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나는 한태준의 의미심장한 표정에 침을 한 번 꿀꺽 삼켜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말을 반복하듯 되물었다.
“얼마 전에 뭐?”
내 질문에 그는 어깨를 들었다 내려놓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에 이력서 넣었습니다.”
“벌써?”
그는 옅은 미소를 날리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다음 대답을 듣기 전이었지만, 그의 표정만 보아도 충분히 상황이 유추되었다.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태준에게 소주를 따라 부으며 말했다.
“괜찮아, 인마. 이제 막 퇴사한 건데 준비도 없이 어떻게 바로 척척 붙겠어.”
“그렇긴 한데, 막상 떨어지니까 마음이…….”
내 짧은 위로에 백태석은 눈치를 살피며 내게 말했다.
“저는 쉬고 있습니다!”
“그래?”
“네. 첫 사회생활이 짧았던 탓인지, 벌써 똥줄이 타기 시작했습니다. 얼른 저도 한태준 선배님처럼 이력서 넣어보려고요.”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두 명이 모두 빠른 시일 내에 일을 하고 싶은 것을 알게 되었고, 다음으로 궁금한 것을 묻기 위해서이다.
한태준과 백태석, 두 명 모두 아직 메디컬에 발을 담그고 싶은지를 말이다.
“너희 메디컬은?”
“예?”
“메디컬에서 다시 일은 안 하고 싶어?”
앞에 앉은 두 명 모두 내 질문에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이들이 입을 닫은 이유.
다시는 하기 싫다는 것인지, 혹은 하고 싶어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인지.
나는 암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태준과 백태석을 바라보며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들은 나를 따라 잔을 들어 부딪쳤다.
입 한가득 알코올이 넘실댔고, 나는 그 술을 한 번에 삼켜냈다.
크으.
그리고 잔을 테이블에 탁 내려놓으며 그들에게 재차 되물었다.
“응? 이제 다시는 메디컬에 발 안 붙일 생각이야?”
내 진지한 표정과 물음.
몇 개월 선배인 한태준이 먼저 천천히 붙은 입을 떼 내었다.
“메디컬하고 싶죠.”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한태준은 빈 술잔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붙였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메디컬 업계에서 더 일해 보고 싶습니다.”
그는 나보다 몇 배는 더 진지한 얼굴로 말을 했다.
옆에 앉은 백태석 역시 한태준의 말에 공감하듯 머리를 세차게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요. 첫 회사가 메디컬이어서 질릴 때까지는 해보고 싶어요.”
이제야 비로소 그들의 마음에 확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혹여나 이들이 지난번 술자리 이후로 마음이 바뀌었을까 걱정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 둘 다 아직 1년도 못 해봤잖아.”
“네, 맞아요. 뭔가 어정쩡하게 배우고 나와서 더 그런 것 같아요. 할 수 있는 거 뭐든 다 해봤다면 메디컬에 미련도 없을 텐데 말입니다.”
한태준과 백태석은 둘 다 사회 초년생이라 어중간한 나이와 경력이었다.
다른 회사에 이력서를 넣을 때, 경력란을 채우기도, 그렇다고 비우기도 모호한 것이지.
경력란에 WG 메디컬을 넣기에는 그 기간이 너무 짧았다.
뽑는 회사에서 볼 때, 이렇게 짧게 일을 하고 그만뒀다는 것을 보면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6개월도, 특히 백태석은 꼴랑 몇 개월도 채우지 않고 퇴사했다는 것이 끈기가 없어 보이게 된다.
자신들의 회사에서 뽑았다고 해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맞지 않으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경력란을 비우자니, 대학교 졸업 후 몇 개월의 기간이 비어 있게 된다.
어중간하게 채우고 나온 WG 메디컬, 그들의 첫 회사.
메디컬 업계를 배웠다 보니 다른 일로 넘어가기도 아쉽고 어려운 모양이다.
한태준은 고개를 들어 우리 셋의 빈 잔을 채웠다.
나는 그가 따라주는 잔을 받으며 이야기했다.
“그럼 메디컬에서 계속 일해 봐. 다른 회사에 이력서 넣지 말고.”
