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강성원 원장은 침을 한번 꿀꺽 삼켜내고 입을 열었다.
“WG 메디컬로 이직했다는 이상일 차장 말이에요.”
그의 비장한 대화 시작에 덩달아 긴장을 한 채 대답했다.
“네, 말씀하십시오.”
“복 메디컬에서 이 과장으로 있을 때, 레일 정형외과 담당이었던 건 알고 있어요?”
“네?”
나는 강 원장의 말에 놀라 눈썹은 치켜들고, 얼굴의 구멍이라는 구멍은 모두 크게 오픈한 채 데시벨을 한껏 높여 되물었다.
“몰랐나 보네…….”
“…….”
“하긴 레일 정형외과가 그렇게 됐는데 자기 회사에도 안 알린 걸 WG 메디컬에 말할 리가 있나.”
당황스러웠다. 아니, 이해가 되지 않아 얼떨떨하다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레일 정형외과는 파산 신청을 했고 그 덕택에 담당 메디컬이었던 복 메디컬은 망할 위기에 놓여 있는데, 그때 복 메디컬에서 레일 정형외과를 담당하던 영업 직원이 이상일 차장이라…….
이 차장이 담당을 맡았던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굳이 거짓말을 했다는 게 더 충격이었다.
병원의 파산 신청이라는 건 영업 직원의 잘못이 전혀 아니다. 단지 병원 내에서의 영업 부진, 자금 융통이 되지 않아 쉽게 말하면 병원에 돈이 없어서 파산 신청을 하는 것인데.
당연한 말이지만, 영업 직원에게는 과실이 없기에 아무런 오점도 남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거짓말할 이유가 있었을까. 만약에 그랬다면 대체 무엇이었을까, 라는 생각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복 메디컬에도 알리지 않았다는 건 무슨 말씀이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레일 정형외과가 파산 신청하기 한참 전에 잠깐 금전적인 문제로 주춤했었거든요.”
“네. 하루아침에 파산이 될 리는 없으니까, 그래었겠네요.”
“근데 어느 날 갑자기 레일 정형외과에 오는 복 메디컬 담당자가 신입 직원으로 바뀌었더라고요.”
“신입 직원이요?”
내가 듣기로도 그랬었다. 레일의 담당자가 복 메디컬의 신입 직원이라는 이야기. 그래서 대처를 잘못했겠구나, 라며 뒤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직전의 담당자가 이 차장이었다니.
“네. 복 메디컬에서 레일 정형외과면 큰 메인 거래처였던 거라고 들었는데, 뜬금없이 신입 직원이 들어오기 시작했었어요.”
“이렇게 말씀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레일 정형외과에서 금전적으로 주춤했기 때문에 신입으로 배정했던 걸까요?”
“그렇다고 하기에는 묶여있는 돈을 달라고 하든지, 물건을 빼기 시작한다든지 취하는 모션이 없더라고요.”
“신입 직원은 몰랐었나 보네요.”
“저도 병원에서 의사이긴 해도 금전적인 부분의 회계 쪽은 모르는 일개 직원이라, 파산 신청까지 할 거라는 걸 신청할 때쯤 알게 됐었는데, 복 메디컬은 그냥 아무것도 몰랐던 것 같더라고요.”
그는 혀를 내두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나중에 병원장님이랑 복 메디컬 사장님이랑 이야기해 보니까, 레일 정형외과가 파산 신청 전부터 힘들었다는 걸 아예 모르시더라고요.”
“그럼 이상일 차장은 알고 있던 건 맞을까요?”
이해가 당최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 오늘 처음 만난 강 원장에게 이것저것 쉴 틈 없이 질문 세례를 쏟아부었다.
그도 지난 병원에서 있었던 일에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는지 쉬지 않고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 결제 텀 대로 입금이 안 되기 시작하니까 이상일 차장이 회계부에 찾아가기도 했고, 계속 밀리니까 병원장님까지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병원장님이 안 알려주셨었나 보네요?”
