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 연고주의 】
[광주 의대]
곧은 정형외과 정윤성 원장의 약력 중 내가 그나마 잡아볼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보던 중 내 눈에 들어오는 약력 하나.
전국에 의대 자체가 그렇게 많지 않고, 특히나 광주 호남권에 있는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의사라면 대부분은 비슷한 의대 출신이다. 그래서 의사들은 서로를 잘 알고 있다.
내가 정 원장에게 가서 공감대를 찾을 만한 것이라고는 광주 의대 단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광주 의대 의사들은 그저 거래처 담당 의사일 뿐이지, 내 사적인 지인은 아니었기에 내가 정 원장에게 알은척을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안녕하세요.”
곧은 정형외과 외래 테이블에 앉아 있는 간호사들.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온 간식을 그들에게 건네며 말했다.
“광주 메디컬의 민지훈 과장이라고 합니다. 바빠서 힘드실 텐데, 이거 드시면서 일하세요.”
“우와,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잠깐이라도 낯선 간호사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환심을 사려면 처음에는 간식만 한 것이 없다.
내 담당 병원이 아니라도 이렇게 돈을 쓰는 이유는 미래를 위한 투자이기 때문이다.
담당 병원이 되고 나면 의사만큼이나 간호사와의 유대관계가 중요하다. 그래서 미리 조금씩 그녀들에게 신경을 쓰는 것이지.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들은 내 말에 싱긋 웃으며 간식 상자를 열었다.
“선생님, 오셨어요?”
간식에 주의를 기울이던 간호사들은 그 앞으로 다가오는 한 선생님을 바라보며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 그녀들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간호사복을 입은 한 사람.
나이가 많아 보이진 않았지만, 이 병원의 수간호사가 분명했다.
걸음걸이, 표정에서 느껴지는 연륜. 그리고 내 앞에 있는 간호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반긴다는 것은 그들보다 윗사람이기 때문이다.
“어. 김 간호사는 아까 내가 말한 환자 봤어?”
“아… 지금 보러 가려고 했습니다.”
“아직도? 얼른 가서 봐.”
“네, 선생님.”
그녀는 수간호사의 한마디에 곧장 차트를 들고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수간호사는 그 외래 테이블 의자에 착석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광주 메디컬에서 온 민지훈 과장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수간호사를 향해 인사했고, 그녀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그리고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커피와 간식을 바라본 후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이거 과장님이 사다 주신 거예요?”
“네. 선생님들 피곤하실 텐데 커피랑 간식 좀 드시라고 가져왔습니다. 마카롱인데, 좋아하실는지 모르겠어요.”
“어머. 제가 마카롱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아시고…….”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마카롱 상자를 열어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맛이라며 하나를 골라 들었다.
“좋아하셔서 다행이네요. 앞으로 놀러 올 때 종종 사 오겠습니다.”
“그럼 저희야 감사하죠.”
수간호사는 마카롱을 한입 베어 물고,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일을 지시했다.
그렇게 간호사들은 수간호사가 지시한 일을 하러 떠났고, 그곳에 남은 사람은 우리 둘. 수간호사와 나뿐이었다.
나는 정 원장을 만나기 위해 진료실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고, 수간호사는 그런 나에게 걸어오며 입을 열었다.
“저… 과장님.”
“네, 수간호사 선생님!”
나는 그녀의 부름에 놀라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 원장님 만나러 오신 거죠?”
“네, 맞아요.”
“오늘 정 원장님 담당 진료 환자가 몇 안 계셔서 금방 만나실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정말요?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근데…….”
그녀는 주변을 살펴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데시벨을 한껏 낮춰 입을 열었다.
“아마 들어가셔도 금방 나오실 거예요.”
“예?”
“원장님께서 저희 병원에 다른 원장님들이랑은 조금 다르시더라고요. 메디컬 직원 만나서 영업 받으시는 시간이 10분을 넘지 않아요.”
그녀는 나에게 조언을 해주었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제 병원에 와서 정 원장을 만나 직접 겪었던 일이기에.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저 사실 어제도 왔었거든요.”