이 두 명의 생각을 알게 되었지만, 나는 곧바로 우리 회사에 다녀보겠냐는 이야기를 내뱉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들의 방향성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광주 메디컬의 직원, 장홍석 사장과 손지혁 차장 그리고 나.
우리 셋 모두 WG 메디컬에 있을 당시 한태준과 백태석의 선임이었다.
세 명이 퇴사를 한 뒤, 직속 선임이 아니었기에 한태준과 백태석이 나를 편하게 대했을 수도 있다.
내 밑에 아직 있었다면 그들이 나를 여전히 잘 따랐을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함께 같은 회사에 다녔던 선배인 내가 먼저 우리 회사에 들어오겠느냐 제안을 하게 된다면, 이들이 강압적으로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이 어떤 메디컬 회사에 가고 싶은 것인지를 먼저 듣고 싶었다.
내가 우리 회사에 오라는 제안을 하는 것은 이들에게 선배로서 손을 내밀어 주고 싶었던 것이지, 직원이 급해서 남아 있는 한태준과 백태석을 데려오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말에 한태준은 소주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이력서 넣었다는 곳 말입니다. 전부 메디컬 회사였습니다.”
“…….”
그의 말이 흐르고 시끄러운 이곳에서 우리 테이블만큼은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짧은 정적을 깨고, 한태준이 재차 입을 열었다.
“몇 군데나 떨어졌어요. 정말 단 한 군데도 연락이 안 오더라고요.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떨어지는 이유는 WG 메디컬 출신이라는 것밖에 없는 것 같고요.”
그는 홀로 소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안주를 입에 넣을 틈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제가 경력으로도 넣어보고, 신입으로도 넣어봤어요.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한 군데도 안 붙을 수가 있냐는 말입니다. 정말 이유는 단 하나죠.”
한태준이 스펙이 딸리냐?
전혀 아니다.
메디컬에서 3개월의 수습까지 마친 한태준은 새로운 메디컬 회사에 가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신입으로 들어간다면 3개월의 수습 기간을 홀로 쌓아왔기에 훨씬 배우기가 수월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이유는 WG 메디컬 단 하나뿐일 것이다.
WG 메디컬에서 리베이트에 대리 수술까지.
온갖 불법적인 일을 도맡아 했고, 뉴스까지 나온 곳이기에 한태준과 백태석 역시 좋은 시선으로 보지 못하는 게 현실인 것이지.
“광주 쪽으로만 넣었니?”
나는 한태준에게 물었고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예. 집이 광주라 다른 지역은 보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메디컬에서 계속 일하고 싶은데, WG 메디컬… 불법이 많았던 곳이라 그런지 다른 회사에서는 저도 한패였다고 생각하나 봐요.”
“진짜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요.”
백태석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한태준은 한숨을 연속으로 내쉬며 답했다.
“병원에서는 저희가 WG 메디컬에 있던 애들인지, 아니면 신입인지도 모를 텐데……. 메디컬 회사들에서는 모르는 곳이 없더라고요.”
한태준과 백태석은 아무리 짧게 일했다지만, 광주 대부분의 메디컬 회사가 이들이 WG 메디컬 출신인 것을 아는 이유.
바로 인맥이다.
특히나 이 좁은 광주 바닥.
그리고 더더욱 좁은 메디컬 바닥.
이곳에서는 이력서를 받을 때, 이 직원이 메디컬에 있었다면 순식간에 직전 회사가 어디인지 알아보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이다.
그렇기에 타 지역으로 가지 않는 한, WG 메디컬의 꼬리표를 떼기가 힘든 것이지.
지금 우리 광주 메디컬은 이미 회사를 설립했기에, 전혀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회사 설립이 아닌, 취업을 해야 하는 것이기에 전혀 다른 상황인 것.
나는 이제야 내 생각에도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에게 내가 내미는 손이 부담스럽지 않을 것임을.
오히려 고마워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미소를 지은 채, 한태준과 백태석을 번갈아 쳐다보며 제안을 했다.
“메디컬 회사 다녀볼래?”
그들은 내 말에 동시에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예? 아시는 곳 있으신 겁니까?”
“당연하죠! 대리님이 말씀 잘 해주신다면 저희 붙을 수 있는 겁니까? 당장 이력서 쓰러 가겠습니다! 광주에 있는 곳인 거죠?”
