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도약(5)
끝없이 올라가는 솔라의 주가.
김예지는 아이처럼 노는 동생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빌보드 차트 1위를 찍고, 멤버들의 사기는 최상이었다.
딱─
소미는 양주희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으으, 분해."
"또 하쉴?"
"아오."
오늘 촬영 중에 못한 퀴즈 게임을 자체적으로 하는 두 사람.
처음 제안은 소미가 했지만, 주희의 승부욕은 가볍지 않았다.
"다이애나, 빨리 다음 문제 내줘."
"오케이. 기다려봐."
벌써 주희는 열 대쯤 맞지 않았나.
"언니야, 이제 그만할까?"
"놉. 어딜 도망가."
"에이, 어차피 내가 또 이길 텐데여."
"두고 보자고."
주희가 상식 문제로 이길 수 있을까.
소미의 기억력은 일반인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한 번만 져도 병원을 알아봐야겠지만.
"다들 여기 계셨네요!?"
그때, 냄새를 맡은 방송 귀신이 다가왔다.
"오홍, 재밌게 놀고 계시는구나."
".... 왜 그러세여."
주 피디는 씨익 웃으며 카메라를 설치했다.
예능 피디가 이런 장면을 놓칠 리는 없었다.
"아예 라면 걸고 내기하시죠."
"오, 진짜요?"
"네네!"
뭔가 주 피디님 표정이 의미심장한데.
아니나 다를까.
타격감 좋은 소미는 다시 표적이 되었다.
"하체의 피로도를 줄이는 데드리프트의 한 종류로서 좁은 범위의 근육을 키우는...."
"로마니안 데드리프트!"
"정답!"
소미야, 또 속냐.
"피디님, 지금 장난하시는 거죠?"
"에이, 프로끼리 장난을 왜 쳐요."
"...."
주희는 공기 가르는 소리를 내며 핵딱밤을 장전했다
"소미야, 딱 대."
"살려주세요."
"안 죽어."
"이잉."
예지는 그 모습에 쓴웃음을 짓고 주변을 둘러봤다.
'근데 은서가 안 보이는....?'
그러고 보니까, 대표님도 안 보이는데.
슬슬 불안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지 씨, 어디 가세요?"
"은서 찾으려고요."
".... 저 여깄어요!"
그때, 두꺼운 외투를 벗으며 다가오는 은서.
예지는 옷을 받아주며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너 얼굴이 엄청 빨개."
"뭐, 뭐가!?"
이내, 은서의 볼에 손을 대며 말을 이었다.
"얼굴이 차네. 밖에서 뭐하고 왔어?"
"아 몰랑."
"...."
홍조를 띄운 모습이 수상했다.
단지 찬 바람을 쐬고 와서일까.
"얘들아!"
그때,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대표님.
'.... 같이 있었구나.'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하필이면 은서랑 남자 취향이 겹쳐서.
"대표님, 볼에 뭐 묻.... 아?"
순간, 대표님의 볼에 묻는 자국에 눈을 크게 치켜떴다.
'립스틱 자국이....'
오늘 은서가 바른 립과 같은 빛깔.
예지는 다시 평정심을 찾고 말했다.
"볼에 뭐 묻었어요."
"아, 그래?"
"제가 닦아 드릴게요."
"고마워."
예지는 립스틱 자국을 슥슥 문지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에휴....'
대표님은 마음도 모르고 밝은 어조로 말했다.
"예지야, 스케줄 들어왔어."
"무슨 스케줄이요?"
대표님의 상기된 표정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비현실적인 단어.
"UN 회의 때 연설....?"
"맞아."
그게 잡고 싶다고 잡을 수 있는 스케줄인가.
"주제는 평화와 평등, 아시안 인종 차별."
".... 세상에."
우리 대표님의 영업력은 어디까지 닿았을까.
이제 웬만하면 놀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와아, 우리가 그 정도야?"
"대박! 예지 언니만 하는 거예요?"
"나는 떨려서 못 할 듯."
"아, 음...."
정수호 대표님은 항상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사람이었다.
너무 유능해도 문제야.
경쟁자가 너무 많아서.
"예지야, 할 수 있겠지?"
"그럼요, 해야죠."
