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나 또한 이쪽 업계 생활이 3년이 넘었다. 그렇기에 오며 가며 만났던 메디컬 회사들에서 연락이 종종 오고는 한다.
일종의 스카우트 제의지.
스카우트를 받아서 회사를 옮긴다면 급여 자체는 당연히 오를 것이다. 급여는 당연하고, 그뿐만 아니라 복지며 혜택 자체가 지금보다는 당연히 나아질 터.
하지만 스카우트에 응하지 않은 이유는 굳이 내가 WG 메디컬을 나가야 할, 이직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는 아직 이직 생각은 없습니다.”
나의 단호한 대답에 이상일 차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바꿔 물었다.
“조건이 좋아도?”
“조건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제가 이직해야 하는 이유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기를 한 점 집었다.
“근데 민 대리, 명의 병원은 물건 더 납품하기 시작한 거야?”
그는 술병을 들고 내게 술을 따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네.”
“명의 병원에 다른 원장님들은?”
“근데 이 차장님 명의 병원에 관심이 꽤 많으신가 보네요.”
“응?”
“아니, 지난번에도 저한테 명의 병원에 대해서 물어보시길래요.”
“명의 병원이 뚫기가 워낙 힘드니까.”
“맞아요. 민 대리님 진짜 대단하신 것 같아요.”
옆에서 한태준이 고기를 먹다 말고 엄지를 들어 보였다.
“명의 병원처럼 뚫기 힘든 병원이 한 번 뚫리기 시작하면 줄줄이지. 앞으로 잘해 보면 메인 병원으로 자리 잡지 않겠어?”
“네. 열심히 해봐야죠.”
“명의 병원 자체가 큰 병원이잖아.”
“그렇죠.”
“지금은 원장님 두 분만 WG 메디컬이랑 일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물건도 늘리고, 원장님들도 더 많이 포섭해야겠지.”
“그래야죠.”
“점점 더 커지면 혼자 감당하기가 힘들 거야. 한 명이 더 붙어야 할 것 같은데…….”
“네?”
“그래서 말인데, 내 생각에는 나랑 같이 명의 병원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어이가 없었다. 내가 열심히 뚫어 둔 명의 병원에 갑자기 다리를 걸치겠다니. 심지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너무 당연스레 말하는 이 차장의 태도에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니요. 혼자 괜찮습니다.”
“그래도 앞으로…….”
나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말을 자르고 내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중에 커지면 버거워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겠습니다. 일단 지금은 무리 없습니다.”
그는 단호한 내 말투에 꽤 당황했는지 동공이 흔들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이야 괜찮겠지만…….”
“나중에 점점 커져서 명의 병원 전체가 WG 메디컬의 메인 병원이 된다면 그때쯤에는 저도 경험과 능력치가 생기니까 혼자 감당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
그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빈 병이 늘어가고, 새로운 술병이 도착할 때쯤, 나는 옥주 병원의 강성원 원장 말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슬쩍 이 차장을 떠보았다.
“근데 차장님 복 메디컬에 계실 때 레일 정형외과가 차장님 담당이었었죠?”
“내가?”
“아니지 않습니까? 복 메디컬에서 신입 직원이 담당이었다고 들었었는데.”
한태준은 허공을 보며 기억을 더듬더니 이 차장 대신 대답을 했다.
“그래. 내가 아니라 몇 개월 안 된 신입 직원이었어.”
그는 아니라고 말하는 입과는 달리, 시선은 내 눈을 온전히 피하고 있었다.
“신입 직원이 담당이어서 파산되고 있는 상황 같은 걸 몰랐었지.”
이 차장은 묻지 않은 질문에도 변명하듯 대답하기에 바빴다.
“완전 신입이었나 보네요.”
한태준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응. 입사한 지… 개월 수가 태준 씨랑 비슷했었지, 아마.”
“와. 제 담당 병원이 지금 그렇게 된다고 해도 저도 전혀 모를 것 같아요. 입사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어쩌다가 그런 일이. 진짜 재수가 없었네요.”
