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 제보자 】
“어, 지훈아 왔어? 볼일은 다 본 거야?”
“응. 무슨 일 있어?”
“아니, 회사랑 잠깐 통화 좀 하느라.”
“아……. 그래?”
조금 전에 들은 통화 내용이 나에 대한 내용인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지만, 병원 앞에서 메디컬 직원을 만나는 건 너무 흔한 일이기에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질문을 삼켜냈다.
“야, 이렇게 만난 것도 진짜 신기하다.”
“그러니까 말이야.”
“오늘 저녁에 뭐 해. 퇴근하고 술이나 한잔하자.”
“오늘? 그러자.”
“지훈아, 명함 하나 주라.”
“명함? 나 지금 물건만 가지고 나오느라, 차에 지갑을 두고 와서…….”
재킷 안주머니에 들어있는 지갑을 애써 모른 체하고, 자연스레 넘겼다.
좀 전에 통화 내용이 내 얘기라는 확신은 없지만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 그래?”
“응. 명함은 왜?”
“저녁에 만나자니까? 연락하려고 그러지.”
“아… 그럼 여기 번호 찍어줘.”
나는 재빨리 핸드폰을 열어 전화 키패드를 클릭해 백승원에게 내밀었다.
내 핸드폰을 건네받은 백승원은 번호를 눌러 내게 돌려주었다.
“그럼 이따 저녁에 보자. 연락할게.”
“이따 보자.”
저녁에 만나 백승원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까 했던 통화는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사무실로 곧장 향했다.
* * *
사무실로 들어와 어깨 임플란트와 기구를 점검하고 카탈로그를 함께 챙겼다. 그리고는 곧장 명의 병원으로 향했다.
전날 명의 병원 이명호 원장이 요청한 숄더 데모를 하기 위해 급히 출발을 했다.
“이 원장님, 안녕하십니까?”
“민 대리. 딱 맞춰왔네? 안 그래도 방금 일 끝났거든.”
“아, 다행입니다. 데모 바로 시작할까요?”
“응.”
카트에 싣고 온 기구를 테이블 위에 쭉 세팅했다.
“stem은 6, 9, 12 이렇게 3가지로 있고, insert는 두 가지 사이즈.”
이명호 원장은 노트를 꺼내 내가 데모를 해주는 것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수술하실 때에는 먼저 bone에 stem을 대고…….”
써전은 환자를 진찰하고, 아픈 부위를 치료해 주는 직업이지만 수술 기구를 온전히 알지는 못한다.
수술 기구를 써전이 모르면 누가 아나, 싶을 수도 있지만 모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정형외과 써전은 말 그대로 몸의 온 뼈, 관절, 인대 등에 대해 속속들이 모든 것을 잘 알고, 그에 맞는 수술 방법과 수술을 잘하는 것이지 이 세상의 수술 기구를 전부 알 수는 없다.
숄더 하나만 놓고 봐도 환자가 어깨가 아파서 오는 유형이 비슷하다지만 온 증상이 똑같을 수는 없다.
관절이 아픈 사람, 뼈가 부러진 사람, 인대가 늘어난 사람 등 증상은 다양하고 그에 맞는 치료 방법도 너무나도 다양하다.
그렇게 어깨 인공 관절 수술이라는 진단이 나오게 되면, 어깨 인공 관절 치환술의 수술 재료인 임플란트의 제조사는 또 어찌나 많은지.
몇십 개가 넘는 제조사 중 써전이 원하는 제조사, 원하는 제품을 골라 수술을 하게 된다.
어깨 인공 관절로만 놓고 봐도 이렇게 다양한데, 써전은 어깨만 전문적으로 하지 않는 이상 모든 기구를 외우는 것을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의료 기기 영업직, 메디컬 영업 직원인 우리가 존재하고 필요한 이유이다.
WG 메디컬에서 취급하는 인공 관절 임플란트 종류는 우리가 제일 잘 알고, 수술 방법에 대해 더 잘 알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물론 수술실에 들어가 환자의 몸에 직접 수술을 해본 적은 없으나, 수술 방법과 기구, 제품은 우리 것이기에 써전보다 기구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쪽 분야의 전문가이니까.
“…이렇게 하면 수술 끝입니다.”
“오? 수술 방법도 어렵지 않은데?”
“저도 명의 병원에서 원장님이 쓰신다는 문 바이오 숄더 수술 카탈로그 보고 왔는데, 저희 거랑 많이 다르더라고요.”
“오늘 데모 받아보니까 확실히 다르긴 하네.”
“어떠십니까? IBH 제품은 다른 병원에서 많이 쓰시긴 하는데, 카탈로그 보신 거랑 비교하면 많이 차이납니까?”
“아니, 생각보다 덜 복잡하고 사이즈도 다양해서 괜찮은 것 같아.”
“정말입니까? 다행입니다.”
