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해결사 】
“민 대리. 생각해 보고 이야기해 줘.”
대표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면서 말했다.
“네.”
“한태준이나 백태석 중에서 한 명 데리고 다니면 되겠네.”
끄덕이며 대답을 하는 나에게 장홍석 이사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태석 씨는 이미 홍 대리님 밑에서 일 배우고 있으니까…….”
내 말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대표는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아니야. 신입 들어왔을 때 일 가르치려고 홍 대리 붙여뒀던 거니까, 민 대리 편한 직원으로 데리고 다녀도 상관없어.”
“그래. 우리 회사에서 제일 잘나가는 민 대리가 후임으로 택하겠다는데, 신입 둘 중에 누가 마다하겠어, 다들 좋아라 할 거야.”
장 이사는 대표의 말에 덧붙여 말했다.
“하하, 이사님 부끄럽습니다.”
대표는 대화를 주고받는 장 이사와 나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튼 한번 생각해 봐봐.”
한태준과 백태석.
둘 중 누구를 후임으로 데리고 다녀야 하는지 고민스러웠다.
한태준은 백태석보다 입사한 지가 몇 개월이 더 된 직원이다. 눈치가 빠르고 직원들에게 싹싹한 타입. 그래서 늘 예쁨을 받고는 한다.
원체 성격이 그렇다 보니, 직원들뿐 아니라 당연히 병원에 갔을 때에도 써전들과 더불어 간호사들에게도 눈에 띄고 기억에 남는 직원이다. 그래서 영업하기에는 최적화된 인물이다.
하지만 늘 밝은 성격 탓인지 여기저기서 찾는 인물 1순위. 늘 바쁘고 선임들의 끊임없는 부탁을 항상 들어주고 있다.
게다가 아무 의심 없이 모든 사람을 잘 믿는 게 화를 부르기도 한다. 이번에 이상일 차장 사건처럼.
백태석은 이제 곧 수습이 끝나가는 정말 생신입 직원이다. 그래서 아직 자신의 주관이 없고, 가르치는 대로 흡수하는 스펀지 같은 스타일. 또 열정이 넘치는 시기에 있는 직원. 그에 반해 눈치가 조금 모자란 게 흠인 인물이다.
각자 장단점이 분명하기에 누구 하나 딱 고르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
“응.”
“우선 아직은 괜찮으니, 혼자서 해보겠습니다.”
“밑에 직원 없이 상일이 놈이 하던 병원까지 관리하기 너무 힘들 것 같은데.”
대표는 내 말에 쓰읍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을 이었다.
“민 대리. 혼자 너무 고생할 필요는 없어.”
옆에 있던 장 이사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대답했다.
“빨리 달리면 지치기 마련이야. 천천히 요령껏 오래 치고 나가야 해. 명심해.”
대표와 장 이사의 진심 어린 조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하는 말이 무슨 뜻으로 하는 이야기인지는 알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겪어보지 않았기에.
그리고 자신이 있었다. 새로 영업을 해야 할 병원들이 아닌, 이미 거래 중인 병원은 관리만 잘 해주면 문제가 없다는 내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특히나 이 기회에 내 역량을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차장이라는 직책을 달고 맡고 있던 일을 대리인 내가 해낸다는 것. 그것만큼 확실하게 내 능력을 표출해 보일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혼자 해보다가 벅차거나 직원이 더 필요해지면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표는 나의 당찬 한마디에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였다.
* * *
8시 40분.
“좋은 아침입니다.”
출근을 하자마자 문 앞에 서서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손지혁 차장 옆, 한쪽에 마련된 텅 빈 책상.
이상일 차장의 자리였다.
그 자리를 제외한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와 제자리를 되찾은 것 같았다.
이상일 차장이 WG 메디컬로 들어오기 이전으로.
단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WG 메디컬에 늘어난 거래처와 나에게 주어진 담당 병원의 개수. 그리고 직원들의 마음속에 알게 모르게 자리 잡아버린 서로에 대한 의심 정도.
