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도약(2)
AMA 신인상 수상 이후.
슬슬 걸그룹 탈을 벗고 아티스트의 길을 걷는 분위기였다.
현재 빌보드 최상위권은 세 곡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누가 믿어줄까.
전혀 안 끌리는 옵션을 고르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게다가, 뒤통수가 간질간질하면 100% 확률이라고.
한가로운 주말 오후.
혼자 소파에 누워 빌보드 핫 100 차트를 검색했는데.
솔라는 마지막 하나의 장벽에 막혀 올라가지 못했다.
[Rank 1 : 「High & Low」 ]
[Rank 2 : 「Save The Earth」 ]
[Rank 3 : 「Talkative」 ]
빌보드 핫 100 차트 2위.
보면서도 믿기 어려웠다.
'이게 K-똥촉의 힘인가.'
위로는 장기 집권 중 내려올 기색이 없는 앤소니.
아래는 솔라와 AMA 신인상 후보에 오른 레이븐.
'.... 1등은 어떻게 안 되나.'
이미 16개국 차트를 정복했지만, 여전히 아쉬웠다.
하이엔드와 블루숄츠에 이어서,
세 번째로 빌보드 정상을 찍은 한국 가수 타이틀이 탐나는데.
'큰 거 한 방이 필요해.'
정규 2집 제작도 마쳤고, 이제 미국 활동을 위한 판을 그리고 있었다.
'연말 시상식도 나쁘지 않지.'
시상식을 기본적으로 시청률이 어느 정도 나와주니까.
당장 3사 가요제나, 대종상과 청룡 영화제.
내년 초엔 그래미와 아카데미 시상식까지.
'그게 아니면.'
준비 기간은 짧으면서 역배각이 뜨는 단발성 예능은 어떨까.
그동안 조건부로 뒤통수가 가려운 경우도 여럿 경험했으니.
두 번째 정규 앨범 발매 시기에 맞춰서....
띠리리링─
그때, 스마트폰에 막내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소미야, 무슨 일로...."
-문 좀 열어주세요.
"???"
이내, 초인종 소리를 듣고 현관문을 열었는데.
"으으 화장실, 화장실. 급해급해."
"...."
우리 걸그룹은 화장실이 급할 때 대표 집에 들어오네.
소미는 화장실을 쓰고 시원한 표정으로 거실에 나왔다.
"아우, 언니들은 샤워를 한 시간씩 해요!"
"너는 10분 컷이고?"
"5분 컷."
"그런 걸로 자랑하지 마라."
"넹."
그나저나, 컴백 앞두고 긴장되지도 않은가.
"지금 언니들은 뭐 하고 있어."
"주희 언니는 액션 스쿨 갔어요."
"아, 그러겠네."
같은 영화 출연이라 최성락 씨랑 같은 학원인데.
괜히 트러블 생기는 건 아니겠지.
그 인간도 어지간히 관심 종자더만.
일단, 구 팀장님한테 꼭 붙어있으라고 말씀드려야겠다.
"그리고 다이애나 언니는 한국어 수업."
"무슨 수업?"
"엠마랑 우에다 유이 씨요!"
"아하."
요즘도 매일 가르치나 보네.
"그리고 예지 언니랑 은서 언니는 피플 프로덕션에서...."
"너도 온 김에 면담이나 하자."
"면담이요?"
"응. 민지랑 갱생 프로젝트 촬영 얼마 안 남았잖아."
"네, 맞아요."
벌써 KBC에선 특급 게스트 출연이라며 열심히 홍보했다.
현재 빌보드 핫 100 최상위권 아티스트.
얼마 전에 AMA 신인상 버프도 받았으니.
"나도 갱생 프로젝트 첫 촬영 때 같이 가줄게."
"대표님이요?"
"응. 너희 학교에서 촬영한다며."
"맞아요."
민지랑 적당히 거리 조절도 해야 해.
일단 방송 컨셉은 선생과 제자니까.
"아, 대표님"
소미는 뭔가 떠오른 듯 누군가의 이름을 언급했다.
"우리 학교 신문부 기자가 대표님 인터뷰하고 싶대요."
"서광예고? 고등학생이?"
"네. 그냥 바쁘면 어쩔 수 없고."
"글쎄."
별로 끌리는 인터뷰는 아니었는데.
뒤통수가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네.
"아무튼."
일단, 정규 2집 컴백은 한국에서 쇼케이스로 진행한다.
