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네, 그럼 어디신가요?”
- 여기는 IBH 메디컬이라고 합니다.
“IBH 메디컬이요? 거기에 저희 담당자님 계신데, 전화 주신 분은 다른 분이신 것 같네요. 혹시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IBH 메디컬.
우리 회사처럼 메디컬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병원에 물건을 납품하는 회사는 아니다.
IBH 메디컬은 우리에게 물건을 파는 제조 회사다.
IBH 메디컬에서 수술 기구를 제조하고 우리에게 판매하면, 우리는 그 물건을 병원에 납품하는 것.
제조 회사는 보통 한 군데하고만 거래하지 않는다.
우리가 병원에 납품해야 하는 종류만 보아도 수십, 아니 수백여 가지이다.
그 모든 물건을 전부 제조하는 회사는 단 한 군데도 없다.
부위마다 수술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수술 기구 종류만 해도 개수가 엄청나다.
특히나 소모품 같은 경우도 종류가 워낙 많기 때문에 우리가 거래하는 제조사 회사만 따져도 손가락으로 셀 수가 없다.
그중 IBH 메디컬에서 제조하는 제품은 소모품이 아닌, 수술 기구이다.
이미 우리는 IBH 메디컬 제조 제품을 납품받고 있었고, 우리 회사와 연락하는 IBH 메디컬 영업 담당자도 이미 정해져 있다.
대부분 제조 회사와는 물건을 발주하거나, 물건을 가납 받을 때 연락을 하기에 담당자와도 자주 연락을 주고받고는 한다.
보통은 우리가 발주나 가납으로 연락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먼저 전화를 거는 편에 속한다.
매출 관련 내용이나 물건 피드백 같은 것은 주로 장 사장이 하는 편이지.
그런데 IBH 메디컬에서 나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던 담당자의 목소리가 아니었기에, 나는 전화를 건 사람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 아, 저는 IBH 메디컬 인사과의 박동우 팀장이라고 합니다.
“아…….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를 주셨을까요?”
전화를 건 사람이 ‘인사과’라는 말에 왠지 내용을 나 혼자만 알아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 사장과 박 주임이 함께 있었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최대한 자연스레 전화를 받으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 이번에 저희가 직원을 뽑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 그 기회를 민지훈 과장님께 드리고 싶어서 연락드리게 됐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놀라 제자리에서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 대답이 없자 상대는 말을 재차 이어 갔다.
- 스카우트 제안 드리는 겁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 현재 저희 회사와 거래하고 있는 광주 메디컬에 다니시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자사 제품은 익히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고, 다른 이야기를 드려볼까 합니다.
나는 IBH 제조사의 이야기를 우선 들어보기로 했다.
지금 무슨 상황인지는 알아야 했으니까.
“네, 말씀해 주세요.”
- 이번에 저희 신제품이 여러 개 나올 예정입니다. 기존의 각 지역 메디컬로 영업 나가던 직원 수를 늘릴 계획에 있습니다. 신제품들이 한 라인으로 나오게 되는데, 이번 프로젝트로…….
그는 말을 쉬지 않고 이어 갔고, 나는 그의 말을 한참이나 경청했다.
박 팀장은 프로젝트에 대해, 그리고 직원을 충원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난 후 내게 질문을 던졌다.
- 실례지만, 제가 민지훈 과장님의 연봉이 어느 정도 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제 연봉이요?”
- 네. 그걸 알아야 저희가 민지훈 과장님께 어느 정도의 선으로 맞춰 드릴 수 있을지 협의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죄송하지만, 아직 저는 이직 생각이…….”
수화기 너머의 그는 내 말을 자르고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 과장님. 저희는 국내에 있는 제조사 업체 중 손가락에 꼽힐 만한 대기업입니다. 현재 과장님의 연봉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동종 업계 내에서 이만큼 받으실 수 있는 곳은 또 없을 겁니다.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 추후에 생각을 정리하시고 말씀해 주신다면, 정확한 연봉은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광주광역시에 거주 중이신데, 서울 본사로 오시게 된다면 사택 지원도 가능합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알았습니다.”
- 저희가 관련 내용을 보내드릴 테니까, 보시고 궁금하신 건 바로 연락 주시고…….
“근데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팀장님.”
- 예. 말씀해 주세요.
