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이름 세 글자를 보는 순간.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홍찬민. 그는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싸한 느낌이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맴도는 기분.
그 이유는 바로 홍 대리였다.
홍씨 성을 가진 것이 특이할뿐더러, 그에게 형제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홍 대리와 관련이 되어 있을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당장에라도 인사 담당을 겸하고 있는 박수진 주임에게 다가가 홍 대리의 인적 사항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의 형제 이름이 홍찬민이 맞는지, 아니라면 등본상에 등재되어 있는 이름은 맞는지 말이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회계부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박 주임 앞에 다다랐지만 나는 이내 발길을 멈춰 세웠다.
좋은 일이든, 그렇지 못한 일이든 직원의 인적 사항을 함부로 본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리님, 무슨 일 있으세요?”
멈춰 서 있는 나에게 초롱초롱한 눈을 뜨고 묻는 박 주임.
“아니요. 잠깐 일어나서 걷다가 왔어요.”
“네? 서성이다가 회계부,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그녀는 내가 사무실 내에서 정처 없이 걷다가 자신의 앞으로 무의식으로 걸어 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 그게 아니라…….”
“그러실 수도 있죠.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그녀는 얼굴이 발그레해져 내 눈과 자신의 책상을 번갈아 보며 이야기했다.
나는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황급히 뒤를 돌았다.
박 주임 자리에서 내 자리로 향하기 위해 회사 출입문 쪽을 지나갈 때, 회사 입구 밖에서 사담을 나누고 있는 듯한 직원들.
그 자리에는 한태준과 홍 대리가 있었다.
출입문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문이 닫혀 있어도 누가 밖에 있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맞아. 이번에 본 차가 마력이 장난이 아니라니까?”
“와. 대리님 그럼 그 차로 바꾸시려고요? 가격 진짜 비싸잖아요.”
“뭐. 돈이라는 게 노력한 만큼 들어오는 거 아니겠어?”
홍 대리는 한태준에게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듯 이야기를 펼치고 있었다.
나는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홍 대리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을 뿐.
나는 문을 열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 민 대리님.”
출입문이 열리자 한태준은 곧장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나누고 있으세요?”
나는 홍 대리와 한태준 곁으로 걸어가며 그들에게 물었다.
“홍 대리님 차 바꾸시려고 한 대요!”
홍 대리가 입을 열기도 전, 한태준은 호들갑을 떨며 그 대신 대답했다.
“갑자기 차는 왜요? 홍 대리님 지금 차도 오래 안 되지 않았어요?”
나는 홍 대리를 쳐다보며 그에게 물었다.
“어. 근데 뭐 차라는 게 그냥 사치품이잖아. 갖고 싶으면 사야지. 하하.”
“능력 좋으시네요, 대리님. 무슨 차로 바꾸시려고요?”
나는 그가 스포츠카 매장에 들렀던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며 그에게 물었다.
“뭐. 내 능력 되는 정도껏?”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회사 직장인에게 스포츠카는 이미 능력 밖일 텐데…….
홍 대리에게 떠보려고 온 것은 바로 ‘홍찬민’의 정체를 밝히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그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까, 라는 생각에 짱구를 굴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에게 형제가 있는지, 형이든 동생이든 이름이 뭔지를 어떻게 물어봐야 하지?
홍 대리와 한태준을 번갈아 쳐다보며 고민을 하고 있는 그때, 한태준이 입을 열었다.
“홍 대리님은 어디 차로 보세요? 저희 형도 이번에 차 바꾸는데 이번 달에 프로모션 많이 들어간다고 하더라고요.”
‘저거다! 돌려서 캐낼 방법.’
나는 한태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장 홍 대리가 아닌, 한태준에게 물었다.
“맞네. 태준 씨 형 있다고 했었지?”
내 질문에 앞에 나누던 자동차 이야기는 흩어져버렸다.
“네. 제가 집에서 막내예요. 막내 같아 보이지 않나요? 하하.”
그는 내 물음에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사랑 많이 받고 자란 막내 같아 보여. 하핫. 근데 태준…이면 형 이름은 뭐야? 돌림자를 쓰나?”