물 밑에서 얼마나 고생하시는지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어렵게 잡으신 기회일까.
따아아아악─!
그때, 소미의 이마에서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끄아아아앙!!!"
여러모로 정신없는 하루였다.
* * *
북극에서 진행하는 마지막 일정.
멤버들은 앨범 홍보를 위해 작은 공연을 준비했다.
사실 프로모션이 필요한 레벨은 진작에 지났지만.
'그래도 팬 서비스는 해야지.'
김고은 작가는 카메라 속 멤버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모, 그림 대박이에요."
"그러게."
푸른 바다와 빙하를 배경으로 무대를 준비하는 솔라.
AMA 이후, 방송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이는 무대였다.
"현성아, 그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이요?"
"예지가 UN 회의 때 연설할 준비 한다던데."
"아, 네."
처음 웹드라마에서 예지를 봤을 때부터 떡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노력과 재능, 성격까지 완벽한 육각형 아이돌.
당시 연기 실력이 그리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괜히 내가 다 뿌듯하네."
이제는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아티스트로 성장했다.
"이모, 울어요?"
"그런 거 아니야."
"하하하, 운다, 울어."
".... 주 피디 뒤질래?"
"죄송합니다."
아무튼, 예지는 앞으로도 계속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겠지.
'연애만 안 하면....'
그때, 정수호 대표가 무대를 준비하고 천천히 다가왔다.
솔라를 키운 거인.
이 사람이 있으면.
'얘들 걱정은 할 필요도 없겠네.'
멤버들도 갑자기 성공해서 거드럭거릴 법 한데.
월드 스타가 됐지만, 아직 대표 말을 잘 따랐다.
"대표님, 좋으시겠네요."
"네?"
"예쁜 딸이 다섯 명이나 있잖아요."
"아하하."
솔라는 이제 국민 여동생이고 딸이니까.
연애하려 해도 대표님이 막아주시겠지.
'예지는 누가 데려갈까.'
탈아이돌급 실력에, 세상 혼자 사는 비주얼.
보컬, 안무, 작사, 연기도 잘하고.
이젠 UN 회의에서 연설도 하고.
사람이 너무 완벽해서 딱히 부럽지도 않았다.
"UN 회의 연설문은 준비하고 계신가요?"
"네. 예지가 직접 하기로 했어요."
"아하."
하긴, 서정적이고 따뜻한 가사로 인정받았으니.
이런 게 바로 아이돌이 줄 수 있는 선한 영향력.
"대표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제가요?"
"그럼요."
솔라를 데뷔 때부터 키웠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예지가 옛날에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나네요."
"무슨 인터뷰요?"
너무 옛날 일이라 크게 이슈가 된 건 아니었지만.
"대표님께서 Tvm 피디님한테 무릎도 꿇으셨다고."
"제가요....?"
"네. 보통 로드가 그렇게까진 못하거든요."
"신발 끈 풀린 게 아닐까요?"
"아휴 참, 농담도."
정 대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Tvm이면 김지훈 피디, 제 학교 후밴데....?"
"그러면 더 대단한 거죠!"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튼."
아티스트를 위해 후배한테 무릎 꿇을 수 있는 남자.
이번 촬영에서 분량을 솔라만큼 몰아줄 예정이었다.
"자, 그럼 슬슬...."
김 작가는 솔라 멤버들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표님도 저쪽에 서주세요."
"네?"
"무대 하셔야죠. 출연자잖아요."
"아."
댄싱머신 춤 실력을 보려고 지금까지 기다렸다.
이번 극과 극 웹예능 최고의 하이라이트 아닌가.
"우리 컨셉 잊으신 거 아니죠?"
"컨셉이 뭐였죠."
"극과 극이요. 막내 소미 포지션에 서시면 됩니다."
"...."
솔라의 아버지를 빤히 바라보는 멤버들.
수호는 어색한 연기로 뒤쪽을 가리켰다.
"저, 저기 북극곰!?"
".... 안 통해요."
"진짜 북극곰!!!!"
"???"
이내, 총을 들고 달려오는 경호팀.
위협사격에 냉큼 도망치는 북극곰.
주 피디는 냉큼 카메라를 들고 진귀한 장면을 촬영했다.