“저를 어떻게 알고 연락 주셨는지, 왜 저를 스카우트하시려는지 알 수 있을까요? 굉장히 갑작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 아… 네. 갑자기 연락드려서 그렇게 생각하셨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광주 메디컬 입소문이 자자하더라고요. 신생 회사라고 들었는데, 성장률도 뛰어나고요.
“그렇습니까?”
- 네. 광주 지역 쪽에서는 유명해졌다고 들었습니다. 저희에게 물건 가져가시는 양도 상당해졌고요. 마침 저희도 메디컬 업계에서 실력이 뛰어난 분을 찾고 있다가 과장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평소 IBH 메디컬과 연락할 일도, 교류한 적도 없었던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 예. 그런데 저희 영업부 직원들한테서 많이 추천 받았습니다. 민지훈 과장님을요. 광주 지역에서는 과장님이 유일하게 추천받으셨습니다.
“어쨌든 좋은 일로 언급됐다니, 기분은 좋네요.”
- 예. 평소에도 회사 내에서 여러 번 과장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럼 자료는 제가 과장님 메일로 보내드릴 테니, 한번 검토해 보시고 답변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는 침을 한 번 삼킨 후 말을 이어 갔다.
-연봉, 사택 등 기본적인 내용도 함께 기재되어 있을 겁니다. 이 부분들은 과장님께서 결정하신 후 충분히 협의도 가능하고요.
“팀장님, 이번 제안은 정말 감사한데요.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이직 생각이 없어서요.”
- 아…….
그는 내 말에 탄식을 쏟아냈다.
- 과장님. 바로 대답 안 해주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저희 프로젝트 기간이 곧 시작돼서, 며칠 안으로는 결정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신중히 생각해 보시고 답변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 예. 그럼 통화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네, 팀장님. 감사합니다.”
그와의 긴 통화를 마치고, 나는 사무실에 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광주 메디컬로 오고 난 후 첫 스카우트 제의였다.
IBH 메디컬 제조사.
당연 우리나라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기업 회사다.
이쪽 업계에서 일하면서 그걸 모르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
그렇기에 연봉도 지금 광주 메디컬보다 높을 것은 당연하다.
복지 또한 이곳보다 좋을 터.
IBH 메디컬의 직원과 가끔 발주나 가납 일로 통화해 보면 한 달에 의무적으로 쉬는 날이 수두룩해 보였다.
그걸 한때는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 내가 IBH 메디컬에 가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IBH 메디컬이 현재 광주 메디컬보다 훨씬, 모든 면에서 뛰어난 것은 팩트다.
근무 조건 역시 말하자면 입 아플 정도로 좋은 것 또한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아직 이직에 대해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회사라는 곳은 돈을 벌기 위해 다니는 곳이다. 돈만을 본다면 당연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IBH 메디컬로 이직을 해야 하겠지.
하지만 나는 돈 만큼이나 더 중시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일에 대한 성취감.
게다가 광주 메디컬은 처음부터 나와 함께한 곳이다.
창립 멤버라는 의미가 꽤 큰 곳이지.
나는 장홍석 사장과 손지혁 차장, 그들과의 의리도 내 인생에 큰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것만으로도 내가 광주 메디컬에 남을 이유가 충분하다.
더불어 우리 회사의 영업 상대는 병원이지만, IBH 메디컬 등 제조사 회사의 영업 대상은 우리와 같은 메디컬 회사다.
메디컬 회사에 영업할 때는 사람의 심리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는다.
단지 금액적 씨름을 할 뿐. 게다가 큰 물건 하나를 팔고 나면 그 지역에 가서 물건에 대한 설명과 피드백 등을 하러 돌아다니는 업무를 할 것이다.
이런 일들은 내가 영업에서 추구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본사 팀장의 말처럼 며칠 고민은 해보겠지만,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리라 예상됐다.
* * *
다음 날, 오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병원 영업에 한창이던 그때.
휴대전화에서 또다시 인별그램의 알람이 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당연히 곧은 정형외과 정 원장의 아내에게서 온 메시지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메시지가 아닌, 팔로우 요청이었다.
내가 그녀의 메시지를 연속으로 무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팔로우 요청까지 보내는 그녀.
나는 애플리케이션을 바로 종료하고 하던 일에 열중했다.