그녀는 내 말에 놀라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그럼 혹시 원장님이랑 원래 아는 사이세요?”
아마 내가 정 원장과 사적인 친분이 있다고 생각해 자신이 말실수했다고 생각하는 모양.
“아니요. 어제 생전 처음 뵀습니다.”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내게 입을 열었다.
“근데 어제 오셔서 10분도 못 만나셨다면서 또 오셨네요?”
“그럼요. 와서 10분이든 5분이든 봬야죠. 그래야 영업하죠. 제 일인데요. 하하.”
수간호사는 내 말에 내게 귓속말을 하듯 다가와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맛있는 것도 주셨으니까 팁 좀 드릴게요.”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원장님이 좀… 아시는 분들한테 그런 게 있으신 것 같더라고요.”
“학연, 지연, 혈연 뭐 그런 거요?”
내 말에 그녀는 손뼉을 부딪치며 외쳤다.
“네, 맞아요! 어제 새로 오신 거라서 저도 아직 원장님 파악 중이긴 한데요. 그게 좀 강하신 것 같더라고요. 들어가서 오래 있다가 나오는 메디컬 직원분들 보면 꼭 그런 이야기 나누고 나오시더라고요?”
“아… 감사합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고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럼요. 큰 도움이 됐습니다. 감사해요. 꼭 제가 원장님 마음에 들어서 수간호사 선생님 자주 뵀으면 좋겠네요.”
“그러게요. 파이팅 하세요, 과장님. 저는 그럼 이만.”
그녀는 내게 마지막으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일을 하기 위해 뒤돌아 갔다.
수간호사가 떠난 후 나는 진료실 앞 의자에 다시 돌아가 앉았다.
역시.
정 원장은 손 차장이 알려준 소문 그대로였다.
나는 오늘도 그와의 공통점을 찾지 못하면 이대로 10분 컷을 당하고 나와야 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재빨리 광주 의대 출신 중 내 지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려댔다.
어설프게 거래처 의사를 지인이랍시고 댔다간 오히려 우스운 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때 내 뇌리를 스치는 번쩍이는 생각.
광주 의대의 지인, 한선우.
한선우는 내 고등학교 동창이자, 현재 광주 세연 정형외과의 의사다.
몇 달 전, 나는 한선우의 어머니를 도와드렸던 적이 있었다. 그 일로 인해 한선우는 내가 하는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돕겠다며, 소위 말해 티켓 하나를 주겠다는 말을 했었다.
내가 그에게 진짜로 부탁을 하는 날이 올까, 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그와의 관계를 쓸 날이 오다니.
한선우와 정 원장은 나이 차이가 있어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기대를 걸어볼 것이라고는 한선우 한 명뿐이었기에, 정윤성 원장과 동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선우에게 연락해 보기로 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한쪽 귀퉁이로 걸어가 조용히 전화를 걸었다.
이어지는 신호음.
-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한선우와 정 원장이 아는 사이인지만 확인을 하면 되겠다 싶어 전화했지만, 바쁜지 전화를 받지 않는 그.
나는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보려다 그만두고는 문자를 남기기로 마음을 바꿨다.
문자함을 누르는 그때.
“과장님, 지금 들어가셔도 돼요.”
정 원장 진료실 앞 간호사가 나를 보며 소리쳤고, 나는 황급히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똑똑.
“안녕하십니까.”
나는 전날 왔었지만, 나를 기억 못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어제처럼, 처음 인사를 온 사람인 양 새로 소개를 했다.
“광주 메디컬 민지훈 과장이라고 합니다.”
“네.”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네’ 단 한마디였다.
어제와 같은 대답, 어제와 같은 표정.
나를 기억 못 할 거라 생각해 다시 소개했지만, 실제로 나를 처음 보는 듯 대하는 정 원장.
그는 앞에 서 있는 나를 보며 말했다.
“앉아요.”
“네, 감사합니다.”
나는 어제와 똑같이 그의 앞 의자에 자리했다.
“저…….”
나는 정 원장에게 말을 걸기 위해 입을 열었고, 그는 오늘도 마찬가지로 내 말을 잘라냈다.