이후에 활동은 미국에서 순회공연을 다닐 예정이었다.
"다음 달부터 미국에서 활동할 거야."
"그럼 연말 가요제는요?"
"그때 상황 봐서 왔다 갔다 하려고."
"아하."
콘서트 일정을 최대한 타이트하게 잡았다.
「왕의 품격」 촬영 전에 활동을 마칠 거라.
"미국에서 괜찮은 예능 하나 잡아볼게."
"또 군대 보내시려고!?"
".... 이제 안 보내."
사파리도 가고, 아마존도 갔다 왔다.
솔라빔 때 해외여행은 실컷 갔으니.
"보통 오지 탐험이 제일 무난한데."
"???"
오지 탐험 정도는 공약으로 걸어야 빌보드 1위를 찍지 않을까.
역시, 생각만 해도 벌써 뒤통수가 간지럽잖아.
과연, 역배각의 근─본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대표님, 저 방금 이상한 소리 들렸어요."
"잘 들은 거야."
"아-, 아-, 아-, 삐 소리 나."
"삐 소리 아니야."
"안 들려 안 들려."
"...."
근데 갑자기 오지 탐험하는 방송을 어디서 구해.
우리 너튜브 채널 관리자한테 말하면 준비하려나.
'주 피디님.'
연말인데 안부 인사나 드려야지.
* * *
서광 예술고등학교.
KBC 소속 이은성 피디는 장비를 꼼꼼하게 점검했다.
오늘 스카이 엔터의 대표가 직접 방문한다고 했으니.
"중요한 손님 오시니까 정신 바짝 차리자고."
"네. 알겠습니다!"
요즘도 이 바닥에는 돼지머리에 돈 꽂고 절하는 고사 문화가 있었다.
'성공'하는 작품은 하늘이 정해 주니까.
그만큼 대중의 마음은 갈대와 같았으니.
즉, 정수호 대표의 미친 안목은 신의 계시와 다를 게 없다는 의미였다.
'드디어 우리 작품도....'
한줄이 빛이 내려오는구나.
그 어렵다는 정수호 픽으로 선정되었다.
비록 며칠 단발성 게스트에 불과했지만.
"언제쯤 오시려나."
"여기 신문부에 들렀다 오신다고 했습니다."
"신문부?"
"네. 10분 정도."
뭐지, 한 번 가볼까.
"같이 가시죠."
"그래, 그럼."
이 피디는 조연출과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이번에 솔라 AMA 무대 영상 봤지?"
"네. 가사도, 비트도 미쳤어요. 너무 좋아."
"그러니까."
음악의 힘은 위대했다.
신생 엔터의 걸그룹은 월드 스타가 됐고.
전 세계 음악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타이틀곡을 먼저 공개한 건 아마 정수호 대표님의 신의 한 수가 아닐까.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파격적인 선택.
덕분에, 역사에 남을 대기록을 세웠으니.
"요즘 음방 피디님들이 계속 애원한다던데."
"네. 한국 음방에 제발 출연해달라고."
"그만큼 단호하신 거지."
솔라와 정수호 대표님께 시간은 금이었다.
똑, 똑─
이내, 동아리방 문을 노크하고 안에 들었는데.
"대, 대표님."
"네."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정수호 대표님.
그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아직 시간 좀 남지 않았나요."
"아, 네. 맞습니다."
"제가 지금 인터뷰 중이라서요."
"네?"
서광예고 동아리 인터뷰를 한다고?
메이저 언론 인터뷰도 마다하면서!?
드르륵─
이 피디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신문부를 벗어났다.
'그래. 소미도 고등학생이니까....'
예고 학생들의 뜨거운 열정과 꿈을 지켜주기 위해서.
과연, 성공한 사람들의 마인드는 범접할 수가 없었다.
"인성도 대단하시네."
"네. 시간이 금인 분이니까요."
"...."
비유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 0티어 걸그룹 프로듀서 아닌가.
솔라, 이클립스, 루나.
키우는 그룹마다 전부 대박이 났으니.
천재적인 안목으로 작품을 분석하는 그 시간은 정말 귀했다.
"무슨 인터뷰를 할까요."
"스타 멘토링 같은 거겠지."
"어후, 학생들 부럽네."
"나도."
한편, 정수호는 학생들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변했다.
대충 포장하고 양념도 치려고 했는데.
무조건 솔직한 답변을 원한다고 하니.