내 방법이 먹히리라 생각하고, 염원하면서 말이다.
* * *
동시에 세 개의 큰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건물에는 커다랗게 ‘여수 예술 마루’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 유독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
그들 중 여자는 가방을 한 팔에 걸치고, 그쪽 손에 꽃다발을 들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손은 옆에 있는 남자의 손과 깍지를 꼭 낀 채였다.
이 둘은 곧은 정형외과의 정윤성 원장과 그의 아내였다.
“여보. 연극 진짜 재밌었다, 그렇지?”
꽃을 들고 있는 그녀는 옆에 있는 정 원장을 바라보며 해맑은 얼굴로 물었다.
“그러게. 오랜만에 이런 거 보니까 재밌네. 당신도 재밌었다니까, 다행이네.”
“그런데 오늘 무슨 날이야? 내 생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거야?”
그녀는 정 원장과 자신이 들고 있는 꽃다발을 번갈아 쳐다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정 원장은 그녀의 손을 양손으로 잡으며 답했다.
“왜긴. 우리 오랜만에 연애 시절처럼 분위기 좀 내고, 데이트해 보려고 한 거지. 그래서 당신이랑 오붓하게 시간 보내고 싶어서 일 끝나자마자 여수 넘어왔잖아.”
정 원장의 아내는 그의 말을 듣고 곧바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도 오랜만에 가지는 오붓한 데이트에 설레는 모양.
“안 그래도 나 이 연극 진짜 보고 싶었거든. 요즘 여수에서 이 연극 인기 많아서 표 구하기도 어려웠을 텐데……. 항상 바빠서 뭐 알아볼 틈도 없는 사람이 무슨 일이래?”
“하하. 그랬어? 당신이 보고 싶어 하던 거라니까 더 기분 좋네. 오랜만에 이렇게 있으니까, 진짜 우리 연애 초반 시절 생각난다. 그렇지?”
연극이 끝나고 다들 발길을 돌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 앞에 서서 서로를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응. 그때 우리 진짜 안 보면 죽을 것 같고, 잠시라도 떨어지면 큰일 나는 줄 알았는데……. 벌써 이렇게 결혼해서 몇 년이 지났네.”
그녀는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응시하는 정 원장.
정 원장은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여보.”
그의 부름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정 원장을 바라보았다.
“응?”
“내가 더 잘할게. 바쁘다는 핑계로, 광주에 떨어져 있다는 핑계로, 당신 외롭게 하지 않을게. 내가 더 노력할게.”
그리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손을 어루만졌다.
정 원장의 말에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동안 맺혔던 것이 많은 모양이다.
“왜… 울어. 미안해, 그동안. 내가 너무 당신한테 소홀했었나 봐. 나는 당신이 그저 오랜 결혼 생활에 마음이 식어 간다고만 생각했어. 내 잘못은 생각 못 했었어.”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해.”
“당신이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다……. 내가 잘못한 게 많은 것 같아.”
그렇게 그녀는 정 원장 앞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런 아내를 정 원장은 아무 말 없이 꽉 안아 주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예술 마루 앞에는 그 둘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진정이 됐는지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으며 정 원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리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오랜만에 그 와인바 갈까?”
“우리 연애 때 자주 가던 그 와인바?”
정 원장이 눈을 크게 뜨며 답하자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좋지!”
* * *
퇴근 후 집에 들어와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눕는 이 시간.
하루 중 가장 행복하고 상쾌한 시간이다.
나는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열었다.
시간은 벌써 10시를 향해 가고 있었고, 나는 SNS 애플리케이션을 클릭했다.
업데이트된 친구들의 소식을 아무 생각 없이 보며 스크롤을 내리던 그때, 갑자기 생각나는 한 가지.
나는 황급히 인별그램의 알림 창을 열었다.
…없었다.
정 원장의 아내가 오늘 오전 나에게 보냈던 팔로우 신청.
그 팔로우 신청이 취소되어 있었다.
시간도 딱 연극이 끝나고 몇 시간이 지난 지금.
정 원장에게 보냈던 연극 표, 그 작전이 잘 먹힌 모양.
나는 팔로우 신청이 사라진 인별그램 알림 창을 보며 뿌듯한 얼굴로 휴대전화 화면을 껐다.
오늘 밤, 행복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