“아니. 요즘 병원 사정이 안 좋아서 늦을 것 같다, 진지하게 파산까지 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식으로 다 이야기했다네요.”
“아…….”
“병원 쪽에서는 입금이 늦어도 별말 없이 이해해 주고, 물건도 안 빼고 납품해 주니까.”
“그렇죠. 병원 입장에서는 굳이 메디컬 쪽에 더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다가 레일 정형외과가 파산 신청하고, 복 메디컬이 덩달아 난리가 나니까 이 차장이 그만두고 다른 회사로 이직하면서 잠수 타버렸다고 하더라고요?”
“복 메디컬이 금전적으로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이야기 잘하고 좋게 나온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네요.”
“뭔가 찔리는 게 있으니까 그렇게 나갔겠죠? 게다가 거래처도 들고 나갔다던데.”
이미 업계에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모양.
“복 메디컬에서 직원들 거래처 하나둘 자기 담당으로 바꾸더니, 퇴사할 때 그 병원들 모조리 들고 나갔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미간을 들썩이며 생각에 잠겼다.
병원이 파산될 지경까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던 이 차장. 그는 메인 거래처일 정도의 큰 담당 병원을 위기가 찾아온 순간, 회사에 알려서 대책을 마련하기는커녕,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에게 떠넘기며 외면해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엉망인 내용물을 억지로 포장해 WG 메디컬로 거짓말을 하며 넘어오기까지 했다.
경계하던 마음을 넘어 환멸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쪽 업계에서 일해본 사람들은 모두 알 것이다. 퇴사하고 다른 메디컬에 입사를 한다고 한들, 병원은 한정적이고 의사들은 이 지역 내에서 돌고 돈다는 것.
그만큼 다른 업계보다 좁다고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런 와중에 이런 일을 벌여 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회사에서 생활하고 있다니.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한태준이었다.
한태준에게 갑자기 거래처 트레이드를 하자고 했던 게 영 찜찜할 찰나였다는 걸.
그리고 한태준이 트레이드로 이 차장에게 넘겼던 병원이 두 곳.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의 의도를 파헤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원장님.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모르고 있을 것 같아서 이야기해 주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네, 원장님 아니었으면 계속 모르고 있을 뻔했어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정말이요. 원장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그리고 옥주 병원으로 오신 것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그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사무실로 들어와 책상에 앉아 생각에 잠겨 펜대를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민 대리님, 무슨 일 있으세요?”
넋이 나가 있는 나를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오는 한태준.
“너는?”
“네?”
동문서답하는 나에게 한태준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니. 너는 별일 없냐고.”
“제가 별일 있을 게 뭐 있겠어요, 대리님.”
“그럼 다행히…….”
“아! 있다, 별일.”
“뭔데.”
“오늘 저녁에 시간 가능하십니까?”
그의 갑작스러운 진지한 표정에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놀라 대답했다.
“뭐 상담할 거 생겼어? 병원에서 무슨 일 있어?”
그는 나의 표정을 보고 자신의 표정을 순간 풀어놓으며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 아니요. 오늘 이 차장님이 술 사주신대요.”
“이 차장님?”
“네. 제가 말씀드렸었죠?”
한태준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고개를 한껏 들어 파티션 너머로 직원들을 쓱 훑어보더니 내 귀 쪽으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저랑 대리님 픽하셨다고.”
“그놈의 픽은.”
내 얼굴 쪽에 바싹 붙어 있는 그를 손바닥으로 밀쳐내며 말했다.
“아무튼, 가시는 거죠?”
“안 가, 바빠.”
“아. 대리님, 같이 가요. 제가 대리님 무조건 꼬셔 온다고 했단 말이에요.”
“못 꼬셨다고 해.”
“저 대리님 없으면 저도 안 갈래요.”
“그거는 알아서 하고.”
“대리님…….”
이렇게 눈빛까지 보내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 차장에 대한 신뢰도가 장난이 아닌 모양.
가만히 두면 무언가 사달이 벌어질 것 같았다.
