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전설의 레전드(3)
전 세계 박스 오피스 1위를 찍은 영화.
「왕의 품격」 신드롬은 멈출 줄 모르고 이어졌다.
프랑스와 미국에 이어, 홍콩과 싱가폴, 뉴질랜드.
각국에 순차적으로 개봉하며 자체 기록을 경신했다.
"대표님."
최근 아침 일과는 항상 똑같았다.
구 팀장은 흥행 소식을 보고했다.
"다음 달까지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 개봉할 것 같습니다."
"잘됐네요."
"여기, 기사 한번 보시죠."
"뭔데요."
배급을 맡은 CW ENM 영화 사업 본부장이 발표한 원대한 포부.
《「왕의 품격」은 전 세계에 한국 영화의 재미를 알리고, 위상을 높일 것으로 확신한다. 현재 36개국 스크린을 통해....》
특히, 프랑스와 미국에 공을 많이 들였다.
칸 영화제와 오스카상을 노리고 있었기에.
"대표님, 이렇게 성공할 줄은 몰랐습니다."
"...."
저도요.
예지와 은서는 이번 영화 한 편으로 돈방석에 앉았다.
계약 당시, 러닝 개런티로 각자 1프로씩 챙겨놨으니까.
평생 노후 걱정은 없겠네.
드르륵─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은서가 걸어왔다.
"대표님."
"응. 무슨 일이야."
"잠깐 얘기 좀 해요."
"???"
표정이 꽤나 심각해 보였다.
한동안 쉬고 싶다고 했는데.
"며칠 뒤에 폴 님이랑 오락실 유니버스 스케줄이요."
"응. 너는 푹 쉬어. 나머지 멤버들이랑 갔다 올게."
"아니죠. 그럼 안 되죠."
"안 된다니."
"부, 불화설 생기면 어떡해요?"
"...."
스케줄 하나 빠진다고 불화설 안 생겨요.
"제가 특별히 가줄 테니까 그런 줄 아세요."
"아니, 그럴 필요...."
장 폭스는 진짜 여우처럼 눈빛을 반짝거렸다.
".... 필요 있네. 불화설 안 생기려면."
"그쵸?"
"응. 불화설 생길 뻔했네."
"아휴, 큰일 날뻔했네요."
"...."
이게 그 은서라이팅인가 뭔가 그거냐.
그냥 가고 싶으면 가고 싶다고 말해줘.
"저는 그만 가볼게요. 놀이동산 가려면 준비할 게 많아서."
"아니야, 없어."
"엄청 많아요!"
"...."
스케줄 아직 멀었어.
그리고, 당일치기에 뭘 준비해.
"흐흐흥."
은서는 콧노래를 부르며 사무실을 벗어났다.
지금 엄청 설렌 것 같아.
얼마나 가고 싶었던 거야.
'은서한테도 이제는....'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때가 다가온 듯했다.
모든 솔라 멤버들을 똑같이 사랑하고, 아꼈지만.
"무슨 생각해?"
"아."
엄지유는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 말을 걸었다.
"말을 해줘야 하는데, 어떻게 할지 고민이라."
"오, 드디어 고백하려고!?"
"응. 솔직하게...."
은서한테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크으, 완전 상남자네. 나는 응원해."
"응원은 무슨 응원이야."
"오빠."
지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나직하게 속삭였다.
"예지 언니는 인형이랑 꽃 좋아해."
"...."
아니, 그쪽은 아직 아니야.
은서랑 먼저 해결할 게 있어.
"너 오늘 예지랑 스케줄 있지 않냐."
"오호, 오빠가 직접 가고 싶어서!?"
"응, 아니야. 개수작 부리지 말고, 빨리 일하러 가라."
"넹."
당분간 영화 홍보 스케줄 위로 잡았다.
은서는 공식 스케줄 외에 전부 뺐지만.
'며칠 뒤에....'