그의 말에 이 차장은 한숨을 내 쉬고는 술잔을 들어 올렸다.
“참… 복 메디컬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안타깝지, 한순간에 그렇게 망하게 된 게.”
그는 빈 잔에 소주를 스스로 따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데 복 메디컬에서 레일 병원이 큰 메인 거래처 아니었습니까?”
소주를 따르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그렇지. 제일 큰 메인 거래처였지.”
“근데 이상하네요. 그렇게 큰 거래처인데 신입이 혼자 담당한 겁니까?”
한태준은 나의 말에 손뼉을 세게 부딪치며 말했다.
“어? 그러네. 그 생각은 못 해봤었는데. 전에 다른 담당이 있다가 신입 직원한테 넘어간 건가.”
“그렇지. 다른 경력 직원이 담당하다가 신입이 충분히 커버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넘어간 거야.”
“그럼 그전에는 누가 담당했었어요? 레일 정형외과 정도면… 제일 높은 분이 했겠네요.”
한태준의 말에 이 차장은 눈을 크게 뜨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어, 그랬지. 누구였더라?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 이사님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큰 병원의 담당이 누구였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라… 옥주 병원의 강 원장과 다른 말이었지만, 들을수록 확신이 생겼다.
둘 중 당연히 강 원장의 말에 동조할 수밖에 없어지는 이 차장의 이야기.
“그럼 차장님은 레일 정형외과가 파산할 거라는 걸 전혀 모르셨다는 거네요?”
“그렇지. 내가 알았으면 조치를 취하지 않았겠어?”
“그러게요. 만에 하나라도 아셨다면 복 메디컬 쪽에 이야기하고 어떻게든 했어야 되는 거죠?”
나의 추궁에 그는 거부 반응을 내보였다.
“근데 왜? 민 대리, 어디서 무슨 이야기 들었어?”
그는 내가 알고 자신에게 묻는다고 생각하는지 내 질문을 듣고 멈칫하며 내게 되물었다.
“아니요. 큰 병원인데 회사에서 몰랐다는 게 특이해서요.”
나는 어깨를 살짝 올리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혼잣말을 하듯이 속삭였다.
“내가 알고 있는데 말을 안 했을 리가 없지…….”
“그럼 레일 정형외과가 차장님 담당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회사는 왜 옮기신 거예요?”
나는 말끝을 흐리며 대답하는 이 차장에게 물었다.
“오래 일하기도 했고, 복 메디컬이 내 역량과 안 맞았어. 나는 더 큰 회사에서 후배들 양성도 하고 싶었고, 한 군데 오래 있다 보니 옮기고 싶기도 하더라고.”
앞뒤가 맞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는 게 티가 나는 거지.
역량과 안 맞아서 옮겼다고 하기에는 꽤 오랜 세월을 복 메디컬에서 일을 했고 그 누구보다 마음이 아프다고 연신 말하는 그였기 때문이다.
레일 정형외과의 담당이 이 차장 본인이었어도 나에게 맞다고 말할 리는 만무했지만 이렇게라도 들으니 더욱더 확실해졌다.
강 원장의 말이 사실이라는 게, 더불어 이 차장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도.
빈 술병들이 하나둘 더 늘어갈 무렵, 이 차장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백상 메디컬에서 과장하던 사람이 나와서 회사 차렸다는 이야기 들었어?”
“네? 과장직이요?”
한태준이 놀라 그에게 물었다.
“응. 그렇게 일찍 나가서 차리는 게 대단하기도 하고, 그만큼 회사 경력이 쌓이는 거니까 괜찮은 것 같더라.”
술자리가 시작될 때부터 한결같이 회사를 차리고 싶어 하는 듯한 이 차장의 태도. 나는 그에게 직접 적으로 물었다.
“그러게요. 차장님은 나가서 회사 차리실 생각은 없으세요?”
“마음 같아서는 하고 싶지. 딱 민 대리가 같이 나와주면 금상첨화지.”
“차장님, 서운해요. 저는요?”