“무엇보다 사이즈 폭이 다양한 게 너무 좋네.”
“네. 이게 한국인들 많이 쓰는 사이즈 쪽이 세분화 되서 이번에 추가된 거라. 많이들 수술할 때 편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응. 수술하면 진짜 애매한 사이즈들 많아서, 진짜 꽉 끼워 맞출 때가 많다니까? 그런 수술이 제일 힘들어.”
“아……. 저희 IBH 제품 사용하시면 그런 일은 아마 없을 겁니다. 믿고 한번 써봐 주십시오.”
“그러게. 이걸로 수술 한번 해보고 싶은데, 고민이네……. 쓰읍.”
이 원장은 기구를 계속 만지작대면서 임플란트를 하나씩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손을 턱에다 가져다 대고 연신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견고했던 MG 메디컬에서 납품을 받던 소모품을 나에게 바꾸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인공 관절까지 바꾸려고 하니 병원장의 눈치가 보이는 모양.
저희 제품으로 그럼 한번 수술해 보고 결정해 주시라, 너무 좋다, 라고 쉴 새 없이 영업 멘트를 퍼붓고 싶었지만 이 원장의 표정을 보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정적인 진료실은 이 원장의 쓰읍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로만 가득 찼다. 그러다 이 원장은 뭔가를 결심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선 민 대리. 오늘 데모 고마워. 내가 다시 연락할게.”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편하게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세요, 원장님. 하하.”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보이는 이명호 원장을 뒤로하고 명의 병원을 빠져나왔다.
* * *
퇴근을 하고 술을 마시러 오랜만에 번화가로 이동했다. 늘 회사 사람들과 사무실 앞 삼겹살집, 동네 작은 호프집을 전전하다 간만에 나온 번화가.
이제 나이를 하나둘 먹어가면서 20대들이 애처럼 보이고, 시끌벅적한 거리보다 우리끼리 이야기할 수 있는 조용한 술집이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나와 보니 그냥 내가 그동안 잊고 살았던 것 같다.
이 느낌. 한창 생기가 넘치고 활기가 가득한 젊음의 열기를 만끽하고 있을 때.
“민지훈! 여기서 뭐 하고 있냐?”
백승원이 어깨를 툭 치며 불렀다.
“왜 이제 오냐?”
“미안, 미안. 상무 지구가 워낙 차가 막히잖아. 퇴근 시간이라 아주 신호도 다 걸리고.”
“어휴. 가자!”
술집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와, 진짜 오랜만이다. 맨날 회사 윗사람들 모시고 조용한데 가서 술 마시다가 이게 얼마만이냐.”
“야, 너는 회사에서 퇴근하고 술 마실 시간도 있나 보다? 편하게 잘살고 있네, 민지훈이.”
“그래.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승원이 너는 뭐 하고 지내냐?”
백승원은 술을 내게 따라주며 말했다.
“나? 신문사에서 일해.”
“그러면 기자인 건가?”
“응. 이것저것 기자 활동하고 있어. 꽤 됐어.”
백승원은 목에 걸고 있는 기자증을 옷 사이에서 힘겹게 꺼내어 내게 들어 보였다.
“와. 기자? 진짜 멋있다, 야.”
“멋있긴 뭘. 정신없지.”
“그래도. 신기하다.”
“신기하긴, 촌스럽게 기자 처음 보냐?”
“그럼. 기자를 내가 어디서 만나보겠어. 근데 너 어쩌다가 기자가 된 거야? 너 대학 갈 때 전공 이쪽이 아니지 않았나?”
“뭐, 살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 세상일이 마음대로 되는 게 어디 있겠냐.”
“그치.”
지난 10여 년간 만나지 못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가느라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오랜만에 만나 어색함을 느낄 새도 없이 떠들어 댔다.
“…그래서 걔들은 아직도 만나다가 이번에 결혼한다고 하더라니까?”
무려 몇 년간의 근황 토크를 하느라 주고받은 술병이 어느새 쌓여갔다.
“지훈아, 너 그래서 KJ 병원에 영업하는 거 맞아?”
“응? 그치. KJ 병원 우리 거래처긴 하지.”
“아……. 그래?”
“응. 맞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너 아까 KJ 병원에는 대체 왜 있던 거야?”
들고 있던 술잔을 탁 내려놓으며 백승원에게 물었다.
“병원에 왜 가긴. 나도 볼 일이 있으니까 갔지.”
“아픈 것도 아니라며? 대체 무슨 볼일?”
내 담당 병원은 아니지만, 최준성 과장의 담당 거래처이기도 하고 우리 회사의 큰 매출을 끼치고 있는 병원이다 보니 호기심을 넘어 무슨 사건이 생겼을까 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기자가 왜 갔겠냐? 취재하러 갔지.”
“취재? KJ 병원에 무슨 일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