놀이동산 폐점 시간에 맞춰 전세 낸 야간 스케줄.
그날 상황 봐서 은서랑 얘기를 좀 나눠봐야겠다.
* * *
데뷔 이래, 공백기는 한순간도 없었지만.
멤버들은 최근 들어 인기를 부쩍 실감했다.
삐, 삐삐삑─
예지는 개인 스케줄을 마치고 숙소에 복귀했다.
동생들은 새끼 고양이처럼 모여 자신을 반겼다.
"주희랑 은서는 아직 안 왔네."
"언니, 언니!"
소미는 오늘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떠들었다.
"오늘 백송주 피디님이 나한테 존댓말 하셨어!"
"그분 초면에도 반말하셨잖아."
"응! 이상해."
"...."
이전에도 스태프들의 태도는 정중했지만.
지금은 마치 공주님 모시듯 조심스러웠다.
"우리가 뜨긴 떴나 봐."
"그러니까."
연예인의 연예인.
그만큼 왕의 품격이 흥행했다는 증거일까.
역시, 한국에선 영화배우를 가장 잘 쳐주나.
"언니, 결심했어."
예지는 막내의 이글거리는 눈을 귀여운 듯 바라봤다.
"나도 연기하고 싶어!"
"그럼 지금 내 앞에서 한번 해봐."
"무슨 연기?"
"아무거나."
아직 연기 수업을 받은 적도 없었지만.
막내는 뭐든 금방 외우고 곧 잘하니까.
"너 납치된 거야."
"아, 음."
네가 그 연기를 하는 날은 평생 오지 않을 거야.
".... 다른 거 없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오! 이건 불공평한 거잖아요오!"
"소미야, 연기를 꼭 해야겠어?"
"...."
막내는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니까.
"연기 말고 다른 길도 많아."
"히잉."
이제 소미도 성인이 될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수능은 잘 봐야 할 텐데.
연예계 생활 때문에 성적이 안 나오면 어떡하나.
"소미야, 요즘 공부는 어때?"
"문제가 많지."
"정말?"
소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남민지 말이야, 아직도 뒤에서 10등이거든."
".... 너는?"
"앞에서 10등이지."
"와아."
공부할 시간이 있었어!?
"우리 반 애들 다 착해. 시험 범위 다 알려줌."
"...."
보통은 시험 범위 알려줘도 10등을 못해요.
소미 다음은 다이애나.
오늘따라 동생들이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나 오늘 벽을 느꼈어."
"응? 무슨 벽."
"폴 선생님은 신이야. 도저히 못 따라가겠어."
"...."
따라가는 게 이상한 거 아닐까.
그분은 레전드 오브 레전드라고.
"너 이제 고작 스물세 살이야."
"으음."
오히려 그분이 다이애나 실력을 보고 놀라셨을지도.
예지는 넷째 어깨를 토닥거리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도 잘하고 있어."
"알겠어."
띠리리링─
그때, 지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하루 종일 같이 있었으면서.
"여보세요."
-아까 말 못 해준 게 있어서 전화했어.
"응?"
매니저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놀이공원에서 오빠가 고백하려나 봐.
"무슨 말이야."
-우리 대표님! 고백할 거라고!
"진짜로?"
-응.
전화를 끊고, 한동안 심장이 두근거렸다.
물론, 아직 마음에 걸리는 사람도 있었다.
'.... 은서.'
솔라와 대표님, 둘 중에 어느 쪽을 골라야 할까.
아니, 고를 수 있을 리가 없지.
아빠와 엄마 같은 선택지니까.
예지의 깊은 고민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 * *
며칠 뒤.
「오락실 유니버스」 제작진은 놀이동산 앞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무려 비틀즈 멤버와 함께하는 스케줄.
주변에 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폐장이 가까운 늦은 시각에도 팬들은 떠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잠시 후, 구경꾼들은 홍해처럼 반으로 갈라졌다.