“저희 집은 돌림자 안 썼어요. 아버지 대에서 돌림자 끝내고, 저랑 형은 이름이 완전 달라요.”
한태준의 대답에 홍 대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요즘은 돌림자도 안 쓰는구나?”
그의 말에 한태준이 홍 대리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네, 저희는요. 대리님도 형 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이름 돌림자 사용하세요?”
“그럼. 우리 집은 돌림자 쓰지. 나는 내 애 낳아서도 이름 지을 때 쓸 건데.”
나는 홍 대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에게 재빨리 물었다.
“홍 대리님 형분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제발… 제발 홍찬민이어라!’
나는 내 염원을 담아 그의 눈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홍찬민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그 순간, 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선아 정형외과 간납 업체의 똘똘 뭉친 매듭 같은 의문점.
그 꽉 묶인 매듭이 한순간에 해결될 수 있는 대답.
나는 눈살에 힘을 주고 그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럼 대리님이 홍찬성 대리님이시니까. ‘성’ 자 돌림이신가요?”
그의 입이 아닌 한태준에게서 나오는 소리.
나는 한태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여전히 그의 입술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아니. ‘찬’ 자 돌림이야. 우리 형은 홍찬…….”
‘제발… 민. 민!’
“기!”
“네?”
나는 시선을 그의 눈으로 올려 그에게 재차 물었다.
“홍찬기! 왜 민 대리 우리 형 알아?”
“아…니요.”
뭐지.
왜 홍찬민이 아니지?
분명 뭐가 있을 것 같았는데.
내가 미간에 힘을 준 채 생각에 잠기려고 하려는 그때.
다시 한번 홍 대리의 입이 열렸다.
“동생은 홍찬민. 우리 집은 ‘찬’ 자 돌림이야.”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홍 대리와 엮였던 게 맞았다는 생각에 실마리를 내 손으로 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매듭을 풀어 썩은 줄을 잘라내야 한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내가 원하는 이름을 들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될 수는 없었다. 세상에 홍찬민이 그의 동생 한 명 뿐은 아니었기에.
나 혼자 느끼고 있는 이 의심이, 팩트라는 것을 밝혀내야 했다.
이 모든 것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하나씩 찾아 나서야 한다.
지금 홍 대리가 말하는 자신의 동생, 홍찬민. 그 홍찬민과 선아 정형외과 간납 업체의 대표가 동일인인가, 그리고 선아 정형외과의 총무과장과 홍 대리는 어떤 관계인가.
이 두 가지를 먼저 알아내야 했기에 나는 서둘러 홍 대리와 한태준의 곁에서 멀어졌다.
그들이 대화를 이어가고, 나는 휴대전화를 보며 업무가 있다는 듯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장 박 주임에게로 향했다.
“주임님.”
그녀는 내 부름에 놀라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리님. 오늘 왜 이렇게 저한테 자주 오세요?”
귀찮은 듯한 말투가 전혀 아니었다. 내게 묻는 그녀의 입꼬리는 씰룩이며 올라가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내게 재차 다른 질문을 던졌다.
“선아 정형외과요. 거래처 원장 들어가야 하죠?”
업무에 관한 이야기에 꽤 실망한 듯한 박 주임의 표정.
“네, 들어가야죠.”
내가 사담을 나누러 왔다고 생각한 모양.
나는 그런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저 선아 정형외과 가려고 하는데, 거래처 원장 좀 뽑아 주실 수 있으실까요, 주임님?”
“드릴 수는 있는데, 아직 이번 달이 며칠 남아서 굳이 오늘 안 가셔도 돼요.”
병원에 들어가는 거래처 원장.
매달 말일이 다가오면 직원들이 바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거래처 원장 때문이다.
한 달 동안 병원에서 발주가 들어온 물건, 그 물건에 대한 거래명세서들을 정리한 파일 등, 물건과 거래명세서가 매번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것은 수술실이나 공급실로 들어가기 때문에 매달 말일에 총무과에 거래처 원장 한 달 치를 들고 가 확인을 하는 것이다.
