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예, 들어가십시오.”
“그래. 또 보자고.”
병원으로 돌아가는 임근수 과장을 향해 깍듯하게 허리를 접어 인사하고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분명 커다란 성과가 있었다.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임근수 과장의 속마음을 알았고, 그 덕분에 한결 더 가까워질 수 있었으니까.
하나, 머릿속엔 계속해서 의문이 차올랐다.
또 들렸다. 타인이 마음에 품고 있는 가슴 속 깊은 곳의 목소리가. 그리고 그때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목소리가 들릴 때는 늘 나의 시선이 그의 미간에 꽂혀있었다. 내가 누군가의 미간을 보았을 때 그 마음의 소리가 내게 들리는 건가?
정면의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졌다.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아 멈추자 횡단보도 위로 많은 사람들이 건너갔다.
진짜 되려나?
나는 눈에 힘을 주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미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자동차의 공회전 소리만 들릴 뿐, 누군가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파마머리의 아주머니.
책가방을 메고 있는 남학생.
바쁜 듯이 샌드위치를 문 채로 지나가는 직장인.
그중 누구도 반응이 없었다.
빠앙―!
뒤에서 울려오는 경적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신호등은 어느새 파란불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액셀을 밟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간을 보는 게 아닌 건가?
* * *
다음 날 아침.
나는 늘 끌던 차 대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오늘은 영업이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어제 검증하지 못한 능력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했으니까.
평소보다 일찍 나온 탓인지, 다행히 사람에 치이는 만원 지하철은 아니었다. 휴대폰을 꺼내 웹툰이나 웹소설을 보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찬찬히 시민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정확히는 미간 위주로.
가장 왼쪽에 앉은 대머리 아저씨부터 졸고 있는 할아버지 그 옆에 탄식을 내뱉는 40대 아저씨까지 차근차근.
그의 얼굴을 지나치려는 찰나.
[하아. 벌써 사흘째 실적이 하나도 없네. 오늘은 정말 정수기라도 팔아야 되는데… 동창놈들한테 전화라도 한번 돌려볼까?]
불현듯 들려오는 중년의 목소리. 역시나 아저씨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 그의 차림새나 들고 있는 그리고 무엇보다 서류가방에서 삐죽 튀어나온 팸플릿을 보아 나와 같은 영업사원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남자의 생각이 확실할 터.
일단 중요한 건 미간을 보는 것만으로 속마음이 들리는 건 아니라는 사실.
내가 앉아있던 지하철 칸을 다 살피고 옆 칸까지 넘어가 또 한 번 사람들의 미간을 살폈다. 그리고 30번째가 넘는 시도 만에 또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혜진이한테 말 걸어볼까? 어제 학원에서 들었던 거 물어보면 자연스러울 것 같기도 하고.]
남학생에게서 들려오는 속마음과 달리, 그는 휴대폰으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 * *
- 다음 역은 상무. 상무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사람을 살피다 보니 어느새 회사 앞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서둘러 지하철에서 내려 개찰구로 향했다.
출근 시간 내내 애를 쓴 덕분일까, 나름대로 성과는 있었다. 아무 때나 목소리가 들려오는 건 아니지만, 목소리가 들릴 때는 꼭 내 시선이 누군가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굳이 미간이 아니어도 된다. 그저 내 눈길이 가있으면 된다는 것이지.
그리고 또 하나. 속마음이 들리는 건 맞지만 대상이 당장 생각하고 있는 것만 들리는 건 아니라는 사실.
정확히는 무언가에 대해 의식하고 속으로 고려하고 있는 내용이 내게 들려오는 게 아니라 내면 깊숙한 곳에 잠들어있는 무의식이 툭 튀어나오는 것으로 봐야 했다.
한번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목소리가 들렸는데, 대화 주제와 전혀 다른 내용이 귀에 꽂혀왔었다.
내가 원할 때마다 목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간헐적으로 들려온다는 사실이 아쉽긴 했으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른 이들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다는 건, 나 같은 영업직들에게는 날개를 달아준 것과 같았으니까.
꿈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았다.
다만 여전히 불안하긴 하다. 갑자기 능력이 찾아온 만큼 언제든 능력이 사라질 수도 있는 법이니까.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내게 주어진 능력을 통해 최대한 좋은 성과를 이끌어 내는 것뿐.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훨씬 더 가볍게 느껴졌다.