“미안한데요. 제가 오늘 좀 바빠서, 카탈로그 준비해 오신 거 있으면 주고 가세요. 제가 확인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어제와 같은 반응.
어제와 같은 대화의 흐름.
나는 준비해 온 카탈로그를 꺼내 그에게 건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원장님, 저 어제도 왔었습니다.”
그는 내가 아닌 내 손에 들린 카탈로그를 보다가 내가 말을 하자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래요?”
전날에도 왔었다는 내 말에도 여전히 동요하지 않는 정 원장.
표정 변화는 물론 없었고, 심지어 영혼이 전부 빠진 듯한 대답이었다.
“네. 어제도 와서 카탈로그 드리고 갔었습니다.”
나는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해 쉴 틈 없이 대답했고,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몰랐네. 왜 이틀이나 왔어요? 내가 어차피 자료 보고 필요하면 연락할 텐데…….”
“그래도 또 찾아뵀습니다. 원장님께서 어제 자료 보셨을까 싶어서 다른 자료로 챙겨 왔습니다.”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료를 옆으로 옮겼다. 그리고 나는 그의 행동에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원장님, 혹시 광주 의대 졸업생 중에…….”
그가 나온 의과 대학을 이야기하자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세연 정형외과에 있는 한선우라고 혹시 아십니까?”
광주 의대 졸업생 중 내가 아는 의사는 수두룩했지만, 모두 거래처 원장이기에 내세울 것은 한선우가 유일했다.
한선우가 전화를 받지 않아, 정 원장과 아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을 해보지 못했으나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저 그 의대에 나도 아는 친구가 있다는 것, 그 공통점 하나를 찾아내 대화를 이어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 원장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시큰둥한 표정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음… 알아요. 근데 한선우는 왜요? 뭐 거래처 병원이에요?”
정 원장이 한선우를 안다는 사실에 나는 속으로 엄청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한선우 이야기를 꺼냈던 것인데, 어떻게 둘이 아는 사이지? 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아니요. 거래처 병원은 아니고, 선우가 제 친구거든요.”
정 원장은 내가 한선우와의 관계가 그저 거래처일 거라 생각했던 모양.
내가 친구라고 이야기를 하자 그의 눈빛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어? 친구? 무슨 친구예요?”
“제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내 말에 그는 놀란 얼굴로 내려놓았던 명함을 들어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면 여수분이세요?”
“네, 맞아요! 선우가 여수 사람인 거까지 아시네요?”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말에 한선우가 고등학교를 여수에서 나오는 것까지 아는 것으로 보아 둘의 관계는 그렇게 먼 사이가 아닌 듯 보였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한선우에게 괜스레 고마움을 느꼈다.
“예. 저도 집이 여수거든요.”
“정말요? 원장님도 여수분이셨구나. 신기하네요.”
“하하, 그러게요.”
“원장님은 그럼 여수에서 광주까지 왔다 갔다 하시는 거예요? 꽤 멀 텐데 어떻게 출퇴근하십니까?”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변했다.
“아니, 그건 아니고 와이프만 여수에 있어요. 나는 일 때문에 지금 광주에 따로 와있는 거고.”
“그러시구나. 아무튼 여기서 고향 분을 만나니까 신기하네요. 하핫.”
광주에서 여수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이기에 여수에서 광주로 이사 오는 사람도 꽤 많은 편이다.
그렇지만 이 교집합으로 내가 정 원장에게 친분을 보일 수 있다는 것에 기뻤다.
정 원장과의 대화는 이 이상으로 진전은 없었다. 하지만 현재, 내가 진료실에 들어온 지는 벌써 15분이 지나고 있었다.
그다음 단계로 한 계단 오르기 위해서는 내가 또 다른 주제를 가지고 와야겠지.
이것만으로도 나는 오늘 곧은 정형외과에 온 것이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 뒤로 카탈로그에 대한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다가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나는 진료실에서 나오자마자 휴대전화를 급하게 열어 확인했다.
진료실에서부터 휴대전화 진동이 몇 번 울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