"성공의 비결은 촉이에요. 뒤통수의 촉."
"아...."
레미는 인터뷰 중 탄식을 뱉었다.
'영업 비밀이시구나.'
너무 추상적으로 답변하셔서 내용을 쓰기 어려웠다.
이 귀한 발걸음을 해주셨는데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저기, 그럼 명곡을 뽑는 비결은....?"
"직원들이 가져온 곡을 일단 들어요. 그게 좀 아니다 싶으면...."
"아니다 싶으면?"
"뒤통수 신호를 기다려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신호가 온다 싶으면 그 곡으로 픽스하는 거죠."
"아잇, 그게 전부일 리가 없잖아요!"
"그게 전부인데요."
"...."
진지한 표정을 보니 가식이나 거짓이 없었다.
"그럼 엔터 대표로서 연예인 지망생들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
"글쎄요."
그는 습관처럼 뒤통수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현재 실력은 중요하지 않아요. 실력이 떨어져도 누군가에겐 보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라면....?"
"제가 그래요. 솔라도 연습생 때는 평범한 소녀들이었습니다."
"아."
현재는 월드 클래스급 슈퍼스타로 성장했지.
갓 데뷔했을 때와 실력 차이는 천지차이였다.
"걸스 오퍼레이션, 레미 씨 맞죠?"
"저, 저를 기억하세요?"
"그럼요."
사실, 그녀는 연예인의 꿈을 접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만큼 걸스 오퍼레이션 촬영 중에 최선을 다 했으니.
"레미 씨도 월드 스타가 될 것 같네요. 제 느낌이 맞다면."
"그럼 혹시 스카이 엔터 연습생으로....?"
"아뇨. 이제 연습생 안 뽑아요."
".... 힝."
멀리서 '응원'만 해주시는구나.
'내가 월드 스타는 무슨....'
당연히 위로 차원에서 하는 말씀이시겠지만.
그래도 대표님 덕분에 힘이 나는 건 사실이다.
"제가 그렇게 재능이 있어요!?"
"네. 완전 별.... 았어요."
"???"
별, 스타. 탑스타가 될 상인가 봐.
"대신 제가 아는 회사에 추천서 넣어 드릴게요. 연습생으로."
"저, 정말요?"
"그래도 활동명은 하나 만드는 게 좋겠어요. 한국 이름 같지가 않아서."
"하나 추천해 주세요!"
"으음."
이내, 정수호 대표가 빠져나간 자리.
레미는 새로 지은 이름을 읊조렸다.
".... 세미."
이름이 너무 예뻤다.
개명하고 싶을 만큼.
* * *
시간이 흘러,
솔라의 두 번째 정규 앨범 발매일이 성큼 다가왔다.
행사나 스케줄도 최대한 미루고 준비한 앨범이었다.
"오빠, 우리 잘 돼야 할 텐데."
"잘 될 거야."
"정말?"
"응."
수록곡 하나하나 전부 신경 써서 준비했다.
뭔가 꼭 거슬리는 점이 하나씩은 있었으니.
'종합 선물 역배 세트.'
쇼케이스장에서 지유와 함께 솔라 멤버들을 기다렸다.
"오빠, 솔라빔 최신화 반응 봤어?"
"아, 독도 편."
"요즘 인터넷에서 시끌시끌하더라."
"...."
세계적으로 이슈 몰이를 제대로 했다.
현재 넥플렉스 글로벌 랭킹 1위에 알박한 솔라의 리얼리티 예능.
보통 한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독도 관련 이슈에 관심이 없었는데.
"블루숄츠 제치고 국뽕 걸그룹 등극함."
"...."
아주 명예롭네.
솔직히, 정치적인 이슈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뒤통수가 이끄는 쪽으로 움직였을 뿐.
"지유야, 앨범 선주문 100만 장 확인했지?"
"응. 여러 번 확인했지."
초동 일주일에 100만은 무조건 찍을 것 같다.
추가 주문을 얼마나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활동은 LA부터 순회 공연 다닐 거야."
"알겠어."
단독 행사는 아니었지만, 대부분 피날레 무대를 장식했다.
내년엔 해외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 수 있을까.
이번 정규 앨범 성적에 따라 많이 갈리겠지만.
"아, 맞다."
엄지유는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내게 물었다.
"소미 예능 촬영은 어땠어?"
"생각보다 꼼꼼하게 잘 가르쳐 주더라."
"오, 그래?"