* * *
“오늘 회식 빠지는 사람 없지?”
최권호 부장의 물음에 손을 드는 이는 없었다.
오늘은 이달의 마지막 목요일.
한 달에 딱 한 번 있는 회사 전체 회식이다.
부서별 회식이나 번개로 잡는 게 아닌, 이 전체 회식은 매달 미리 날짜가 미리 정해져 있기 때문에 빠지는 인원이 거의 없다.
특별한 개인 사유가 있거나 상사에게 밉보이고 싶은 직원이 아니라면 당연히 참석해야 하는 자리.
차를 가져오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오늘 같은 날 차까지 가져왔으면 대리비까지 깨졌을 테니까.
“그래. 그러면 다들 참석하는 걸로 알고 있는다.”
안쪽에 있던 장홍석 이사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그래서 오늘 회식은 어디서 해?”
그의 시선이 홍 대리에게 꽂혔다.
“요 앞에 있는 꽃돼지 삼겹살집에서 합니다.”
“또?”
장홍석 이사는 질색을 하며 되물었다.
“거기 말고 다른 데도 좀 가보자. 왜 맨날 요 앞에서만 돌아다니냐.”
홍 대리는 어설프게 웃으며 곤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표님이 삼겹살이 당긴다고 하셔서…….”
그러면 그렇지. 또 삼겹살일 줄 알았다.
김 대표 이 쪼잔한 인간은 월말 정기 회식에서 절대 비싼 메뉴를 사지 않는다. 회사 직원들 전체가 참석하는지라 돈이 아까운 것일 테지만, 본인은 늘 ‘오늘따라 돼지고기가 당기네.’라는 등 궁색한 변명을 하곤 한다.
정기 회식에서 제일 비싸게 먹어본 메뉴가 해물찜이었나? 접대비로는 그렇게 펑펑 쓰면서 직원들한테는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쪼잔하게 구는 걸 보면 참 답답하고도 씁쓸한 노릇이다.
그때 타이밍 좋게 대표실의 문이 열렸다.
“자자, 오늘 회식이니까 슬슬 퇴근 준비해. 한 시간 일찍 나가자고.”
본인 이야기를 꺼내기 무섭게 나오네.
역시나 저 인간, 절대 양반은 못 된다니까.
“예.”
천천히 대답하며 책상 위 서류를 정리했다.
그때 문득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박 주임도 오늘 오지?”
보나 마나 최준성 과장이다. 저 녀석은 질리지도 않는지 끈덕지게 박수진 주임에게 들이댄다.
그녀는 늘 그렇듯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네.”
짤막하게 대답했다.
“오늘 시원하게 한잔하자고.”
“네.”
쯧쯧.
저렇게 철벽을 치는데도 최 과장 저놈은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다들 챙겼어? 출발할까?”
“예, 가시죠.”
* * *
꽃돼지 삼겹살.
월말 회식에서는 두 번 중에 한 번꼴로 오는 식당이긴 하나, 이 근처에서는 제일 맛집이긴 하다.
“민 대리 안 들어와?”
“저 담배 한 대 태우고 들어가겠습니다.”
“어, 그래.”
회식에서 식당에 도착하면 회사의 서열 대신 도착하는 순서대로 안쪽에 자리를 잡는데, 다들 눈치를 보며 나처럼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통화를 하는 척 시간을 끌며 꾸물거리다 늦게 들어가곤 한다.
이유는 뻔하다. 상석인 제일 안쪽에는 늘 김 대표가 자리를 잡으니까.
옆자리는 자연스레 장 이사와 최 부장 고정. 그 외에는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간부들의 옆자리에서 술 시중을 들며 회식 내내 고통받는 것이지.
평소보다 더 천천히 담배를 태우고 나서 식당에 들어가자, 자연스레 자리 배치가 마무리되었다.
막상 앉고 보니 오늘은 살짝 타이밍에 실수가 있었던 모양. 맞은편엔 지랄 맞은 최준성 과장이 앉아있었고 옆자리엔 쌀쌀하다 못해 나와 대화도 거의 않는 박 주임이 앉았다.
이거 1차 내내 불편하겠는데.
“이모님. 여기 삼겹살로 가득 채워주십시오.”