그 사이로 들어온 밴에서 솔라 멤버들이 내렸다.
"와아아아아!!!!"
콘서트장처럼 강렬한 함성이 쏟아졌다.
싱그러운 꽃처럼 밝은 미소로 팬들에게 인사하는 멤버들.
오늘은 기존 「오락실 유니버스」에 게스트가 추가되었다.
김예지, 장은서, 다이애나.
게다가, 비틀즈 멤버까지.
나현석 피디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촬영을 시작했다.
"여러분, 오늘 오프닝은 최대 인원으로 시작하네요."
"네에!"
오늘도 리액션 좋은 소미가 냉큼 대답했다.
"피디님, 아직 한 명 안 왔어요!"
"하하하."
이미 기사가 나갔으니 멤버들도 모른 체하지 않았다.
"폴 선생님은 이미 놀이공원에 계십니다."
"우리가 찾는 거에요?"
"정답!"
나 피디는 쫄보 멤버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가장 늦게 찾는 세 명은 Q-익스프레스 타는 겁니다."
"???"
소미와 남민지, 엠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예지 씨도....'
무서운 거 못 타나 보네.
뜻밖에 수확을 얻은 기분이다.
"아무튼, 시간 됐네요."
"가즈아!!!"
"가즈아!!"
정확히 폐장 시각에 맞춰, 전세 놀이공원에 멤버들이 입장했다.
"정 대표님."
"네."
"같이 가시죠."
"???"
그와 같이 다니면 방송각이 나올 때가 많았다.
특히, 뒤통수를 긁적거릴 때는 거의 100%였다.
"저 스탭 아닌데요."
"그래도 같이 가시죠."
"...."
나 피디는 자연스럽게 정수호 대표와 함께 움직였다.
"오늘 람보르가니 타고 오셨던데."
"네. 잘나가네요."
".... 당연히 잘나가죠."
그게 얼마짜린데요.
"아무튼, 지금 폴 선생님은 관람차 근처에 있다고 하시네요."
"아 그래요?"
"그쪽으로 가시죠."
"네."
초반에는 술래잡기 형식.
중간부터 같이 게임을 진행할 생각이었다.
사진 보고 인물 맞추고, 음악 듣고 맞추기.
'비틀즈 멤버와 함께하는 게임이라....'
다시 생각해 봐도 살짝 어이가 없었다.
너무 비현실적이라 웃음이 다 나왔다.
영국에서 단독 콘서트 한번 하고 오더니 어마어마한 인맥을 쌓은 분.
'.... 정수호 대표님.'
앞장 서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얼마나 찬란한지.
해외에 진출한 프로듀서 중 성공한 케이스가 있던가.
'비결이 뭘까.'
음악이든, 연기든, 그의 손에 닿는 작품은 대중의 선택을 받았다.
한국 연예계에 다시 없을 천재겠지.
"저기, 먼저 도착했네요."
"아."
가장 먼저 폴을 찾은 멤버.
"은서 씨."
"제가 1등이에요?"
"네. 1등!"
"꺄아아악!!"
그녀는 오스카상을 탔을 때보다 기쁜 듯 활짝 웃었다.
처음엔 안 온다고 하시더니 제일 열심히 돌아다녔네.
"그럼 이제 뭐해요?"
"쉬세요."
"이거 탈래요."
은서는 손가락으로 관람차를 가리키며 정 대표를 빤히 쳐다봤다.
"대표님이랑 단둘이."
"...."
곧바로 스탭들은 카메라를 설치하고.
은서는 그와 함께 관람차에 올라탔다.
나 피디는 방송각을 잡아주는 은서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대표님이랑 솔라는 참 사이가 좋네요."
"그러게요."
한편,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여인이 있었으니.
예지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봤다.
'설마 고백한다는 사람이....'
은서였어!?