세금 계산서 발행이 마무리되어 버리기 전, 재차 확인하는 것이지.
그래서 매달 마지막 주에는 거래처 원장을 출력해 병원 총무과에 다니며 확인을 받아 서명을 받는 것.
그 일로 영업 직원들은 마지막 주에 바쁜 한 주를 보내고는 한다.
아직 병원에 거래처 원장을 들고 갈 시기라고 하기에는 이르지만, 선아 정형외과의 총무과장이 누구인지 확인을 해야 했기에 다른 직원이 먼저 나서기 전에 미리 출발해야 한다.
“제가 오늘 선아 정형외과 근처에 들릴 일이 있어서요. 미리 다녀오려고 하는데, 지금 바로 서류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는 하고 있던 서류를 옆으로 밀어내며 나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바로 확인해서 출력해 드릴게요.”
그녀는 내 눈을 보며 눈웃음을 짓고는 바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 * *
거래처 원장을 들고 사무실을 나와 선아 정형외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든 생각은 단 하나.
선아 정형외과 총무과장이 홍 대리와 무슨 사이일까? 라는 생각뿐이었다.
그와 어떤 관계이기에 이렇게 오래된 병원이 갑자기 3개월 전 간납 업체를 받았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스스로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며 병원에 이르렀다.
주차를 한 뒤, 병원 앞 카페에 먼저 들렀다. 선아 정형외과의 총무과는 처음 방문하는 것이었기에 커피를 사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수술실처럼 왔다 갔다 몸이 바삐 움직이는 곳이 아닌, 책상에 앉아 근무를 하는 곳이기에 총무과에 방문할 때에는, 특히 처음 가는 곳에는 더더욱 커피나 간식을 사가는 편이다.
이것도 영업 노하우 중 하나이다. 처음 방문을 할 때, 확실히 무언가를 사서 들고 가는 게 경계를 낮추는 데 꽤 효과적이다.
병원으로 들어가 7층에 위치한 총무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엘리베이터에는 병원복을 입은 환자, 휠체어를 타고 있는 환자. 그리고 차트를 들고 있는 간호사, 보호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검정 슬랙스에 흰 셔츠를 입은 남자.
엘리베이터 문 쪽에 서 있었기에 앞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살짝살짝 보이는 옆모습이 굉장히 낯이 익었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지만, 확실히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인물은 아니었다.
수술실, 입원실 층을 오르며 하나둘씩 내리는 사람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는 그 남자와 나, 단둘만이 남았다.
보호자로 왔다고 생각한 그는 입원실 층에서도, 진료실 층에서도 내리지 않았다.
그럼 나와 같이 총무과, 또는 심사과가 있는 7층으로 간다는 이야기인데…….
그를 보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 곁눈질로 그를 살폈다.
이제야 보이는 그의 목에 걸린 사원증.
사원증 줄에는 선아 정형외과의 로고가 박혀 있는 거로 보아 그는 이 병원의 직원이었다.
- 7층. 문이 열립니다.
먼저 나가는 그를 따라 나 역시 엘리베이터에서 발을 뗐다.
그는 앞에 있는 심사과를 지나쳐 총무과로 걸어갔고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붙어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문 앞에 서서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뒤를 도는 탓에 나는 급정거를 하듯 주춤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혹시 총무과 오셨을까요?”
눈썹을 들썩이며 여유로운 말투로 내게 묻는 그.
“네. 총무과장님 좀 뵈러 왔습니다.”
내 말에 그는 그제야 굳은 표정을 풀어내며 입을 열었다.
“저요? 어디서 오셨을까요?”
“아! 총무과장님이세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WG 메디컬 민지훈 대리라고 합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총무과 문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넵.”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라는 손짓을 보였다.
총무과는 5명의 직원 책상이 차례로 놓여 있었고, 그 끝에 놓인 가장 큰 책상 하나.
한눈에 보아도 총무과장의 책상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책상 위에 놓인 총무과장 명패.
나는 미간에 힘을 준 채 그 명패를 바라보았다.
그 명패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이름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벙찐 얼굴로 명패만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