사실, 공부는 누가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본인이 하는 거라.
"민지가 공부를 안 함."
"...."
대부분의 연예인들은 공부랑 거리가 멀었다.
소미가 특이한 케이스지.
이제 곧 고3 올라가는데.
"소미도 내년 이맘때 수능 보겠네."
"응. 시간이 참 빨라."
"...."
중학생 때부터 봤는데 벌써 이렇게 커서 수험생이 됐다.
"근데 소미는 대학교 가는 건가?"
"글쎄. 아직 안 물어봤네."
일단 수능 공부할 시간을 너무 안 준 거 아닌가.
대학을 포기하기엔 좋은 머리가 너무 아깝잖아.
'나중에 진지하게 얘기해 봐야겠다.'
연예인도 학벌이 좋아서 나쁠 게 없었다.
특히, 수능 보고 정시로 입학하면 베스트.
-아아, 마이크 테스트.
그때, MC가 무대에 올라 쇼케이스 무대를 준비했다.
리허설은 어제 이미 마쳤으니, 생방송으로 진행했다.
마침내, 세상에 공개되는 정규 2집 앨범.
원래 Save The Earth도 오늘 같이 발매하는 거였는데.
가정법은 의미가 없었지만, 아마 선공개하지 않았으면.
'지금이랑 많이 달라졌겠지.'
라방을 보러오는 팬들이 지금의 절반 미만으로 줄었을지도 몰랐다.
라이브 방송을 켜자마자 들어오는 시청자 10만 명.
그 수는 멈출 생각이 없이 계속 상승 곡선을 그렸다.
미친듯이 올라가는 채팅창을 대충 확인하고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부터 솔라의 정규 2집, 그 첫 번째 무대를 만나보시죠!
MC의 진행과 함께 등장하는 다섯 명의 멤버들.
화려한 축포가 터지고, 조명이 소녀들을 비췄다.
'오늘 여전하네.'
일상과 무대에서 갭 차이가 너무 심해다.
무대에서 노래 부를 때는 이렇게 멋진데.
"하아, 소미는...."
아무튼, 너무 극단적이라니까.
띠링, 띠링─
그때, 스마트폰에 주현성 피디님의 톡이 날아왔다.
[대표님, 좋은 아이템 찾았어요!]
[이거 무조건 빌보드 1위 찍는 겁니다!]
".... 자신감 보소."
곧장 주 피디님께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피디님."
-대표님, 어그로 아닙니다. 이건 대박이에요, 대애박!
"워워, 진정하세요."
-아, 넵.
그는 숨을 고르고 주제를 꺼내기 시작했다.
-저희 이모님께서 쓴 예능 대본인데요.
"아, 김고은 작가님!?"
-네. 맞아요!
예지의 웹드라마 데뷔작을 집필한,
막장 드라마의 대모 김고은 작가님.
-저희 이모님이 요즘 예능 작가도 하시거든요.
"아, 네. 알고 있어요."
-오, 아시는구나!
"당연하죠."
시청률 15프로쯤 나오시던데.
진짜 천재 작가는 다르다니까.
"드라마, 예능 섭렵하신 갓작가님 아닙니까."
-하하하. 제가 오지 탐험 얘기하니까 괜찮은 아이템이 있다고 하시네요.
"오, 그래요?"
주 피디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제목은 극과 극!
"에....?"
대충 제목만 들으면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조금만 더 자세한 설명을 요청했는데.
-북극 아니면 호캉스.
"...."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니냐.
북극곰은 사람을 찢어.
양주희도 못 이긴다고.
설명을 듣기도 전부터 역배각 냄새를 솔솔 풍겼다.
이내, 어김없이 뒤통수에 찾아오는 간지러운 감각.
"그럼 공약으로 걸죠."
-공약이죠?
"빌보드 1위 찍으면 북극, 2위에 머무르면 호캉스."
-오, 좋네요!
빌보드 정상에 오르면 북극도 기쁜 마음으로 가지 않을까.
MC 분이 다시 무대 오르기 전에 공약부터 말씀드려야겠다.
"소미만 데려갈 수는 없고...."
이내, 쇼케이는 무대에 오른 멤버들을 한 명씩 확인했다.
"소미랑 또 누가 출연하는 게 좋을까요?"
-저기, 대표님.
"네?"
주 피디는 의문스러운 어조로 내게 물었다.
-소미는 왜 기본값이죠?
"...."
아, 그러네.