그동안 솔라와 정 대표님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았다.
'방송 잘 살려서....'
조회수 1억 찍고 천만 너튜브 만들어보자고.
* * *
며칠 뒤.
우리는 북극 여행을 정리하고 미국에 도착했다.
어느새 찬바람이 불어오는 로스앤젤레스의 겨울.
길가에 설치한 크리스마스트리는 연말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네. 오랜만입니다."
미국에서 나를 반겨주는 구현식 팀장님.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미국 지사 직원들.
"앞으로 20분 뒤에 대표 회의 시작할게요."
"네? 조금 쉬시지 않고요."
"미팅 끝나고 쉴게요."
"네. 알겠습니다."
북극 여행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다.
역시, 방송 출연보다는 차라리 좋은 작품 고르는 게 편하네.
재능이나 끼가 있어도, 아무나 연예인을 할 수 없는 것 같다.
'뒤통수 픽은 어쩔 수 없지만....'
이제 웬만하면 방송은 자제해야지.
"오빠!"
내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하는 엄지유.
못 본 사이에 살이 좀 찐 것 같기도 하고.
"미국에서 편했나 보다?"
"응. 스테이크도 이제 질림."
".... 순록 스테이크는 먹어봤냐."
"북극에서 루돌프도 먹고 왔어!?"
"됐고, 멤버들은."
"지금 숙소에 짐 풀고 있어."
"수고했어."
지유는 방긋 웃으며 그동안의 썰을 풀었다.
"오빠, 피올로 의원님 기억하지?"
"당연하지."
"저번에 프로야구 때, 피올로 의원 아들 챙겨줬다면서."
"아."
미국도 원래 인맥 사회였나.
"원래 예지가 좀 착하잖아."
"진짜 착하면 복 받는다는 말이 맞나 봐."
".... 그러네."
단순히 운으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그 당시, 예지한테 프로야구 개막식 공연 무대가 들어왔다.
미국에 진출해서 빠르게 성공했기에 그런 기회도 주어졌지.
덕분에, 피올로 의원도 만났으니.
이래서 내가 뒤통수 픽을 못 끊어.
"오빠, 벌써 올해도 마지막이야."
"그러게. 시간 빠르네."
"12월에 오스카상 후보 발표하지 않나?"
"그럴걸."
전 세계 최고의 영화제, 아카데미상.
「로이랜드」는 기대해도 될 것 같다.
'.... 여우조연상.'
예지가 후보에 오르기만 해도 가문의 영광 아닌가.
처음 드림 에이전시에 매니저로 입사했을 때.
세계적인 배우를 키우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꿈이 현실이 되고, 대표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일단 너도 회의 참석해."
"알겠어."
이내, 직원들은 하나둘씩 미팅룸에 모여들었다.
첫 번째 회의 주제는 미국 콘서트 투어.
무대별 컨셉과 편곡이 미세하게 달랐다.
"이번 주말, 포럼 경기장에서 공연이 있습니다."
"규모는요."
"대략 1만 5천 명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좋네요."
콘서트장의 조명과 음향기기, FD와 관리자들도 회의록에 작성했다.
공연에 부를 곡은 뭐고, 편곡 방향은 어떤 방식인지.
앵콜송은 몇 곡을 부르고, 중간 멘트는 어떻게 칠지.
유능한 직원들이 가져온 서류를 검토만 해도 회의가 진행되었다.
"변동 사항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네. 다음은 라스베이거스 W 극장에서 피날레 무대를...."
이제 하나 끝났네.
'그나저나....'
미국 지사 직원들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뭔가 초롱초롱해졌다고 해야 하나.
특히, 홍보팀장 눈이 부담스러웠다.
빌보드 1위 때문인지, 아니면 UN 연설 때문인지.
이전보다 나에 대한 신뢰가 더 쌓인 건 확실했다.
"아, 구 팀장님."
"네. 대표님"
슬슬 회의를 마무리할 때쯤 향후 계획을 발표했다.
"내년에는 해외에서 단독 콘서트를 준비할 겁니다."
".... 준비하겠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끄덕이는 구 팀장님.
이글거리는 눈빛이 믿음직스러웠다.