옆에 있던 한태준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태준 씨 얼마나 믿는지 알면서. 태준씨 는 당연히 말 안 해도 나와 함께해야지.”
“하하. 저는 이 차장님 라인 타겠습니다.”
“이미 우리는 같은 라인 아니었어? 그런 의미에서 한잔할까?”
그는 앞에 놓인 소주를 한 잔씩 따라주며 잔을 들었다.
[어휴. 내가 미쳤다고 한태준을 데려나가? 민 대리를 꼬셔서 명의 병원에 옥주, 국동 병원 다 챙겨서 데리고 나가야지.]
잔을 부딪치다가 그의 속마음이 들렸다. 겉과 속이 너무나도 다른 그의 마음의 소리에 혐오감까지 들었지만 최대한 표정을 숨겼다.
내가 자신을 따라갈 것이라는 걸 확신하는 것도 놀라웠다. 하지만 내가 담당하고 있는 병원들을 모조리 가지고 나가려는 그의 생각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따져 묻고 싶지만 속마음을 들었다며 이야기는 할 수 없는 노릇.
술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정신을 다시금 차려냈다.
이 차장에 대해 내가 직접 알아 나서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 * *
“태준 씨. 잠깐 나 좀 보게.”
“네!”
출근하자마자 한태준을 회의실로 불렀다.
“대리님 어제 잘 들어가셨습니까?”
“응. 태준 씨도 잘 들어갔고?”
“네, 바로 들어갔습니다. 대리님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정말요? 저는 어제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아주 죽겠습니다. 대리님은 왜 항상 혼자 멀쩡하신 거예요.”
“이거 마시고 얼른 술 깨.”
나는 그에게 숙취 해소제를 건네며 말했다.
“와, 대리님. 역시 이런 걸 대리님한테 배워야 한다니까요.”
“뭘 배우기까지. 어제 술 많이 마셨잖아.”
“이런 센스는 진짜 타고나야 하는 건데. 진짜 존경스럽습니다.”
한태준은 그의 트레이드인 엄지를 치켜들고는 한 손으로 숙취 해소제를 열어 원샷을 해 보였다.
“감사합니다. 대리님.”
“그래. 그나저나 이 차장님이랑 트레이드했던 병원들은 다 가봤어?”
“네. 받은 날부터 하나씩 가서 확인했습니다.”
“그때 매출 정리 파일 받은 거 한번 보여줄래?”
“잠시만요.”
그는 급히 자리로 돌아가 파일을 들고 회의실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대리님. 여기요.”
파일을 열어 두 손으로 건네는 한태준. 매출 정리 표를 보니 인공 관절과 트라우마, 수술 재료 매출이 월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단, 소모품이 제외된 파일이었다.
종이 페이지를 수차례 넘기고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소모품은?”
건너편에 앉은 그는 나의 말에 몸을 내 쪽으로 기울여 턱을 치켜들고 파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 소모품이 빠졌네요…….”
“여기 병원이 소모품이 많이 나간다고 하지 않았어?”
“네. 이 차장님이 소모품 매출이 큰 편이라고…….”
“확인 제대로 했어야지.”
“죄송합니다.”
단호한 나의 말에 한태준은 기울이고 있던 몸을 제자리로 돌려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 병원에서 수술이 많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소모품으로 매출 올리던 병원이면 그것부터 확인을 했어야지. 병원 발주는?”
“병원은 제가 가서 담당자 바뀌었다고 인사하고, 물건들만 확인하고 왔습니다.”
한 번의 꾸지람에 한껏 기가 죽은 한태준.
“병원 가서 소모품 매출 전부 확인해 보고 최근 3개월 목록 따로 정리해서 나한테 가지고 와.”
“넵.”
아무래도 이상했다.
갑자기 트레이드를 한 것도, 큰 병원을 한태준에게 내어준 것도. 매출 자료의 가장 큰 부분을 일부러 쏙 빼놓은 것까지 모조리.
의심이 가지 않는 부분이 단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