나를 제외한 다른 직원 중에서는 이 차장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존재했었다. 그렇다 보니 이번 일로 인해 서로에 대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불신이라는 씨앗이 심어져 버렸다.
이 외에 가장 큰 것은 차장직의 공석.
물론 이 차장이 오기 전에는 손지혁 차장 단 한 명만이 차장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막상 이사직과 부장직 밑에 있는 직책이 한 명 사라지다 보니 불편함이 이미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높은 직책의 후임이 한 명 빠지게 된 영향이 큰 모양.
회사의 매출도 오르고,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차장직 이상의 경력직을 충원할 계획이라는 이야기도 내부에서는 돌기 시작했다.
* * *
사무실에서 이상일 차장의 담당이던 병원을 돌아보기 위해 나와 차로 향했다.
이 차장에서 나로 담당이 바뀌게 된 것과 상황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빠듯했다.
맡게 된 거래처 중 가장 큰 병원인 모던 정형외과로 서둘러 출발을 했다.
모던 정형외과.
광주에서 어깨 인공 관절 수술로 가장 유명한 병원이다. 광주뿐만이 아니라 전라도 전체를 통틀어 입에 오르내리는 병원.
그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 호남권에는 야구단 구장이 광주에 자리 잡고 있다. 야구 선수들은 모든 관절과 뼈가 다치기도 하지만 특히나 어깨로 인해 병원에 오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그 구단의 선수 중 어깨 부상이나 관리를 받으러 오는 병원은 단 한 곳. 바로 모던 정형외과이다.
선수들이 호남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기도 하는데, 병원은 항상 모던 정형외과로 오기 때문에 입소문을 타면서 전국적으로도 유명해진 병원이다.
서울에 있는 야구 선수들도 무려 광주까지 예약하고 진료를 받으러 내려온다고 들었다. 그렇다 보니 병원은 근 몇 년 사이 리모델링을 두 번이나 했고, 건물 역시 모던 정형외과의 사옥이다.
그만큼 병원이 크고 유명하다 보니, 메디컬 업체를 바꾸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돈을 잘 버는 병원이라면 온 메디컬 회사가 줄을 서서 제품과 단가 경쟁을 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이유는 이미 입소문이 전국적으로 난 병원이라 소개를 통해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들이 많다. 그래서 그 환자가 받았던 수술, 시술을 동일한 것으로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제품을 쉽게 바꿀 수가 없게 되는 거지.
또 환자들은 자신의 몸을 늘 케어하기 때문에 거의 반 의사라고 해도 무관할 정도이다. 그런데 수술 재료나 소모품이 바뀌어 버린다면 환자들은 기존과 다른 방식에 병원을 바꾸기도 한다.
이렇기에 오히려 크고 유명한 병원일수록 기존에 사용하던 제품만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큰 병원이 복 메디컬에서 이상일 차장이 담당하고 있던 병원이다.
모든 원장을 담당하는 것은 아니고, 단 한 명의 원장만 영업에 성공해 납품하고 있었다. 병원 자체의 매출이 워낙 크다 보니, 써전 한 명에게만 물건을 납품해도 금액은 상당한 편이다.
병원 주차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후 창문에 얼굴과 몸이 비쳐 보이게 섰다.
창문에 반사되는 모습을 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후에는 허리를 숙여 얼굴을 창문 가까이에 대고 미소를 장착했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 모던 정형외과로 향했다.
정문에 가까워질수록 보이는 하얀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
멀리 있는 것을 보기 위해 눈에 힘을 주고 미간을 찌푸려보았다. 보이는 것은 1인 시위를 하는 사람과 그 사람이 들고 있는 커다란 피켓. 그 피켓에는 프린트한 것이 아닌 자필로 빼곡하게 적은 삐뚤삐뚤한 글씨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지난달 제 동생은 모던 정형외과 안국환 의사에게 어깨 인공 관절 수술을 받았습니다.