나는 그들의 흥분한 말투를 듣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우리 광주 메디컬. 너희가 직전 회사에서 상사로 있던 사람들이 그대로 또 상사가 될 텐데, 괜찮겠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것 같이 커졌던 그들의 눈.
내 말에 눈을 더 크게 떠내며,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 내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나를 향해 허리를 폴더 접듯이 접으며 외쳤다.
“대리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민 대리님!”
시끄럽던 술집.
그들의 가장 큰 데시벨에 술집의 온 시선은 우리에게로 쏟아졌다.
나는 그 시선에 한태준과 백태석을 일으키며 말했다.
“야, 얼른 일어나. 내가 뭐 대단한 사람 된 것 같잖아. 민망해, 빨리 앉아!”
한태준은 허리를 들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단하신 것 맞죠! 민 대리님 진짜 감사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소주를 부어내며 말했다.
“그래. 같이 열심히 일해 보자.”
“예! 역시 민 대리님은 제 회사 생활에 아니, 제 인생의 롤 모델이십니다.”
이에 질세라 백태석 또한 입을 열었다.
“민 대리님, 저한테 일 알려주실 때부터 존경했습니다! 정말 세상에 이런 선배님은 또 없을 겁니다. 하하.”
“됐어. 얼른 술이나 마셔. 그리고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토요일에 장 사장님께 연락드려 봐, 둘 다.”
짠.
우리는 소주가 넘치도록 세차게 잔을 부딪쳤다.
* * *
월요일 아침.
금요일에 넘치게 마셨던 술로 이틀간 길고 달콤한 휴식을 만끽했다.
덕분에 매주 맞이하는 월요일 중 오늘은 특히 더 상쾌했다.
그랬기에 평소보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한 사무실.
직장인에게 10분이나 일찍 출근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퇴근 시간을 10분 넘길 때와는 전혀 다른 시간 감각이지.
모든 직장인이 공감할 테지만, 아침에 맞이하는 1분은 평소 느끼는 1분과는 매우 다르다.
나는 무려 10분을 일찍 나온 나에게 스스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느끼며 사무실 문을 세차게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우렁찬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일찍 나온 탓에 사무실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사에 놀란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고 2차로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뭐야, 너네?”
사무실에는 한태준과 백태석이 나란히 서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가 문을 열 때 하고 있던 행동.
바로 바닥이 광이 나도록 청소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희요? 청소하고, 그리고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왜, 뭐야?”
“오늘부터 광주 메디컬의 가족이 된 한태준입니다.”
“저도 오늘부터 출근하게 된 백태석입니다.”
한태준은 백태석의 인사가 끝나자 웃으며 말을 붙였다.
“첫날인데, 일찍 나와서 청소도 하고 회사 익히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장 사장은 나와 손 차장이 힘들까 봐 걱정됐던 것인지 이들을 바로 출근시킨 모양.
이야기도 나누고, 면접도 다시 보고 결정을 할 줄 알았지만, 곧바로 결정했던 것 같다.
해맑은 표정의 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덩달아 웃음을 지었다.
“자, 다들 익숙한 얼굴이라 새로움이 너무 없지?”
9시가 넘은 시간, 모두 회의실에 모여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네요. 태준이, 태석이, 잘 지내보자.”
손 차장은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어 앉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옙.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식구도 늘었으니 너네 굶기지 않으려면 내가 열심히 더 뛰어야겠다. 하하. 광주 메디컬이 광주에서 알아주는 회사가 되도록 더 열심히 해보자!”
“네!”
장 사장의 마지막 멘트를 끝으로 회의는 종료되었다.
회의실을 나오자마자 울리는 전화.
모던 정형외과 박승호 원장의 연락이었다.
나는 황급히 전화를 받았고, 그는 시간이 되면 빨리 병원으로 와달라는 말을 한 뒤 통화를 종료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재빨리 휴대전화를 열어, 모던 정형외과 사이트에 접속했다.
이유는 오늘이 박승호 원장의 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휴진 일은 말 그대로 진료가 없는 날.
회사원으로 치면 일을 안 하는 날을 말한다.
그런 휴일에 대체 왜 박승호 원장이 병원에 나와 있으며, 병원에서 나를 급하게 찾는 거지?
나는 서둘러 가방과 짐을 챙겨 사무실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