* * *
관람차 밑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
밝은 조명이 빛나는 야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딸깍─
곧이어, 은서는 촬영 카메라를 꺼버렸다.
"그걸 왜 꺼?"
"그냥요. 촬영 신경 쓰면 못 즐기잖아요."
"...."
활짝 웃는 은서 표정이 왠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은서야."
"저기! 저기 봐요!"
내 말을 끊고 지상을 가리키는 그녀.
어느새 사람들은 개미처럼 작아졌다.
은서는 관람차 아래에 있는 멤버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무도 이쪽을 보고 있지 않은데.
내 옷깃을 붙잡고 호응을 이끌었다.
"저쪽에 소미! 하하."
".... 그러네."
마치 억지로 웃는 슬픈 삐에로처럼.
지상을 둘러보며 멤버들을 관찰했다.
"대표님."
관람차가 정상에 올랐을 때쯤.
은서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할머니만큼 좋아하는 여자가 누군지 알아요?"
".... 누군데?"
"예지 언니요."
"그야, 연습생 때부터 친했으니까"
"그리고."
이내, 은서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떨어졌다.
"가장 좋아하는 남자는 내 앞에 있네요."
"은서야."
"대표님이 좋아하는 그 사람, 절대 놓치지 마요."
"...."
이내, 내 품에 포옥 안기며 눈물을 훔치는 은서.
나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에 손이 올라갈 뻔했다.
"대표님."
어느새 고개를 들고 활짝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보내줄게요."
"...."
관람차가 지상에 내려올 때쯤.
은서는 혀를 내밀고 장난스럽게 떠들었다.
"I was a car."
"응?"
곧이어, 내리기 전에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차였다."
"...."
내가 차인 거 같은데.
그날 저녁, 놀이공원에서 스케줄을 마치고.
곧바로 이어지는 폴 선생님과 찜질방 체험.
당연히 오늘 하루 전세를 내서 다른 손님은 없었다.
스윽─
나는 찜잘방에서 촬영 중인 멤버들을 훑어봤다.
그중에서도, 장은서.
관람차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촬영 중인 카메라를 끄고, 나를 따뜻하게 안아준 그녀.
웃으면서 보내준다는 그 말이 왜 그렇게 슬퍼 보였을까.
'내가 솔라한테 더 잘해야지.'
그것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었다.
비틀즈 멤버와 함께하는 힐링 시간.
전설의 가수가 아닌, 연예계 대선배로서.
폴은 솔라 멤버들에게 따뜻한 조언을 건넸다.
"은서 씨는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었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은서는 나를 힐끔 보더니 입을 열었다.
"한동안 휴식기를 가질까 했어요."
"많이 힘들었나 보네."
"네. 아마도."
은서의 고민을 천천히 듣더니 고민하는 레전드 가수.
폴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명곡을 한 소절 불렀다.
"Let it be."
이내, 비틀즈가 8년 동안 활동하고 해체한 경험을 덤덤하게 풀어냈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고난이 별 게 아닐 수 있어요."
"그럴까요?"
"물론."
걸그룹에게는 7년의 저주가 있다.
통상 계약 기간이 지나면 유명 걸그룹도 해체 수순을 밟는다.
"저는 솔라라는 그룹을 오래 보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폴의 따뜻한 조언에 멤버들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은서도 밝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이내, 그의 앞에서 씩씩하게 입을 열었다.
"저도 오늘만 쉬고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할게요."
"하하하. 쉬지 말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잠시 후,
쉬는 시간에 맞춰 식혜와 구운 계란을 멤버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내게 먼저 다가오는 김 리다.
예지는 내 소매를 잡고 주변을 살폈다.
"대표님."
힐링 받은 사람은 은서 뿐만이 아닌 듯했다.
예지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더니 속삭였다.
"갑자기 이런 말 해서 죄송한데요."
"무슨 말?"
"저랑 연애할래요?"
"...."
예지는 언제부터 이렇게 직설적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