"대표님, 혹시 웸블리 스타디움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네?"
"미국이 아니라 해외 콘서트라고 하셨잖아요!"
"아니."
그냥 딱히 어떤 의미는 아니었는데.
거기 프레디 머큐리 공연장 아닌가.
"크으, 세계 최고의 가수에게 어울리는 최고의 공연장! 기대하겠습니다!"
".... 너무 부담 주지 마세요."
"아, 죄송합니다."
웸블리가 옆집 개 이름도 아니고.
"거기 객석이 9만 명인 거 아시죠?"
"아, 9만은 너무 부족하군요!"
"아뇨. 너무 많은데요."
"오, 겸손하신 자세! 항상 본받겠습니다! 하하하."
"...."
선택받은 아티스트만 설 수 있는 무대.
'.... 한 번 알아 볼까.'
* * *
LA 포럼 경기장에서 스타트를 끊은 미국 콘서트 투어.
현 빌보드 차트 1위의 위엄일까.
현지 관객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한국에서 건너온 조영수 기자는 무대 뒤쪽에서 셔터를 눌렀다.
마지막 순서, 솔라의 등장과 함께.
어마어마한 함성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와아아아아아─!!!!
거대한 군중이 주는 압도적인 힘.
무대 뒤에서도 느껴지는데 멤버들은 어떨까.
이미 유명 팝스타 대우를 받는 기분이었다.
띠링─
그때, 미리 약속한 정수호 대표님의 톡을 받았다.
"조 기자님!"
"오랜만입니다. 대표님."
"그러게요."
솔라는 데뷔 쇼케이스 때부터 인연을 이어왔다.
그때, 대형 신인이 탄생했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2년 만에 월드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미국에는 언제 오셨어요?"
"솔라 미국 투어 첫 공연인데 당연히 와야죠!"
"와, 감사합니다."
"제가 감사하죠."
그 당시 로드 매니저였던 정 대표님은 이미 거물로 성장했다.
한국에서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프렌즈의 방 의장님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겠지.
"대표님을 만난 게 큰 행운이었네요."
"제가 행운이었죠. 드림 에이전시 때 도와주셨잖아요."
"그랬.... 던가요?"
"네. 드림 에이전시 권 이사가 시비 걸 때 기레기 한 명이...."
"아아."
이상한 기레기랑 얽혔을 때였나, 별로 큰 도움은 아니었는데.
작은 도움도 잊지 않는 분.
역시 그의 그릇은 남달랐다.
"조 기자님, 오늘 솔라 인터뷰하시죠."
"다, 단독 인터뷰요?"
"네. 여기까지 오셨는데 뭐라도 건지는 게 있으셔야죠."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미국까지 날아온 보람이 있었다.
데뷔 초창기에 쌓은 인연 덕분에.
띠리리링─
그때, 대표님의 스마트폰에 누군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전화 좀 할게요."
"네. 편하게 받으십쇼."
이내, 유창한 영어를 뱉는 정 대표님.
굳이 숨기지 않으셔서 같이 들었는데.
'보좌관....?'
익숙하지 않은 호칭에 귀를 기울였다.
"네네. 변동사항 없습니다. 그럼 LA 국제공항에서...."
대체 누구랑 전화하시는 걸까.
이내, 대표님과 눈을 마주쳤다.
"보좌관님, 외부인이랑 같이 타도 괜찮나요? 기자분인데."
".... 롸?"
"감사합니다."
이내, 전화를 끊고 씨익 웃으며 말하는 정수호 대표.
"기자님, 혹시 미국에 일주일만 더 머무르실래요?"
"무슨 일로....?"
.
.
.
.
.
며칠 뒤,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
조영수는 전세기를 눈앞에 두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친구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던가.
친구를 잘 두면 UN 회의도 참석했다.
"예지야, 어서 타자."
"네에!"
"기자님도 타시죠."
"네? 아, 네."
조 기자는 부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뒤를 따랐다.
그의 눈에 정수호 대표는 거인처럼 보였다.
단순히 아티스트를 키우는 엔터가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월드 클래스 에이전트.
한국에서 다신 나오지 않을 천재 프로듀서.
UN 회의 연설에선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