“알았어, 생각해 볼게. 얼른 가서 일 봐.”
“앗싸. 대리님 역시 짱이에요. 감사합니다.”
그는 쌍 엄지를 치켜세우며 활짝 웃으며 쭈그려 앉아 있던 다리를 펴냈다.
아양을 떠는 그를 향해 손을 휘휘 저어 돌려보내고 자리에 혼자 남아 생각에 잠겼다.
강 원장이 굳이 나에게 거짓말을 해서 득이 될 리는 없으니 사실일 확률이 높지만, 그래도 직접 확인은 해봐야 한다.
이 차장에 대한 마음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지만, 직접 듣고 어떤 방안을 짜내야 할지 생각을 하기 위해 자리에 가기로 했다.
* * *
“와. 얼마 만에 먹는 소고기입니까, 이게!”
회식에서 늘 돼지고기만을 먹다가 소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에 잔뜩 신이 난 한태준.
3명이서 처음 만드는 이 자리에 굳이 소고기?
누군가 그랬다. 조건 없이 베풀 수 있는 건 돼지고기까지라고.
찜찜한 기분을 안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먹고 싶은 거 시켜.”
“정말요? 역시 이 차장님 통 진짜 크시다니까요. 민 대리님 뭐 시킬까요?”
“태준 씨 먹고 싶은 거로 해.”
“이모. 주문할게요.”
한태준은 이미 들어오면서 생각을 마쳤는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식당 직원을 불렀다.
“민 대리.”
“네, 차장님.”
“회사 어떤 것 같아?”
앉자마자 묻는 질문이라기에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네? 어떤…….”
“민 대리가 이제 3년 차 됐다고 했었나?”
“맞습니다.”
“WG 메디컬이 첫 번째 다니는 메디컬 회사인가?”
“그렇죠.”
“WG 메디컬 3년 다녀보니까 어때. 계속 믿고 다닐 만한 것 같아?”
“네. 저는 만족하면서 다니고 있습니다. 회사에 긴 역사가 있다거나 큰 회사는 아니지만, 탄탄하고 같이 다니는 직원들과도…….”
“아니. 급여나 비전은?”
“네?”
무슨 의도를 가지고 물어보는지, 그는 내가 만족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다른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하듯 말하는 이 차장.
“여기 술 먼저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타이밍에 직원이 가져다주는 술로 인해 대화는 중단되었다.
“제가 첫 잔 말아보겠습니다. 차장님, 대리님 전부 소맥 드시는 거죠?”
“좋지.”
그렇게 얼마나 마셨을까.
술이 한 병 마무리될 때쯤 술과 고기에 끊겨 버렸던 대화를 다시 이어 붙이려는 이 차장.
“민 대리, 아까 하던 이야기 이어서 해볼까 우리?”
“아… 네.”
“전부 다 마음에 들어서 다니는 거고?”
“근데 왜 이런 거 물어보시는 겁니까?”
계속해서 물어보는 그에게 나는 반문을 던졌다.
“뭐, 3년 차 되면 슬슬 회사에 질리기 시작하니까, 민 대리는 어떤가 해서. 다른 회사 가고 싶거나 스카우트 들어오는 건 없고?”
“3년 차 되면 스카우트도 들어오는 겁니까?”
한태준이 술을 따르며 물었다.
스카우트. 이 업계에서는 3년에서 5년 차에 접어드는 직원이 가장 구하기 힘들고, 이직하기에도 가장 적절한 시기이다. 그 이상이 된다면 직책도 높아질뿐더러, 직책이 올라가면 급여 또한 오르기 마련이다.
어느 회사든 과장 이상의 직책 직원들은 잘 빠지지도 않고, 그렇기에 구하는 일도 극히 드물다.
딱 이 연차의 직원이 일도 적당히 배우고, 자신의 거래처도 하나둘 갖기 시작했을 때라 어느 회사에서든 이직을 선호한다.
“그렇다더라고. 민 대리는 그래서 이직 생각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