녀.
“좋아요! 아니, 좋…아!”
“나도. 민 과장님, 아니 지훈…아?”
그녀는 멋쩍은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었다.
“그럼 우리 짠할까? 말 놓은 친구 된, 아니 더 가까워진 기념으로?”
그녀는 와인 잔을 들고 고개를 사선으로 꺾으며 내게 말했다.
“그러자. 더 가까워진 기념으로!”
챙.
와인 잔은 서로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뿜어냈다.
그리고 우리는 연신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주변에 있는 여러 연인들처럼.
* * *
오전 일찍부터 새로운 거래처를 뚫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준비했던 대로 병원의 여러 원장을 만나고 로비에서 빠져나오는 길.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 흡연 구역 벽에 기대고 있었다.
“어? 백 이사님?”
나는 혼잣말로 그를 발견하고, 곧장 그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한참을 가까워져도 그는 무슨 깊은 생각에 잠겼는지, 연신 담배만을 피우고 있었다.
“이사님!”
내 부름에 놀란 그는 담배를 입에서 빼내며 말했다.
“어? 민 과장이 여기는 어쩐 일이야?”
“저는 병원 영업하러 왔다가……. 백 이사님이 여기 병원 영업 중이신 거 몰랐습니다.”
“아, 아니야. 여기 병원장님이랑 다른 볼 일이 있어서 온 거야. 영업 열심히 해. 이 병원도 매출 꽤 크니까.”
“예, 알겠습니다! 자판기 커피라도 드시겠습니까?”
“좋지.”
나는 곧장 옆에 있는 자판기로 다가가 지폐 한 장을 넣고, 커피 두 잔을 뽑아 그에게 다가갔다.
“잘 마실게.”
회사에서는 백 이사와 단둘이 담배를 피울 기회가 없었다.
당연했다.
내가 이사에게 담배를 피우러 가자고 하면 건방져 보였을 테니까.
그 역시 나를 따로 불러냈던 적도 없지.
그래서 백 이사와의 독대는 처음이었다.
실상 그와 나는 직책으로 보든, 나이로 보든 정말 먼 관계인 것.
즉, 지금 그와 나눌 이야기가 마땅히 없다는 것이다.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인 날씨 이야기를 꺼냈다.
“쌀쌀하긴 한데, 그래도 하늘이 깨끗해서 좋은 것 같습니다.”
“맞아. 완연한 가을이다. 짧긴 해도 이때가 좋지.”
“맞습니다. 짧으니까 유독 더 좋은 느낌이에요.”
날씨 이야기는 물꼬를 트기에 좋지만, 오래 이어지지 못하는 대화 주제이다.
그리고 다음은 공통점 이야기.
서로의 공통된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면 그만한 주제가 없다.
그와 나의 공통점은 단 하나, 회사 이야기뿐이다.
“아, 이사님. 그거 들으셨습니까?”
내가 꺼낼 이야기.
당연히 백 이사는 알고 있을 테지만, 나는 그와 말을 섞어야 했으니 이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어떤 거?”
“임 과장 말입니다. 이번에 제국 정형외과 따냈다고 하더라고요. 진짜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오자마자 그렇게 큰 거래처를 바로 따옵니까?”
“그렇지. 제국 정형외과가 대단한 병원이기는 하지.”
“알고 계셨군요. 하긴, 이사님이 먼저 알고 계셨을 텐데. 아무튼, 도는 소문에 아직 경력이 짧다고 들었었는데, 역시 가족의 피가 흐르는지 영업력도 임 사장님처럼 대단한가 봅니다.”
그는 내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백 이사의 낯빛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그에게 물었다.
“이사님. 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왜?”
“심각한 일이 있으신 것 같은 얼굴이셔서요.”
그는 애써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별일은 뭐…….”
그리고 동시에 들려오는 그의 속마음 소리.
[하. 내가 얼마나 공들인 병원인데, 실력도 없는 조카 새끼한테 고스란히 가져다 바쳐야 하는 게 말이 되냐. 이사씩이나 돼서 빨대를 꽂히는 게 말이 돼?]
그의 속마음을 들은 나는 순간 아무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