김 대표는 인심 쓰는 척 호탕한 척하며 주문했다.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고 술이 도착하자 김 대표가 턱을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어이, 신입.”
“예, 대표님.”
얼마 전에 들어온 신입 사원 백태석이 긴장 가득한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첫 회식이니까 빠릿빠릿하게 소맥 한 잔 말아서 돌려봐.”
“아, 네!”
그는 엉거주춤 소주와 맥주를 양손에 들고 꺼벙한 눈빛으로 물었다.
“비, 비율은 어느 정도로 하면 될까요?”
“아니, 영업직인데 그거 하나 제대로 못 해? 센스 있게 알아서 해야지.”
김 대표는 답답하다는 듯 대놓고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순식간에 싸해진 분위기.
백태석은 이미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님. 오늘은 제가 말아보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어디 민 대리가 한번 해 봐.”
“예.”
나는 잔을 앞에 좌르륵 모으고 백태석에게 소주와 맥주병을 넘겨받았다.
이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영업직만 무려 3년이다. 이쪽에서 일을 하다 보면 써전들과의 자리의 대부분은 술자리로 이어진다. 덕분에 주량은 늘고 소맥 제조 능력 하나는 끝장난다.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지.
이것만큼은 내가 그 누구보다도 자신 있다.
소주 2.5에 맥주 7.5 비율로 잔을 채우되, 양이 많아서는 안 된다.
딱 한 모금에 털어 넘길 수 있게.
소맥을 마는 맥주잔 로고에 닿을 듯 말 듯한 높이. 그게 최고의 소맥이다.
“대령했습니다, 대표님.”
“어, 빛깔 좋고.”
그는 흡족한 듯이 잔을 들어 올렸다.
“우리 거국적으로 건배 한번 할까?”
“대표님이 건배사 한번 하시죠.”
“에헤이, 나 그런 거 안 좋아하는데.”
말과 달리, 이미 그의 엉덩이는 의자에서 떨어져 있었다.
“자, 이번 달도 고생 많았고, 시국이 힘들긴 한데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해 주고 있어. 그래도 조금만 더 분발하자고. WG 메디컬을 위하여!”
“위하여!”
짠―!
잔이 부딪치는 청량한 소리를 듣고서 소맥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소주의 알싸한 알코올의 향이 코를 향해 내뿜어져 나왔고 맥주의 시원한 탄산이 목을 긁고 지나갔다.
그래, 이게 소맥이지.
만족스러운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상석에 있는 김 대표 또한 감탄한 듯 눈썹을 들썩였다.
“역시 소맥은 민 대리라니까.”
“감사합니다.”
“한 잔 더 말아 봐.”
“예, 대표님.”
* * *
“어우, 취한다…….”
옆에 있던 동기 하나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1차가 끝나지 않는다.
월말에 있는 단체 정기 회식 특징 중 하나.
1차에서 진짜 뽕을 뽑는다.
짠돌이 김 대표가 늘 그렇지, 뭐.
“아…….”
문득 옆에 앉아 있던 박수진 주임이 눈을 끔뻑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소맥 비율이 좋다고 짤막하게 칭찬하며 꿀떡꿀떡 받아 마시더만, 주량을 넘어선 모양이다.
앙칼지고 차가운 평소와 달리 헤롱헤롱거리니 왠지 걱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2차 가기 전에 택시 태워서 돌려보내야겠는데.
“저 소맥 말고 소주로 마실게요…….”
“네, 그래요.”
잔을 바꿔주는데, 문득 박수진 주임을 바라보고 있는 최준성 과장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귀에 꽂히는 녀석의 속마음.
[아, 오늘 박 주임 취하면 어떻게 한번 해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나도 모르게 인상이 팍 구겨졌다.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그는 내가 보고 있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지, 음흉한 눈빛으로 박수진을 불렀다.
“어이, 박 주임.”
“네?”
그녀는 살짝 꼬인 혀로 대답했다.
“한 잔 더 해.”
“아, 제가 슬슬 취할 것 같아서요.”
공손하게 거절했지만, 최 과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허. 상사가 주는 술을 거부하는 거야?”
“…….”
천하의 박 주임이라고는 해도 회사 생활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잔을 들어 올렸다.
이거 아무래도 조치를 취해야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