…
진정한 사과를 받고 싶습니다.]
나는 입구에 들어가다 말고 멈춰 서서 피켓의 내용을 한참이고 읽어 보고 있었다.
내 옆으로 지나가는 일행무리가 자기들끼리 입을 열어 이야기했다.
“뭐라고 써 있는 거야?”
“몰라. 뭐 사과를 받고 싶다는 건가, 돈을 달라는 건가.”
이 외에도 눈길조차 흘리지 않고 병원으로 들어가는 사람, 나와 같이 시위하는 사람 앞에 서서 내용을 한참이고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 등 매우 다른 반응들이었다.
피켓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어깨 수술이 잘못되어 팔까지 사용을 못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모든 책임은 모던 정형외과에 있고, 사과와 보상을 요구한다는 내용.
내용을 읽으면서 아주 잠깐 서 있었지만,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시위하는 사람 앞에 와서 촬영한다든지, 기자가 쫙 깔려 있다든지는 하지 않았다.
현실에서는 정말 일부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무관심에 가까웠다. 대부분이 본체만체하며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들어가고 있었다.
나 역시도 내용을 읽은 후 서둘러 병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료실 층으로 올라가 신동욱 원장실을 찾아다녔다.
저 멀리 보이는 ‘신동욱 원장 진료실’ 팻말을 확인 후 다가가기 시작했다.
걸어가는 중에 보이는 바로 옆방의 팻말.
‘안국환 원장 진료실’. 낯익은 이름에 발걸음을 멈춰 섰다.
안국환……?
제자리에 멈춰 서 허공을 보며 눈을 굴리다가 떠오르는 생각에 손가락을 튕겼다.
1층 정문에서 보았던 1인 시위를 하는 사람 피켓 속에 등장하는 인물.
바로 그 원장이었다.
진료실 문이 열리고 나는 화들짝 놀라 급히 신동욱 원장 진료실로 향했다.
똑똑.
“안녕하십니까.”
“네. 어디서 오셨을까요?”
“저는 WG 메디컬 민지훈 대리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 WG 메디컬이요? 이 차장님 그만두시고 담당하시는 분 맞으시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환한 미소로 나를 반기며 악수를 요청했다.
서둘러 신 원장 쪽으로 다가가 그가 뻗어 낸 손에 내 손을 가져다 댔다.
“여기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 명함을 건넨 후 자리에 앉았다.
“원장님, 이번에 이상일 차장이 퇴사하게 돼서, 담당이 바뀌게 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는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의사 생활 오래 했더니, 담당자들 바뀌는 건 어쩔 수 없더라고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작스럽게 바뀌게 됐지만, 모자란 부분 못 느끼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미간에 힘을 주고 내 명함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민…지훈 대리님.”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대리님은 나이가 기존에 오시는 직원분들보다 젊으신 편이니까 이번에는 담당자가 바뀔 일은 없겠네요. 이직을 하시는 게 아니라면요.”
“하하. 원장님 번거롭지 않으시도록 제가 오랫동안 담당자 안 바뀌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래요.”
“그리고 원장님 말씀 편하게 해주십시오. 앞으로도 자주 뵈러 오겠습니다.”
“그럴…까, 그럼?”
“당연히 그러셔도 되죠. 하하. 제품 사용하시는 데 불편하시거나 납품 관련해서 개선해야 할 부분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네. 그리고 어깨 인공 관절 끝나고 쓰는 제품 중에…….”
제품에 대한 이야기로 30여 분 대화를 주고받으며 어색함이 풀리고, 자연스레 나를 대하기 시작한 신 원장.
제품 설명이 끝난 후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민 대리. 혹시 정문에서 뭐 못 봤는가?”
“시위…하는 거 말씀하시는 거 맞습니까?”
신 원장이 물어보는 말에 맞는 대답을 했는지, 그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직도 앞에 있네.”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일 때문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는 고개를 얕게 끄덕이더니 모니터를 내 쪽으로 향해 돌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니터의 사진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